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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마침내 이 양과 결혼하다

일러스트: AI제작. DALL-E.

[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8)

이 양 친척들의 제안에 반대할 명분도 마땅히 없는 터라 논의 끝에 결혼 날짜를 잡기로 했다. 1953년 1월 21일, 동네 어른들 몇 분과 친척들, 20여 명의 하객을 모시고 처갓집 앞 마당에서 나는 사모관대를, 이 양은 쪽도리에 연지를 찍고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내 친구는 한 사람도 없었다. 장모님과 양숙 엄마는 비록 초라한 결혼식이지만 앞으로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라며 애써 나를 위로하셨다. 어쨌거나 그 날부터 우리는 명실상부한 부부로 거듭났다.

결혼식 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마을 대항 축구시합이 있었다. 나는 동네 청년들의 권유를 뿌리칠 수 없어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시합에 합류했다. 승리의 기쁨에 넘쳐 집으로 돌아오니 장모님과 양숙 엄마 그리고 집사람의 친구들이 야릇한 웃음으로 한마디씩 하신다. “저렇게 철 없는 사위쟁이가 있나?”

양숙 엄마는 장모님에게 철 없고 순진한 사위가 더 낫지 않느냐면서 농담을 건넨다. 그 당시엔 기혼자가 총각으로 위장해 시골 처녀들과 부모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장모님은 총각 사위를 들인 것에 다소 안도하시는 듯했다. 친구는 한 사람도 참석하지 못했지만 해질 무렵 부대 동료 2명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왔다. 제법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양숙 엄마가 나를 불러냈다. “신부가 신랑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뭐하고 있나. 빨리 친구들을 보내지 않고.”

친구들은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부대로 돌아갔다. 철 없는 사위 때문에 장모님이 얼마나 상심하셨을까? 잠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날 밤 우리 부부는 장래를 꿈꾸며 행복한 첫 날 밤을 지냈다. 전쟁 중이라 신혼여행은 꿈도 못 꾸었다. 긴 휴가도 없었다.

나는 3일간의 결혼 휴가를 마치고 정보과 선임하사관으로 복귀했다. 1953년 4월 중순, 우리 63연대는 경기도 포천군으로 부대이동 명령이 떨어졌다. 급히 양양 처가에 들려 또 다시 작별 인사를 고했다. 나는 장모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6월 21일 장인어른의 제삿날엔 꼭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편히 계십시오.”

우리 부대는 예비연대로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실전 배치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어느덧 6월 21일 장인어른 제삿날이 돌아왔다. 3일간의 휴가를 받아 양양에 다녀 올 준비를 했다. 전시라 모든 휴가 장병은 철모에 무기를 소지한 상태로 움직였다. 그날 오후 부대를 떠나 밤 7시경 인제군 원통리까지 군용차편을 이용했는데 진부령 국도까지는 군용차 왕래가 가능했지만 미시령에는 야간 운행이 불가능하다고 현병이 말했다.

지난날 포로 생활에서 이보다 더한 역경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기억을 되살려 단단히 무장하고 미시령을 걸어 넘기로 결심했다.

헌병은 날이 새거든 출발하라고 했지만 뿌리치고 미시령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캄캄한 밤중에 비포장 도로의 돌 뿌리를 걷어차며 영을 향해 걸어갔다. 님 찾아 천리길이라지만 홀로 가는 밤길에 약간의 두려움이 없진 않았다. 온 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어느덧 미시령 정상에 올랐다.

멀리 동해에서 훤하게 먼동이 트는 모습이 보였다. 흐르는 땀방울을 씻으며 아침 6시경 동해에 도착해 헌병 검문소에서 군용차를 타고 단숨에 양양 처가에 도착했다. 아쉽게도 아버님 제사는 이미 끝난 시간이었다. 장모님께서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그 무서운 밤길을 겁도 없이 혼자 넘었느냐며 놀라기도 하고 고마워도 하셨다. 두고두고 생각해봐도 어디서 그런 힘을 나왔는지 모를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 했으리라.

보람 있는 하룻길 휴가를 마치고 무사히 포천의 부대로 복귀했다. 그리고 충실히 군 생활에 임했다. 나는 이번 휴가에서 내 인생에 가장 크고 새로운 기쁨을 맛보았다. 장모님은 내게 조용히 무릎을 맞대고 말했다. “봉실이가 임신 중이네.”

옆에 앉아 있던 아내가 나를 보면서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출산 예정은 12월이라고 귀띔해 주셨다. 내가 벌써 아버지가 되다니… 어쩐지 마음이 설렌다.

휴전이 되다

7월 25일 속보가 떴다. 이틀 후, 7월 27일 휴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전선에서는 마지막 한 뼘의 땅이라도 사수하기 위해 불을 뿜는 포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훗날 들은 이야기지만 포병들이 얼마나 적지에 포탄 사격을 가했는지 포신이 불에 달아 휘어지기도 했다는 얘기다. 지루한 전쟁은 드디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일단락됐다. 나는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던 지난 시간을 추억하면서 여기까지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불투명한 우리 부부의 앞날을 인도해 주실 것을 간구했다. 휴전이 되었어도 우리 부대는 계속 전투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내의 출산 일이 다가왔다.

12월 22일 일주일간의 휴가를 얻어 또 한번 미시령을 넘어 처가에 도착했다. 장모님은 나를 보고 곧 아버지가 될텐데 기분이 좋으냐고 농담을 하셨다. 그동안 아내는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교회 선교원을 맡아 봉사하고 있었다.

12월 25일,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신 날, 장모님은 산기가 있다며 출산준비를 서둘렀다. 아내는 상당한 진통 끝에 새벽 4시경 첫 아들을 출산했다.

앞마당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양대의 새벽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성탄을 축하하는 노래 속에 첫 아들이 태어났다. 그날 새벽 장모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던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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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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