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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다음세대를 위한 설교의 과제 (2)

▲ 사진: Sixteen Miles Out on unsplash

우리는 ‘권위’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유일한 근거가 개인의 감정이 되어 버렸다. ‘상처받았다’는 말 앞에는 아무런 권면을 할 수 없다. 죄를 책망하면 안 된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달할 뿐.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지 힘주어 말하면 안 된다. 개인이 생각하는 기준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고 조언할 뿐이다. 학교, 직장, 심지어 가장 권위 구분이 명확한 군대에서도 권위가 담긴 메시지가 전달되는 경우는 무척이나 드물다. 세대의 흐름을 거슬러 권위 있는 생각을 전달하다가는 대중의 손가락질을 받거나 독선적인 사람으로 낙인 받기 쉽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진리가 아닌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경고했다(딤후 4:3-4). 지금이 바로 그때다(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더). 자기 생각과 다른 생각은 권위가 아무리 담겨 있어도 무시한다. 자기 생각을 지지하고 자기 욕구대로 사는 것을 옳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가까이 두고 듣는다. 진리보다 허탄한 이야기가 훨씬 더 의미 있게 들린다. 거기에 실린 권위의 격차가 얼마나 나든지 상관없다. 이런 세대의 특징을 반영한 설교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인기를 누리는 설교자들은 명확한 성경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전달하지 않는다. 크게 우회하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돌아다니다가 슬쩍 성경의 견해를 끼워 넣는다. 설교자는 아주 친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청중을 어르고 달랜다. 그들의 감정이 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처럼 계속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이 잘되도록 복주실 것을 약속하면서, 딱 그 정도 힘을 실어서 유쾌하게 도전하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교훈한다.

해돈 W. 로빈슨이 정의한 “설교”에서 우리는 설교 전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이 세대에 반드시 요구되는(사실 모든 세대가 들어야 할) 설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강해 설교란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 즉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하여 다시 회중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다(CLC, 2008, 23p).

설교자는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한다. 본문을 연구하여 분명한 하나님의 생각을 발굴하고 알아냈다면, 그것을 전달할 때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전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생각은 절대 권위가 담겨 있어서, 전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 반드시 그 말씀에 순종으로 반응해야 한다.

2. 설교의 전달: 하나님의 생각으로 전달하는가?

상대적으로 과거엔 훨씬 더 권위가 실린 설교가 선포되었다. 지금 설교자로서 말씀을 선포하는 세대가 과거의 권위 있는 말씀을 들어왔던 세대다. 그런데 왜 지금은 다음 세대에게 권위 있게 설교하는 것을 꺼릴까? 개인적으로 그 이유 중 하나는 과거의 지나치게 고압적이고 강압적인 설교 전달 방식에 의한 부작용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설교는 때로 최고 강도의 호소력을 갖춰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나 신약의 사도들이 멸망으로 빠져들어 가는 자들에게 외쳤던 설교의 진중함과 담대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고압적이고 강압적이라는 말은 그런 강도의 권위가 실리지 않아야 할 때, 권위를 이용했다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개인의 생각을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실어 전달하는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지금도 주의가 필요하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할 때와 자기 생각을 전달할 때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마땅히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할 때만 하나님의 권위를 담아야 한다.

가령 보수적인 교회에서 예배 시간 드럼 사용을 금하면서, ‘예배는 마땅히 영과 진리로 드려져야 한다’라고 설교한다고 생각해 보자. 설교자는 드럼은 영과 진리가 아닌 인위적 악기가 사용되는 것이라고 청중을 설득한다. 성경엔 타악기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성경엔 심벌즈 소리를 내는 제금, 탬버린처럼 쇠붙이 소리가 나는 양금, 북소리가 나는 소고 등이 예배의 도구로 나온다. 심지어 이 악기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면과 명령도 기록되어 있다(시 150). 그리고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는 말씀은 악기 사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예수님이 본문을 통해 강조한 것은 예배의 여러 제약이 없는(본문에서는 장소의 제약), 언제 어디서든 진실한 마음과 참된 내용을 가지고 마음껏 예배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설교자 개인의 생각으로 어떤 악기는 사용해도 되고 어떤 악기는 안 되는지 하나님의 생각인 것처럼 청중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는 포도주를 가리키는 헬라어 오이노스가 1) 포도즙, 2) 포도주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을 설명하면서, 여기서 포도주(오이노스)는 포도즙이지 포도주가 아니라고 설교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누군가에게 술을 권하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원어의 뜻이 둘 중 하나가 될 수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연회장은 그 포도즙을 맛보고 이렇게 말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오이노스)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오이노스)를 두었도다”(요 2:10). 설교자의 말에 따르면, 앞의 포도주(오이노스)는 포도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취한 후에”라는 말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의 포도주(오이노스)는 반드시 포도즙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만드신 것을 맛보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비합리적인 해석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설교자가 청중에게 전달하고 싶은 분명한 생각이 있어서다: ‘그리스도인은 술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 본문이 의도한 하나님 생각이 아니라 설교자의 생각이다.

반대로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것을 회피하는 문제 또한 심각하다. 성경은 동성애를 명백한 죄로 다룬다. 하지만, 많은 설교자가 동성애를 세분화하여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동성 간 성폭행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교한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다르다고 말한다. 가정 안에서 남편의 역할과 아내의 역할이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오늘날 페미니즘이 무시할 수 없는 사상이 된 세대에게 설교할 때, 어떤 설교자는 단호하게 성경의 위와 같은 가르침이 사도 바울의 가부장적 성향이 빚은 오류에 불과하다고 선포한다. 이 세대를 거스르느니 차라리 성경에 오류와 편향적 사상이 담겨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생각의 권위가 하나님 생각의 권위를 누른 것이다.

해돈 로빈슨은 <강해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설교자가 성경을 떠나서 이야기할 때, 그는 스스로의 권위를 포기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는 더 이상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의 말을 전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21p).

설교자가 하나님의 생각을 하나님 권위를 담아 전달하기 위해서는 먼저, 철저한 성경 연구를 통해 본문이 의도한 성경적 개념을 밝혀내는 것이 필요하다. 오랜 기도와 묵상과 연구의 결과가 성령의 의도하신 본문의 의미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 참고 자료를 통해 확신을 더 할 수도 있다(오랜 세월 본문을 연구한 사람이 발견한 의미와 유사한 것이 보통이다). 설교자도 성경 학도가 되어 하나님의 생각을 발견하면 그 앞에 겸손히 굴복해야 한다. 함부로 그 뜻을 변개하지 말고, 유행하는 사상이나 사람의 학문 등으로 평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생각에 실린 권위 앞에 떨지 않으면, 전달할 때도 가볍게 전달되고, 청자도 사람의 지혜와 설득력에만 의존한 메시지로 전달받게 된다.

그리고 준비된 말씀을 선포할 때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것처럼, 하나님 앞과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엄중한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건들거리는 태도나 습관적으로 진중함을 깨는 몸짓이나 말투 등이 있다면 고쳐야 한다. 그리고 앞서 예시를 통해 밝힌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이 아닌 자기 생각을 덧붙일 때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사실 설교 시간에 설교자 개인의 생각을 말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교회를 인도하는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행정이나 사역의 방향을 제시하고 규칙을 설명하고 동기를 부여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 시간은 따로 갖는 것이 좋다. 설교할 때는 오직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만을 권위를 담아 선포하는 것이 청자에게 가장 큰 유익을 줄 수 있다. 설교 시간은 교장 선생님의 훈화 시간이나 회사의 사장님이 직원 앞에서 연설하는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전달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만큼은 오롯이 성도가 왕의 생각을 듣는 시간이 되도록 하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설교자의 견해나 생각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설교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전해야 한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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