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순종의 길을 택한 김동성·손주열 선교사
러시아의 백야는 새벽 3시쯤이면 어둠을 몰아낸다. 그리고 오후 10시가 될 때까지 태양을 붙잡아 두고 있었다. 어둠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더욱 찬란한 하늘나라를 연상케 하는 러시아에서 김동성・손주열 선교사 부부를 만났다. <편집자>
– 선교사의 삶을 시작하기에 앞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손주열(이하 손): “저는 충남 당진에서 3대째 예수님을 믿는 가정에서 자랐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제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지 못한 채 교회만 열심히 나갔어요.
부모님이 스웨덴 대사관에서 일을 하고 계신 덕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 나라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러다 23살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스웨덴으로 가게 됐어요.
그곳 한인교회에서 한 형제와의 교제를 통해 지금까지 저의 신앙생활이 예수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믿음의 삶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차에 로마서 10장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드디어 예수님을 저의 구주로 영접하게 됐어요. 그 형제가 지금의 남편이예요.”
김동성(이하 김): “저는 아내와 달리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중학교 시절 중풍을 앓고 있던 아버지가 어디서 들으셨는지 예수가 치료하는 분이라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죠. 그러나 저희 7남매에게 강제로 교회에 나가게 하시지는 않으셨어요. 어머니는 묵묵히 기도만 하실 뿐이었죠.
대학생이 되자 매일같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즐겼어요.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에 대해 얘기하다 늦은 시간에 기숙사에 돌아와 잠이 들었죠. 그런데 다음날 아침 일어나니 아무도 없더라구요. 곁에 아무도 없다는 공허함을 처음 느꼈죠.
그때 어머니가 계신 고향땅을 바라보고 있는데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어요. 지금도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계실 어머니 생각이 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성경책을 들고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됐어요.”
공허함을 달래러 교회로 출석
– 놀랍네요. 그 공허함 때문에 주님 앞으로 나오게 되셨군요.
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긴 했어요. 그런데 마음에 별 감동이 생기지 않았어요. 예배 후에 혼자 밥을 먹고 있는데 한 친구가 반갑게 인사를 했어요. 소아마비를 앓았던 친구였어요. 학교에서 공부를 가장 잘하고 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친구의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 때문에 교회에 계속 나갈 수 있었고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과정에 참여하면서 점점 하나님을 알아갔어요.
어느 날, 하나님께서 제게 원하시는 인생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고민하던 중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이 왜 하나님을 대적하고 멀리 떠날 수밖에 없는가?’ 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됐어요. 로마서를 읽어가며 그 해답을 찾아갔죠. 내가 죄인이구나. 나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구나. 죄인 된 내가 그분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았다는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 거였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이런 사실이 제 내면에서 심한 갈등을 일으켰어요. ‘정말 믿음으로만?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는 이 얘기를 믿는 것으로만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가 가능하다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계속 묵상하다보니 나를 구원하실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믿어졌어요. 믿음은 주님이 제게 주신 선물이었어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 그 뒤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김: “정말 세상이 달라보였어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삶의 의미와 기쁨이 샘솟았죠. 하나님 말씀을 더욱 사모하게 되면서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고 기도했어요. 그때 제게 유학의 꿈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시고 돌보신다는 확신이 필요했어요.
응답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으로 제주도로 향했습니다.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기도하려고 했어요. 비바람이 무섭게 치는 어느 날, 한라산에 무작정 올라갔죠. 정상에 오르자마자 이사야 41장 10절의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는 말씀이 제 맘 가운데 확 쏟아졌어요. 이 말씀이다! 감사합니다! 하고 정신없이 뛰어내려왔어요.
80년도 당시, 한국이 스웨덴의 전화교환시스템을 받아들였어요. 전기 분야를 공부했던 저는 통신 공부를 더 하고 싶어 2년간 직장 생활을 하고 난 후, 스웨덴 왕립공학대학에 들어가게 됐죠.”
– 스웨덴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끄셨는지 궁금하네요.
김: “처음엔 스웨덴어를 배우고 전공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다 같은 그룹에서 공부하던 한 백인 형제에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어요. 그가 나를 위해 3년 동안 기도했다는 거예요.
사연인즉, 핀란드 출신의 그가 목사 안수를 받고 소련에서 3년 동안 낮에는 여행 가이드로 밤에는 복음을 전하다 고려인들을 만났던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듣다가 끝에 가서는 우리는 조상 때부터 불교인이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죠. 그래서 그는 한국에서 복음을 아는 증인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저를 만나게 된거죠. 소련에 고려인들이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면서 부담이 왔어요.
당시 소련과 한국은 수교가 맺어지지 않은 상태였는데, 소련은 생각만해도 두려웠어요. 이 부담감을 떨쳐보려고 기도를 시작했지만 할수록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을 주님이 부어주셨어요.”
핀란드인의 기도 “한국의 증인을 보내주세요”
– 그때 선교의 소명을 받으셨군요.
김: “네. 곧바로 스웨덴 신학교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기존 신학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어요. 교수 중 한 사람이 동성애자였고, 새벽기도도 없었어요. 만나는 사람마다 함께 새벽기도를 드리자고 청했지만 냉담했죠. 가뭄에 콩 나듯 어렵게 모이게 된 두 사람과 함께 일 년 동안 예배를 드렸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어요. 여기 계속 있어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있을 무렵 주님이 새로운 걸음으로 인도하셨어요. 결혼과 미국 유학이었어요. 혼자 선교사로 헌신한다는 것이 막막하단 생각에 “지혜로운 아내는 여호와로 말미암는다(잠 14:9)”라는 말씀을 붙잡고 건강하고 지혜로운 아내를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죠. 제가 어떤 환경에서 살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때 주님이 저의 눈을 열어 가까이에 있는 자매를 보게 하셨어요. 프로포즈한지 3개월 만에 결혼했어요.”
– 아내 입장에서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을 어떻게 확정하셨는지요?
손: “저희의 결혼은 순종의 결과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믿음의 길을 걸으며 복음에 대한 저의 태도에도 변화가 있었어요.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때부터 선교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된 것 같아요.
특히 남편이 소명을 받은 이후, 고향에 있는 가족에게 외면 받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2년의 시간 동안 묵묵히 타협하지 않고 주님의 공급하심을 바라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도전을 받고, 선교사로서의 삶을 확정할 수 있었어요.”
– 믿음으로 결혼했다는 상황을 조금 더 듣고 싶네요.
손: “남편이 스웨덴에 와서 처음 나왔던 교회가 제가 다니던 교회였어요. 자연스레 그와 알고 지내며 주의 종이 되겠다고 순종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됐어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께 순종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 마음을 받았다며 저에게 청혼을 하는 거예요. 주님이 어떤 마음을 주시는지 기도해보라면서 돌아갔어요. 좀 놀라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주님을 신뢰하며 기도했어요. 그런데 아무 마음도 주시지 않으셨어요. 남편이 다음날 저를 찾아와 주님께서 무슨 마음을 주셨냐고 물었어요.
덤덤하게 마음이 편하다고 했더니 평안은 주님이 주신 마음이라면서 결혼하자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이 싫지 않았어요. 결혼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란 마음이 들면서 주님이 부르신 새로운 길로 믿음의 걸음을 걷게 됐어요.”
믿음으로 순종하여 결혼하다
– 그 이후 어떻게 믿음의 길을 걸으셨는지요?
손: “준비해왔던 미국의 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됐어요. 그때부터 하나님은 광야의 은혜를 부어주셨어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상황도 있었지만 저희는 기도의 자리를 택했어요. 시간만 나면 기도실로 갔어요.
미국 성도들이 ‘한국 사람들 기도를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진짜구나.’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주님이 기적같이 생필품에서 아이 기저귀까지 공급해주셨어요. 3년의 시간 동안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기도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셨어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니 더욱 담대함이 생겼어요.
오직 믿음밖에 없었어요. 이런 시간을 지내는 동안 주님은 두 명의 자녀를 허락해주셨어요. 우리를 이끄신 주님께 감사하며 첫째 딸 이름은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는 뜻의 ‘이레’, 둘째 아들은 기도하니 다 주시더라 해서 ‘기도’ 로 지었어요.”
수많은 사역보다 기도에 더욱 전념
– 그 이후 선교사로의 걸음을 나눠주세요.
김: “89년에 한국에 들어왔지만 한국은 소련과 수교가 맺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당장 소련에 들어가기 어려웠어요. 지인의 권유로 접수기간이 지난 한 선교 훈련원의 문을 두드렸는데, 받아주셨어요. 10개월간의 훈련이 끝나고 한 달 만인 90년 7월 4일, 우리의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듯 한국과 소련의 수교가 이뤄졌어요.
여러 차례 한국과 소련의 목사님들이 오가며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선교를 위해 협력하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오셨죠. 저희 가정은 91년도 2월, 드디어 카자흐스탄의 수도인 알마티로 들어가게 됐어요. 처음 러시아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한국에서 목사가 왔다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어요.
당시 알마티의 교회 상황은 무척이나 열악했죠. 소련의 공산정권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침례교인들은 자기 자녀의 피를 마신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침례교회가 그곳에서는 공포의 대상이었어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저희가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게 된 것이죠.”
손: “처음 4년간 목회를 하며 현지 지도자를 세우고 싶었어요. 감사하게도 한 형제가 헌신을 했고 그를 주님의 마음으로 양육하게 됐어요. 그러나 믿었던 그가 재정문제로 실족하는 모습을 보게 됐어요.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허탈한 시간을 지나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어요. 열정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께 연단된 인격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죠.”
– 두 분이 하신 사역은 믿음의 제자들을 세우시는 거였군요.
김: “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역은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어요. 3년 동안 변화되지 않던 제자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는데 그때 하나님은 저희에게 기도를 시키셨어요. 수많은 사역보다 기도에 더욱 전념하게 하셨어요. 인간적 욕구를 따라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제하시고, 새벽부터 철야까지 말이죠.
그렇게 한 1년쯤 기도했을까?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어요. 저희와 함께 기도하던 4개 교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귀신이 떠나가고 아픈 사람들이 치유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됐어요. 기도했던 모든 사역자들이 성령님의 역사인 것을 알게 됐죠.
우리 안에 은혜를 나누고, 앞으로 어떻게 사역해야 할지 나누면서 연합이 이루어지게 됐어요. 보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던 성도들도 믿게 됐고 헌신하게 됐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만 9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알마티를 떠나게 됐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님의 임종예배를 드리면서 주님께서 저희 7남매의 관계를 19년 만에 회복시켜 주셨어요.”
교회의 부흥과 가족의 회복
– 이후 하나님은 어떤 길로 인도하셨나요?
김: “먼저 우리를 U국 민족에게 인도해주셨어요. U국은 대부분 무슬림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 무렵 J형제를 만나게 됐어요. 그 형제가 우리가 머물 숙소를 알아봐주면서 교제가 시작됐어요. 그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한동안 개종하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잘 알았기 때문에 쉽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죠.
그러던 어느 날 이 형제가 이제 그땅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열었어요. 예수님을 영접한 형제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 생활이 불가피했어요. 그와 운명을 같이한 세 명의 형제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저희는 그곳에 밤마다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어요.
복음을 들은 그들이 점점 변하더니 담대하게 학교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어요. 경고를 받고, 부모들에게 끌려가기도 했어요. 더 심한 형제들은 경찰에 잡혀가 고문도 당했구요.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저희들도 더이상 머무를 수 없어 K국으로 거처를 옮겼어요.”
손: “소련 해체 이후 이 나라가 독립을 하면서 기존에 살던 다수의 종족과 민족충돌이 일어났죠. 크게 두 번 충돌이 일어나면서 20만 명의 난민들이 생겼어요.”
김: “그곳에서 믿음의 길을 선택한 J형제는 나중에 러시아에서 살게 됐죠. 그래서 저희도 그를 만나기 위해 2012년 러시아를 방문했어요. J와 함께 U국 사람들이 여전히 예배를 드리고 있었어요.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죠. J는 그동안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지요.
인종차별과 해결되지 않는 거주등록 문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며 나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고통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더군요.
제 마음에 형제를 향한 긍휼이 일어나면서 그를 위해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 것을 원하고 계신다는 마음을 받고 그해 12월 러시아에 정착하게 됐어요. 하나님이 J의 마음을 사랑으로 어루만져주셨죠. 이후 그도 신학을 해서 목사안수를 받게 됐죠. 이제 그는 다시 U국으로 돌아갑니다.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한 아름다운 발걸음이죠.”
– 끝으로 기도제목이 있으시다면요.
김: “많은 중앙아시아 이주민들이 아직 복음을 듣지 못했어요. 러시아 교회가 이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들을 섬기는 교회로 일어나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복음이 필요한 U국 민족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소망합니다.” [GNPNEWS]
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