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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장로로 구성된 사역팀이 복음을 선포하며 은혜를 누렸어요”

세계복음화를 위해 달리는 김용훈 장로 (복음가득한교회)

김용훈 장로 (복음가득한교회)


세계가 복음화되는 것이 소망이 된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해외 선교를 나가기 위해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 지점장을 그만두고, 일반 영업직을 자원했다. 집 한 채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도 있었지만, 가난한 자에게 흘려보내는 것이 당연하다며 재산을 쌓아 놓지 않았다. 선교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선교를 하지 않을 때, ‘나라도 갈 수 있을까?’ 물으면 ‘OK!’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 김용훈 장로를 만났다.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기업컨설팅 분야의 일을 하고 있고, 세계복음화가 교회의 비전인 복음가득한교회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는 막내 장로였는데, 최근에 막내를 면했네요. 장로 된지는 10년이 됐습니다.”

– 그래도 젊어 보이시네요.

“좀 이른 나이인 37살에 장로가 됐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부분이 많아 어려움도 많았어요. 장로로서 마땅히 섬겨야 할 부분들을 잘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지금은 좋은 분들이 장로님으로 세워지셔서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보완됐죠.”

30대 후반에 장로 장립을 받다

– 일찍부터 교회에서 중직자로 섬기셨는데, 언제 예수님을 만나셨나요?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교회에 나가게 됐어요. 어느 날 영어 선생님이 우리 동네에 사는 학생들을 랩실로 모이라고 방송을 하셨어요. 영문도 모르고 갔는데 교회 강도사님과 선생님이 계셨어요. 그분들이 이번 주에 교회에 꼭 나오라고 하셨어요. 당연히 교회에 안 나갔죠. 그랬더니 영어 선생님이 내 얼굴을 봐서라도 한번은 꼭 나가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그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갔어요. 맨 뒷줄에 우리 학교 학생들이 몇 명 앉아 있더군요. 그때 선생님이 오시더니 우리를 인솔해가셨죠.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나서 고2 때 수련회에 갔는데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게 됐어요. 기도하는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어요.”

– 교회에 나가신 것 자체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군요. 이후에는 어떠셨어요?

“그 이후로는 기회가 되는대로 복음을 전하며 살았습니다. 군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 심령이 가난한 영혼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하루는 군 생활을 힘들어하던 한 고참을 세탁실에서 만났는데 옷을 다리면서 복음을 나누게 됐어요. 그분이 펑펑 울더군요. 그 이후로 세탁실에서 만나서 복음을 나누게 됐어요. 의무실에도 마음이 가난한 병사들이 많았어요. 제가 신병교육대 조교로 복무하면서 의무실에 입원한 훈련병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있었어요. 기회가 되는 한 의무실에 찾아가 복음을 전했어요. 크리스마스 때는 단체로 모아 놓고 복음도 전했죠. 그런데 제가 일반 병사로 있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았어요. 그래서 군대에 더 오래 남기 위해 부사관에 지원하기로 했어요. 그러다 장교로 지원할 자격이 된다는 걸 알고, 시험을 쳐서 장교로 임관 받았어요. 그런데 장교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처음에는 후회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복음을 전하며 재밌게 군 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군복음화를 위해 장교 지원

– 청년시절부터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셨군요. 복음가득한교회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군대 제대 이후 서울로 올라와서 2004년 11월에 취직을 했어요. 교회를 정하기 위해서 알아보던 중 개척교회를 섬기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던 차에 선교사를 준비하던 한 선배가 조성욱 목사님을 소개했어요. 알고 보니 바로 그 주일에 개척한다고 했어요.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개척멤버가 돼서 교회 중요한 일들에는 항상 앞장서서 섬겼어요. 그렇게 안수집사도, 장로 직분도 빨리 받게 됐어요. 그리고 목사님이 당대 세계복음화 사역(당대에 세계복음화를 완성하자는 선교사역, 이하 당세복)을 시작하시면서 해외 사역을 자주 다니셨는데, 해외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시면 우리 모습을 보고는 답답해하셨어요. 각자 자기 삶을 살기 바쁘니까요. 목사님은 선교 나가시고 우리는 안주해 있었죠. 급기야는 장로들이 세워지고 난 1년 후에 교회를 사임하겠다고 하셨어요. 당세복 사역을 하며 성도들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다는 게 사임하시겠다는 이유였어요. 실제로도 목사님은 다른 사역지를 알아보셨어요. 결국은 장로들이 찾아가서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어요. 사실 목사님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그때는 이해가 안됐어요. 나름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헌금도 잘 내고 있었거든요.”

제공: 김용훈 장로

– 이후 어떻게 됐죠?

“2012년 10월에 선교지에 직접 가서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미국 마이애미 사역을 따라갔어요. 그곳에서 주님이 제게 은혜를 많이 주시면서 삶의 목표나 방향이 바뀌게 됐어요. 그전에도 우리 교회는 세계복음화를 외쳐왔어요. 그러나 막연히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이 하시겠지 생각했어요. 내가 살아 있을 때는 될 거라고 믿지 않았죠. 2000년 동안 안됐으니까요. 그러나 마이애미에 가서 에코쿠바라는 단체를 통해 쿠바의 문이 열리는 걸 보게 되고, 미국 교회가 전도를 하면서 부흥의 불이 붙게 되고, 또 다른 곳에서 복음을 선포할 기회들이 열리는 걸 보게 되면서 한 사람의 제자를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생생하게 보게 됐어요. 도미니카에 가서도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제자들을 찾아내시고, 그를 통해 각 나라에 복음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됐어요. 해외 사역을 갔다 올 때마다 직장에 다시 가야 한다는 게 어려웠어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너무 많이 보게 됐으니까요. 더불어 제 믿음의 상태도 보게 됐죠. 선교 현장에 가보니 그동안 제가 믿음생활이라고 했던 게 믿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 믿음이 아니었다는 게 어떤 의미죠?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한번은 구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어요. 선교현장에서 보니 그곳 제자들은 매일 11km씩 걸어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요. 그들은 그 나라를 살리겠다고 자신의 인생을 드려서 복음을 전해요. 물론 저도 한국에서 살면서 구원받았다고 하고, 당세복 사역도 열심히 따라다니고, 예배도 잘 드리고, 직장에서 기도 모임도 하고 복음도 전했어요. 그러나 믿음인 줄 알고 살았던 이런 것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기준에 비춰 봤을 때, 믿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됐어요. 성경 속 사람들의 삶이 저와는 많이 달랐어요. 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에 외치는 소리로 살았어요. 성경에는 집사들이 많이 나와요. 제가 평신도이기 때문에 집사들에게 관심이 많죠. 그런데 이방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빌립집사였어요. 바울은 자기와 여러 사람의 보호자라면서 뵈뵈 자매를 소개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신을 위해 목까지도 내놨다고 소개해요. 이런 기준으로 봤을 때, 평신도 중에 이런 사람이 누가 있겠나 생각하게 됐죠. 장가도 가야 되고 할 일도 많은데,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찔리지 않을 평신도가 누가 있겠어요. 보면 볼수록 저의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었어요.”

– 선교 현장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발견하셨군요. 놀랍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보게 된 건, 전 세계를 살릴 수 있는 선명한 복음을 주셨다는 거예요. 이 복음으로만 세계를 살릴 수 있고,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제자가 전 세계에 세워지면 당대에 주님이 다시 오실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실제로 제자가 세워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해외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면 곧바로 현실에서는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을 찾는 제 모습을 보게 됐죠.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해외 사역을 갔다 올수록, 하나님의 역사와 복음을 위한 일들만 보인다는 것이었어요. 성경대로 문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생생히 보면서 그걸 더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직장 때문에 잦은 해외 사역을 가는 게 불가능했어요. 계속 기도하다가 결국 2016년 12월에 사직서를 냈어요.”

– 해외 사역을 위해서 직장까지 그만두셨어요? 주변에서 많이 말리셨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그동안 신앙생활을 같이 했던 동료들이 오히려 저를 못 막는다며 변호해 줬어요. 그동안 우리는 아침 7시 30분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고, 수요일에는 말씀도 나눴어요. 우리 지점원 33명에게 복음도 전했고요. 물론 다른 지점장들이 찾아와서 적당히 하라고 말리기도 했죠. 꾸중도 듣고요. 그래도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서 아름답게 10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게 해주셨어요. 그렇게 관리직을 내려놓고 영업사원으로 새로운 곳에 들어갔고,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 사역을 시작했어요.”

– 한 가정의 가장이 탄탄한 직장을 내려놓고 보수가 적은 곳으로 옮긴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닌 것 같아요. 흔들리신 적은 없었나요?

“이런 결정은 복음이 크게 보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 같아요. 주님이 제게 아내와 자녀를 허락하셨는데, 주님이 아내와 자녀를 책임진다는 믿음이 없으면 힘들죠. 이것이 평생 싸워야 할 믿음이에요. 천국은 분명히 있고, 제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자녀들이 천국에 가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에요. 자녀들이 천국에 못 가면 그것보다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거예요. 이러한 명확한 기준이 없으면 힘들죠. 그러나 사탄은 현실을 보라고 공격을 해요. 현실만 보면 현실이 크게 보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지금까지 현실만 선택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믿음으로 한 발 내디뎌야죠. 그럼에도 그 과정은 쉽지 않더군요.”

▲ 사랑하는 아내, 자녀들과 함께. 제공: 김용훈 장로

선교를 위해 직장을 내려놓다

– 그 과정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관리직을 그만두고 나와서 열심히 뛰었어요. 그러나 어느 순간 카드빚을 갚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가게 됐어요. 그리고 신용에 문제가 생겼어요. 신용에 문제가 생기니 해외 사역을 못 나갈 수도 있을 뿐 아니라 회사에도 문제가 될 수 있었죠. 개인적으로 자존심도 상했어요.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달리고 있는데, 오히려 주변 분들이 걱정해 주시는 것이 더 마음이 아팠어요. 직장을 옮길 때 이런 상황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그래도 주님이 채워주실 거라고 기대했어요. 그러나 안 채워주셨죠. 감사하게도 지금은 신용이 다 회복이 되었지만, 어려운 시간들을 주님이 지나오게 하시면서 오직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것을 배우게 하셨던 것 같아요. 자신에게 헌금이 들어오면 세계복음화를 위해 무조건 흘려보내시는 목사님을 옆에서 보면서 저도 쌓아 놓을 수 없겠더군요. 주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데 앞으로 더 큰 어려움이 올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도 이 길을 갈 수 있겠냐고 주님이 물어보시는 것 같았어요. 힘들 때마다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은혜를 항상 주시고 넘어가게 하신 것 같아요.”

– 고난 중에 영광도 보셨을 것 같은데, 해외 사역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2017년부터 모든 대륙을 다 따라다녔어요. 파키스탄, 아프리카, 유럽에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됐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19년도 1월에 방글라데시에 갔을 때였어요. 현지 목사님과 연결이 되어서 집회를 하기로 하고, 마침 조 목사님이 갈 수 없어서 여러 목사님들과 들어가려고 했는데, 예상치 않게 목사님들에게 비자가 나오지 않은 거예요. 오직 비자를 받은 사람들은 평신도밖에 없었죠. 저, 통역자, 장로님 두 분, 집사님 한 분. 처음으로 평신도끼리만 해외 사역을 하게 됐어요. 두렵고 떨렸어요. 얼마나 긴장을 많이 했는지 모르겠어요. 조 목사님 따라다니면서 본대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메신저로 서게 됐어요. 그때 주의 종이 어떻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치열하게 말씀을 전하는지 맛보게 됐어요. 감사하게도 그때는 집회를 인도할 수 있도록 교재가 다 돼 있었어요.”

– 교재가 있군요. 어떤 거죠?

“바울도 선교를 하면서 서신서를 쓰신 것처럼 조 목사님도 사역을 하면서 교재를 만들었어요. 성경 전체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면 좋지만, 보통 며칠 동안만 메시지를 전하고 다른 나라로 이동해야 하고, 또 전 세계에서 세워진 제자들도 이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통일된 교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총 12개 강의를 할 수 있는 교재가 나왔고, 4~5년 만에 10여 개 언어로 번역됐죠. 성경대로라면 반드시 그 나라를 살릴 제자가 있어요. 데살로니가에는 야손을 통해 교회가 세워졌고, 빌립보에서는 루디아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서는 고린도교회가 서게 됐어요. 그래서 반드시 그 나라를 살릴 제자를 찾는 게 중요했고, 그 제자는 복음에만 반응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복음이 희미하면 제자도 희미하다, 선명한 복음이 증언되면 제자는 나온다. 그래서 복음만 잘 준비되면 된다.’면서, 그렇게 선교현장에서 복음의 내용을 정리한 교재를 만들게 됐어요.”

▲ 케냐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김용훈 장로(우). 제공: 김용훈 장로

목회자 없는 해외사역에서 강의하며 은혜 누려

– 사역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하나씩 만들어진 사역이네요.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저도 하나님이 앞으로 어떻게 역사하실지 매우 기대됩니다. 그동안 당세복을 10년 동안 해오면서 우리 민족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국내 전도에도 마음이 있었는데, 극동방송을 통해서 메시지를 선포하게 하셨어요. 또 코로나로 해외 사역이 막힐 때는 한국에서 신학 박사 과정 중이신 토마스 목사님을 통해서 온라인으로 영어권에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어요. 그렇게 줌(Zoom) 모임이 확산되면서 대륙별, 언어별, 나라별로 모일 뿐 아니라 이제는 한인선교사 사경회를 하게 되었고, 국내집회까지 하게 됐죠. 또한 지금은 코로나가 잠잠해지면서 다시 전 세계 제자들이 모이는 꿈브레(정상회의) 선교대회를 온라인으로 하기로 했어요. 지난 2년 동안 각 나라의 제자가 세운 또 다른 제자들도 있더군요. 이런 추세라면 복음화되는 속도가 더 빨라질 것 같아요. 1만 6000여 개 종족에서 제자가 찾아져야 하는데, 앞으로 10년 내에 이 모든 민족에서 제자가 찾아지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루디아 같은 사람들이 찾아지면서 앞으로 10년은 당세복의 마무리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어요.”

– 마지막으로 기도제목 말씀해주세요.

“성경에는 목사는 선교하고 평신도는 안한다는 말씀이 없어요.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후 초대교회가 흩어졌어요. 스데반은 집사인데 구약을 풀면서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한국교회 집사 중에 그럴 사람이 있겠나 생각해요.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는 성도들을 관리하고 사도들보다 먼저 순교했는데, 이런 부분들이 평신도에게 메시지가 되어야 해요. 오늘날 이런 집사가 있어야 해요. 해외에 있는 제자들은 교재가 닳아서 찢어질 정도로 갖고 다니며 메시지를 힘 있게 전하죠. 이런 모습은 선교지에 가보지 않으면 몰라요. 이러한 집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더 겸손하게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도록, 복음의 순수함을 허락해 주시고, 재림에 대한 소망이 내 인생 최고의 소망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마지막으로는 혹 주님께 쓰임 받지 못해도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것이 제 기쁨이 될 수 있는 평신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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