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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칼럼] 제대로 고집 피우기!

▲ 단편 애니메이션 "선택된 증인"의 한 장면. 사진: 유튜브 채널 Jesus Film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요 13:21~30)

‘고집’은 부정적인 단어입니다. ‘고집’이 부정적으로 뿌리내리면 인생을 망치게 하고 영혼을 망치게 합니다. 고집을 왜 피우는지 그 근원을 살펴보고 고집스러운 우리 속사람을 살펴보는 것은 지혜입니다. 제대로 고집 피워야 삽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요 13:21)

예수님의 심령이 괴롭고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을 팔려고 하고 배반하려고 하는 움직임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을 팔고 배반하려는 우리 속성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안에 배반의 속성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예수님께서 마음 깊이 애통해 하신 까닭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는 예수님을 팔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역을 감당했음에도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팔 수밖에 없는 심령이 되었을까요? 내면에 근원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어떤 것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이 싫어져서, 마음이 상처받아서, 마음이 곤고해져서, 마음에 맞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근원적으로 마음에 무엇이 먼저 깊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럼에도 돌이키지 않았기에 예수님을 팔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내몰린 것입니다. 우리도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으로 취급당해도 할 말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럴 때마다 돌이켜서 주님의 아름다움이 우리 인생을 통해 드러나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셔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군가 나를 팔리라.’ 심령이 괴로우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체적으로 아시고 모두 아십니다. 한 사람이 팔 것을 아시지만 그것을 다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가릴 때 가려 주십니다. 인격의 하나님이 아니라면, 절망밖에 없는 우리입니다. 존재 자체가 죄덩어리인 우리가 들춰지기 시작하면 견딜 수 없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면, 가릴 때 가려 주시고, 드러낼 때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다 드러내게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가정에서 경계해야 합니다. 다 드러내서, 탓하고 싶고, 원망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지적하고 싶은 속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속성이 아니라고 마침표를 찍어도 틀리지 않습니다. “저, 하나님 닮아가고 싶어요!” 하고 선언하고 다짐해도 잘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 가서 배워야 합니다. 온유는 헬라어로 ‘프라우스’입니다. ‘훈련된 순종’이 온유입니다. 야생마를 길들인 뒤 야생마가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라올 때, 그 말에게 ‘오, 프라우스’라고 말합니다. ‘프라우스’는 온유, 즉 훈련된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훈련된 성품은 인격입니다. 주님께 가서 주님과 멍에를 함께 매고 주님께 배워야 합니다. ‘척 보면 안다’는 말은 사탄의 속성입니다. 좋은 이야기기 아닙니다. ‘척 보면 안다, 경험상 안다’는 말은 결코 좋은 말이 아닙니다. 주님의 성품을 배우고 주님의 마음이 들어와, 가릴 때 가려주고 드러낼 때 드러내는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교회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떠나가실 때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이제 세상에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지만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체험적으로 알게 될 것이라 말씀하시며 행하신 퍼포먼스가 세족식입니다. 세족식을 그냥 단순하게 섬기고 희생하고 낮은 자리에 임하신 정도로 말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본래의 뜻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팔레스타인 풍습을 보면 종 가운데 가장 낮은 종이 주인과 손님들의 손과 발을 씻겨 줍니다. 그리고 난 뒤 음식을 먹게 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비스듬히 누워서 먹기 때문에 손발이 더러우면 곤란합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요 13:3~4)

당시 풍습을 보면 식사하기 전에 손과 발을 씻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식사 도중에 주님이 일어나셨습니다. 만찬 전에 누군가는 예수님의 손발을 씻겨주었어야 합니다. 최소한 제자들은 스승인 예수님 손발을 씻겨줬어야 합니다. 보다 못해 예수님이 일어나셨습니다. 왜 이런 어색한 상황이 일어났을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께서 세족식을 직접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제자들을 왜 끝까지 사랑한다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서로 같은 레벨에 있습니다. 같은 수준에 있는 사람 중에 누군가 예수님의 손발을 씻겨주면 스스로 가장 낮은 사람이라고 자인하는 꼴이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씻겨줘야 함에도 버티고 있었습니다. 꼴찌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요 13:12)

여러분은 아십니까? 섬기며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낮은 자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신앙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 13:13~15)

희생하고 헌신하고 섬기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짐해서 주님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다짐이 무너졌고 결심이 무너졌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고 싶다고 다짐하지 않은 믿음의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발을 닦아 주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재정을 채워서, 삶의 어떤 지위에 올라가서, 건강해서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발을 닦아주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도 발을 닦아 주셔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요 13:20)

부르심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부르심은 1차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주님에게로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관심 쏟고 힘쓰고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로부터, 주님의 가치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렇게 부르심 받은 사람이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주님으로부터 훈련받습니다. 그 사람이 보내심을 받는 것입니다.

“알고 행하면 복이 있어, 하지만 모르고 행하면 신앙생활이 고될 거야. 모르고 하면 수많은 사역들이 오히려 고통이 되고 올무가 될 거야.” 이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고 예수님과 함께 하늘보좌에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가득한 사람이 이 땅으로 보내심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하나님으로 채워진 사람들이 이 땅에 내려와서 세상에 대해 더 미련을 가지라고 사람들을 부추기겠습니까, 아니면 미련 가질 필요 없다고 말하겠습니까? 자녀들이 세상에 대해 열심을 부릴 때, 세상에 미련 둘 것 없다, 하나님께 열심을 쏟으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열쇠입니다.

하늘을 본 사람이라면 발 닦아 주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해’ 하는 증거는 그것을 알고 행할 때 드러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명확한 증거를 보게 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 길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안정감을 찾을 것입니다. ‘발 닦아 주는 것은 시원찮아, 낙오자야, 잘못됐어, 틀렸어, 절망이야, 아픔이야’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실제로 본 사람은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음에도 여전히 세상의 가치를 갖고 있는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괴로웠다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팔려고 하는 자가 누구인지, 왜 보이지 않았을까요? 혹시 가룟 유다와 같은 과는 아니었을까요?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요 13:23~25)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다 사랑하시는데, 특별히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편애하십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는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물리적 공간이나 환경도 중요하지만 심리적 거리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마음에 품고 무엇을 지향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또 언어의 거리도 중요합니다. 어떤 언어가 구사되느냐에 따라 관계의 거리가 매겨집니다. 몸에도 언어가 있습니다. 어떤 몸짓, 눈짓을 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속이 보일 때가 많습니다. 4, 50대 남성의 뒷모습과 어깨를 보며 그 사람의 환경과 마음이 읽혀질 때가 많습니다. 즐거운 몸짓인가, 심각한 몸짓인가, 무거운 몸짓인가? 그런데 ‘마음짓’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고요하고 단정해야 합니다. ‘마음짓’에 따라 ‘말짓’도 달라집니다. 주님과 가까운 사람은 몸짓, 마음짓, 말짓이 다릅니다.

베드로가 머리짓을 해서 요한에게 물어보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조정 능력이 탁월한 것 같습니다. 보통 조정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심해야 합니다. 조정하는 능력, 조정하려는 속성을 간과하면 망치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조정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상사는 부하를 조정하려고 합니다. 주님과 가까운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모든 곳에 임재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있습니다. 역사하시는 곳이 다릅니다. “주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달려갑니다! 내 안에 주님 좌정하셔서, 내가 주님의 성소가 되어서, 내 언어가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고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언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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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 목사 | 하나님이보시기에참좋았더라교회 담임. 다음세대를 위해 토브원형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삶에서 믿음의 실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저서로 주께서 피워내시는대로(토브원형출판사, 2020), 예, 주님 제가 순종의 전문가입니다(토브원형출판사, 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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