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광 선교사(C국)
270호 / 나눔&나눔
주영광 선교사는 선교사 자녀(MK, Missionary Kids)로 자랐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개인의 구주로 경험하고 더 고민할 것도 없이 선교사로 헌신했다. 선교사의 삶을 몸에 익히기 위해 어릴 때부터 선교사로 준비했다. 하나님이 그를 선교사로 준비하신 이야기는 이 한 줄의 찬양 가사로 설명될 것 같다. ‘내 평생에 가는 길…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주영광 선교사를 만났다.
– 선교사 자녀로 성장해 선교사가 되는 과정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주님을 어떻게 만나셨나요?
“어렸을 때부터 보통 가정에서 경험하는 것보다 조금 센 믿음의 훈련을 받고 자랐어요. 그래서 믿음의 삶이 당연하다고 알고, 믿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정말 옳은가? 과연 그러한가?’ 고민하는 시간이 있었어요. ‘부모님이 가르쳐줬기 때문에 믿는가, 아니면 내가 진짜 그렇기 때문에 믿는가?’를 중학교 1학년 때 6개월 정도 고민했어요. 하나님이 우리 가정 안에서 일하시는 모습을 그전부터 봐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걸 부인할 수는 없었어요. 내가 보고 경험한 주님이 성경 속에서도 역사하셨던 주님이라는 것이 확인되고 나니 그 뒤의 결정은 쉬웠어요. 저는 다른 장래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었어요. 또 이 과정을 거치고 나니 더욱 당연히 선교사가 되겠다고 확정을 하게 된 것이죠. 연습할 수도 없고, 반복할 수도 없는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의미 있게 살 것인가? 선교사로 드리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어요. 고민을 했던 시간들이 스스로 이 길을 선택하는 계기가 됐어요.”
장래 희망은 오직 선교사
– 중1 때 그런 결심을 하셨다는 거죠?
“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선교지에 나가기 위한 준비를 했어요. 순회사역을 하시던 부모님과 상의하면서 언어문제와 현지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중2 때 인도로 가기로 하고 준비했으나, 현지 학교가 입학을 받아주지 않아서 결국 가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고1 때 중퇴를 하고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고졸자격을 취득했어요. 그 이후, 고2 나이에 홍콩 대학에 들어갔고, 한 선교사님의 사역을 도우면서 영어를 배웠어요. 이것이 훈련의 첫 시작이었어요. 그때가 1993년이네요.”
– 아직 어린 나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잘 지난 것 같은데 1년 정도 홍콩에 있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한 달 동안 잠만 잤어요. 이해가 안 되게 몸이 피곤했어요. 하루에 15시간 이상씩 잔 거 같아요. 긴장이 많이 됐던 모양이에요. 한 달이 지나니 괜찮아지더군요. 그러고 나서 몇 개월 있다가 영국 신학교에 들어가 선교사 훈련을 받았어요. 이곳에서는 훨씬 수월했어요. 이제는 삶을 즐길 수 있게 됐고, 언어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조금 유연해진 것 같았어요. 그나마 조금 일찍 해외에 나온 덕에 몸으로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됐어요. 이 시간 동안 한국 사람이 아닌 열방 가운데서 유연한 사람을 만드신 것 같아요. 한국 사람의 껍데기가 벗겨졌다고 할까요?”
– 한국 사람 껍데기가 벗겨졌다는 게 무슨 의미죠?
“한국에서는 당연한 것들이 있어요. 그러나 다른 문화권의 믿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에게 당연한 게 이들에게 당연하지 않은 게 있어요. 예배를 드리는 것 하나도 강조점을 두는 부분이 많이 다르죠. 이런 것들이 부딪칠 때마다, 그동안 우리가 가르치는 게 성경이 아니라 전통이었다는 것을 보게 됐어요. 그러면서 ‘과연 내 생각은 성경적인 것인가?’ 많이 생각하게 됐죠. 지금은 훨씬 유연해졌어요. 생각이 전형적인 한국 사람은 아니에요. 해외에서 자란 아이들을 TCK(Third Culture Kids, 제3의 문화를 가진 자녀)라고 하는데, 이 아이들과 같은 특성을 제가 가지게 됐어요.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디가도 적응을 잘해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핵심이 아닌 것에는 목숨 걸지 않게 됐어요.”
어린 시절부터 해외생활 통해 열방용 사고방식 갖게 돼
–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됐나요?
“영국 신학교에 입학해 3년 동안 공부하고 돌아와서 군입대를 했어요. 제대 이후 한 달만에 국제선교단체에 들어갔어요. 보통은 선교현장으로 나가기 위해 언어, 신학을 준비하는 시간이 2~3년씩 걸려요. 그런데 저는 한국 남자로서 가장 빠른 길로 간 거 같아요. 저는 이미 언어와 선교지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선교단체 들어와서 몇 개월 훈련받은 후에 바로 아프리카로 갔어요. 그게 26살이었어요.”
– 아프리카는 어떠셨어요?
“서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에서 영어 학교를 열고, 청년들을 훈련하면서 재미있게 사역했어요. 선교사로서 사역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고 어떻게 하면 될지,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보게 됐어요. 팀워크도 좋았고 서로 보완이 됐죠. 그런데 한계에 부딪쳤어요. 잘 가르치고 잘 들었는데 사람이 결국은 말로 바뀌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선교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어요. 이 과정을 거치지 않았으면 몰랐을 거예요. 선교지에서 말로는 믿음을 가르칠 수 없어요. 삶으로 보여줘야 해요.”
– 그렇군요. 사역 초기에 중요한 경험을 하셨네요.
“아프리카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가 2004년이었어요. 그때 부모님이 복음학교를 권하셨어요. 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이 때를 위해서 그동안의 시간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보게 됐어요. 그동안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 되신 주님 안에 거하는 삶에 대해 계속 묵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확실한 응답이 없었는데, 복음학교를 시작으로 1년 동안 이 말씀을 제게 내면화시켜 주셨어요. ‘나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이었어요.”
– 지금 계신 곳은 어떻게 결정하게 되셨나요?
“한국에 들어온 뒤 마음속으로 세 나라를 놓고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중에 C국은 전쟁 중이었고, 외국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또 기독교 국가와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에 대한 반감도 심해서 막막함이 있었어요. 그때 주님이 요한복음 11장 말씀을 주셨어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려고 무덤을 막았던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시죠. 이 말씀으로 주님은 ‘이 일이 나로부터 나온 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렇게 기도하고 내려오는 길에 선교단체 본부장님의 전화를 받았어요. 느닷없이 C국에 가겠냐고 물어보셨어요. 제가 C국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요. ‘어제 전화가 왔으면 지금 이 대답을 못했을 텐데, 주님이 말씀을 주셔서 가겠다.’고 했어요. 물론 그곳에 갈 수 있는 쉬운 상황은 아니었어요.”
– 그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셨군요.
“그러나 최종 결정까지는 몇 가지 과정을 거쳤어요. 가장 중요한 과정은 개척 선교지는 전 세계 리더들이 모이는 국제회의에서 만장일치 찬성이 나와야 되는 일이었어요. 저는 회의가 진행될 때 한국에서 지인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200명의 리더들 중 C국 필드를 여는데 반대하는 분이 아무도 없었고, 15년 넘게 사역하시던 선교사님이 개척팀 리더십을 맡겠다고 하셔서 주위의 우려도 일시에 사라졌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감사와 찬양을 했는데 주님이 이 일을 하고 계셨더군요. 그때 주님이 요한복음의 나사로 이야기에서 무덤의 돌을 치우라고 하는 말씀을 보게 하셨어요. 저는 C국이 어렵다 어떻다 고민하고 있을 동안, 주님이 ‘언제 내가 너에게 나사로를 살려내라고 했냐. 살리는 건 내가 하는 것이고, 너는 돌이나 굴려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그래서 제 필명이 ‘돌굴림이’가 됐어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약속으로 저를 잡아주시는 말씀이에요.”
“나는 돌을 굴리고, 주님은 일하신다”
– C국에는 언제 들어가셨나요?
“오래 걸렸어요. 2006년에 C국 팀이 꾸려지고, 정작 들어간 건 2013년이었어요. 무려 7년의 시간이 걸렸어요. C국에 들어가는 과정도 재밌어요. 리서치도 하고 준비하고 있던 중에 하루는 이민국에 비자 때문에 갔어요. 중국 사람이 내가 중국인인 줄 알고 다가와서 말을 걸었어요. 중국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그곳에서 동양 사람을 만나서 반갑다며 이야기를 했죠. 자신이 C국에 살고 있으니, 초대할테니 놀러오라는 거예요. 그렇게 국경을 넘어 갔는데 그를 통해 그곳에 머물고 있는 한국인을 또 소개받았어요. 건설업을 하시는 분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마침 현지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김 사장님에게 전화가 걸려 와서 그분도 만나게 됐어요. 그렇게 외국인이 그곳에서 사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어요.”
–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우리 팀원들도 가보고 싶다고 해서 일주일 후에 김 사장님을 만나러 갔어요. 1박 2일 교제하고 다시 돌아오려고 하는데, 김 사장님이 김OO 선교사님을 아냐고 물으셨대요. 며칠 전에 인터넷으로 그분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자 반가운 마음에 그분을 만나 2박 3일 교제하면서 많은 대화를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하나님이 왜 자기를 여기에 보내서 고생을 시키셨는지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를 알게 됐다는 거예요. 많은 도움을 받게 됐어요. 주님이 준비해 주신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이것이 ‘자동문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이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바로 앞에 가면 열리는 거예요. 이후에 그 나라 법도 바꿔주셔서 우리가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어요. 지금은 다시 비자상황이 어려워졌는데 딱 그 시기에만 가능했죠.”
– 진짜 놀라운 자동문 은혜네요.
“2013년 3월, C국에 저희가 선발대로 들어갔어요. 막상 선교지에 들어갔지만 선배 선교사들이 없잖아요.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니 물건 하나 사는 것도 정말 어려웠어요. 그 나라에는 외국인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길을 걸어가면 지나가던 차가 서서 우리를 구경할 정도였어요. 당시에는 공산품이 부족해서 휴지도 구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였어요. 여름에는 엄청 뜨거운데 아무것도 없으니 걸어 다니면서 적응해 나가야 했죠. 3년 동안 아이 3명이 태어났고, 팀 사역도 초기 단계였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제가 도와주고 신경써야 할 일들 뿐이었어요. 그러니 일단 머리와 살이 많이 빠졌고, 혼자서 버둥대고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또 여러 번 시도했던 일들이 번번이 다 안됐고, 자리를 잡아야 되는데 겉도는 것 같았어요.”
– 그렇군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이겨내셨어요?
“힘든 싸움이었어요. ‘주님이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은 받았지만, 현실은 버둥거리고 있었죠. 그 사이에서 약속의 말씀을 붙들려고 발버둥쳤어요. 그러면서 신체적으로도 번아웃(탈진) 증상들이 나타났어요. 이 과정을 몇 년 겪고 나서야 이제 조금 몸으로 체득된 거 같아요. 상황은 어려운데 내가 달라졌어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죠.”
– 그렇게 현장에서 준비되는군요. 주님이 가장 완전한 준비를 해주신 것 같네요.
“3년 전에 한국에 들어왔을 때 후두염이 걸려서 말을 한마디도 못한 때가 있었어요. 조용히 주님 앞에 기도하며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았죠. 그때 주님이 몸과 영혼을 회복시켜 주셨어요. 그리고 한국에 와 있는 5개월 동안 중보자들 300용사를 세워주셔서 기쁘게 C국으로 돌아갔는데, 기도가 시작되니까 반격도 시작되더군요. 돌아가자마자 팀 안에 문제가 생겨서 아무것도 못했어요. 문제를 정리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죠. 그러고 나서 코로나가 시작되고 3개월 동안은 록다운이 되어 집밖을 못나갔어요. 선교지에 있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막막했는데, 오히려 이 기간을 사용하셔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결국은 주님이 하셔야 된다는 것을 되새기는 시간이 됐어요.”
– 선교의 주체가 주님이심을 절감하는 시간이 이어지는군요.
“나는 못해도 주님이 하시지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때가 2020년 중반이었는데, 그때 이후로 들어오기 전까지 상황은 더 심각했어요. 정기적으로 하던 사역을 못할 정도로 계속 일이 생겼어요. 팀과 파트너 4가정이 있는데, 모든 가정의 가장들에게 건강의 문제가 생겼어요. 한명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 한명은 지붕에서 떨어져서 결국 한국으로 후송을 했어요. 한명은 코로나에 심하게 걸려서 고생하고, 또 전쟁이 터졌어요. 현실적으로 봤을 때는 되는 게 없고, 풀리는 것도 하나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달라졌어요. 스트레스를 전처럼 받지 않는 거예요. 긴장이 와도 오래 가지 않았죠. 사역도 중단되고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데 마음이 평안했어요. ‘주님이 하시지.’ 하면서, 돌굴림이의 삶의 형태를 조금 경험해보게 된 것 같아요.”
“상황은 어려운데 내가 달라졌어요”
– 네. 우리가 돌 문을 치워놓으면 죽은 자를 살리시듯,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시는군요.
“주님이 붙여주신 사람들을 섬기고, 마음이 어려운 사람들, 몸이 아픈 사람들을 섬기기 시작했어요. 저는 원래 계획을 하고 전략을 짜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리더를 맡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생각했었는데, 이때는 전혀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주님이 던져주신 일을 할 뿐이었어요. 그러니 무계획이었어요. 원래 스타일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는데, 마음에 평안을 주셨어요. 20년 만에 처음으로 살이 쪘어요. 선교지에 가서 살이 쪄 본 적이 없거든요. 주님 하신다는 것을 믿고 평안한 마음으로 바꿔주셨어요. 어려운 시간들이었는데, 뒤돌아보면 그 시기를 통해 몸으로 체득해서 배울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돼요.”
– 주님 안에서 안식하는 삶을 몸에 새겨주신 것 같네요.
“감사하게도 올해 처음으로 거기서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한 사람이 나타났어요. 전략으로 한 것도 아니고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니었어요. 현지인과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어요. 1년 동안 복음스터디를 했는데, 그것도 방해가 너무 심해서 1년 내내 10과도 못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주님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깨달음을 주셔서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한 것이죠. 이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건 생명을 다해 따르겠다는 말이에요. 저는 이곳에서 주님 따르겠다는 사람을 처음 봤어요. 순종해서 돌만 굴렸을 뿐인데 메마른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게 하시는 것을 본 것이죠. 앞으로 더 기대가 됐어요. 전략이 더욱 없어지고 주님이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가 기대가 돼요.”
<이상 270호에 게재>
– MK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MK들 중 부모님을 따라온 삶을 고생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전학도 많이 다니고 그랬지만, 주님 따르는 일 때문에 겪는 어려운 일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몰라요. 주님이 일하시는 걸 볼 수 있었고,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요. 다른 것들을 버려서라도 얻어야 할 가치를 얻었죠. 저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지만 후회 없어요. MK들이 진로 고민도 많이 하는데, 그 과정을 겪어 온 선배로서, 선교사로 걸음을 걷는 사람으로서 선교사는 더 이상 좋은 선택을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길이라고 생각해요. 기쁘게 이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한 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끼워주시는 영광스러운 길이에요. 강추입니다.”
– 그러면 선교를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해주실 조언 같은 게 있을까요?
“내가 믿는 바에 대한 확신과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선교지에 가면 이렇게 하리라.’ 계획을 가지고 오지만, 계획대로 되는 게 거의 없어요. 그러면 좌절이 돼요. 사역자가 필요한 곳은 가기만 해도 교회가 세워지는 데가 아니라, 사막 한가운데 혼자 던져진 것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곳이에요. 그런 곳에서 나를 붙드는 것은 말씀과 주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확신이에요. 지금 선교지에 나오는 사람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가 많아요. 그때 나와서 언어 배우고 문화에 적응하려면 쉽지가 않아요. 말을 잘 못하면 현지인들은 지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무시해요. 그러면 ‘나 여기서 뭐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좌절이 돼요. 이런 시기를 지나가야 되는데 다른 방법이 없어요. 오직 말씀과 부르심의 확신 없이는 끝까지 갈 수가 없어요.”
– 앞으로 계획과 기도제목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C국 옆에 믿는 사람이 더 없는 지역으로 새로운 팀을 보내려고 기도하고 있어요. 2~3년 안에 팀이 생겨나도록 기도해주세요. 또 사역자들이 더 필요해요. 이곳은 잘 알려진 곳도 아니고 선호하는 곳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잘 오지 않아요. 주님이 예비하고 부르신 사역자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지금 12명의 신입 사역자들을 두고 기도하고 있어요. 최소 5명은 더 와야 하는데, 아직까지 지원자가 없어요.”
– 끝으로 한국 성도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요?
“믿는 사람들이 주변에 없는 곳에 살다보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의 동지들의 소중함을 더 느끼게 돼요. 같은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전우들의 중요성을 많이 깨달아요. 처음에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다보면 단점이 보이고, 왜 저러나 생각도 되면서, 팀으로 일하는 게 쉽지 않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주님이 그들에게 주신 역할이 있음을 보게 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해져요. 믿음의 자리에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돼요.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면 내가 힘이 나고 기쁘죠.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음으로 서 계시면 좋겠습니다.” [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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