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복을 빌어 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진심에서 우러나는 상대방을 향한 사랑과 관심에서 비롯된다.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장로 가이오에게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만일 예수님께서 지금 이 땅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그분은 새해를 앞둔 그분의 제자인 우리에게 뭐라고 복을 빌어주셨을까? ‘복을 비는 건 미신이야, 나는 그냥 너희가 새해에도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란다’라고 냉소적으로 말씀하셨을까? 어쩌면 예수님은 우리를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친히 입을 열어 복에 관한 귀한 가르침을 주실지도 모른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 앉아 말씀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앞으로 여덟 번 정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복’에 관하여 살펴볼 것이다. 그전에 먼저 예수님이 우리가 새해에 서로에게 하듯 복을 빌어주신 것이 아니란 사실을 분명히 해야겠다. 예수님은 자신보다 더 큰 존재에게 제자들을 대신하여 복을 빌고 계신 것이 아니다. 그분보다 더 큰 존재는 없다. 여덟 가지 복에 관한 말씀에는 모두 다 매우 확신에 찬 권위 있는 약속이 달려 있다. 예를 들어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사도 요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는가?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예수님은 누군가에게 복을 빌어야 하는 유한하고 의존적인 존재로서 팔복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다. 복의 근원으로서, 복을 소유하신 분으로서(“내게 있어”), 복을 주시는 수여자로서(“내가 줄 상”) 제자들에게 복을 약속하신 것이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이 베푸실 이 복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당 사항이 있다. 팔복에 관한 마지막 말씀에서 예수님은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5:12). 이 말씀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 이에게 복이 있다고 약속하신 말씀 뒤에 따라온다. 그러므로 과거 예수님이 성육신하기 전 하나님을 위해 박해받은 선지자들에게도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이 동일하게 약속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복은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된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명료한데, 상을 주시겠다고 사도 요한에게 약속하신 후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라고 말씀하셨다(계 22:13).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 약속하신 여덟 가지 복을 구약시대 선지자들과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직접 들었던 제자들, 그리고 이천 년이 지난 지금의 제자들이 모두 기대하고 바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눅 20:38). 살아 있는 모든 자를 심판하여 복과 화를 주실 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요 5:22).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 1-12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복’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따라 참된 복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복되다’라고 선언하신 삶을 살아야 한다. 그분이 삶에 대한 최종 심판자이시며 그 손에 모든 복과 화를 쥐고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말하는 복 받는 법, 온갖 미신적인 방식으로 복을 얻으려는 행위를 모두 그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약 1:17). 그리고 아버지는 오직 아들을 통해서, 아들의 판결에 따라 복을 내려 주신다.
첫 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선포하신 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에 관한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특별한 행위 하나를 가지고 복을 약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특징지을 수 있는, 그것이 그 사람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보이는 성품인 것을 가리켜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우리가 보통 욕심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욕심쟁이’라고 규정하듯,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판결하신 사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여덟 가지 특징으로 규정될 수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해 첫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하다’ 혹은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맥아더 성경 주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944페이지).
예수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에 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마음이 부요한 자’,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자’와 정반대인 사람이다. 그는 많은 재물로 기뻐하며 자기 영혼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 그의 마음은 온통 재물과 재물이 주는 평안, 기쁨, 안식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부자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다. 겸손히 자신에게 재물을 풍족하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영혼도 건사하지 못한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서 알려주신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다. 호흡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살아가는 존재이면서도 마땅히 가난한 마음으로 겸손히 그분께 감사하지 않는다. 그분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되게 지혜로운 척하지만, 대단히 어리석은 존재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우상처럼 숭배하면서 정작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모른 척한다. 돈, 명예, 인기, 사람들의 인정, 평가 등 유한한 것들을 좇고 거기서 복을 누리려 한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부모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길러지고 자라난 자녀가 아무런 이유 없이 부모에게 등을 돌리고 절교를 선언하면 세상은 그런 사람을 패륜아처럼 여긴다. 은혜를 모르고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교만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마음이 부요한 자’가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를 숭배하며 산다. 감사와 겸손은 찾아볼 수 없는 교만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천국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여덟 가지 복에 관한 말씀은 모두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겸손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는 항상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우며 살아야 한다. 다른 말로 예수님이 약속하신 복과 관련되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오직 겸손한 자만이 천국 문을 통과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겸손한 자만이 천국을 소유한다(“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마음이 부요한 자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 가득할 뿐이다. 그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그의 견고한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야 한다. 높아진 생각을 낮추고 겸손히 예수님께 굴복하도록 주께서 일하셔야 한다. 교만한 죄인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빌 2:5).
예수님의 가난한 마음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이 땅까지 자신을 겸손히 낮추셨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은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6-8). 교만한 죄인의 영혼을 가난하게 하기 위해서다. 교만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은 이 말씀 앞에서 자신을 낮춰야 한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
그리스도의 마음을 그 마음에 품은 자,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아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외면할 때 자신이 얼마나 처절하고 비참한 멸망에 빠지는지 아는 자, 그래서 그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탄식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주 명료하게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2).
가난해진 마음으로 천국문을 통과한 사람이 다시 교만해지는 것은 정말 구역질 나는 가증한 일이다. 마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가짜로 겸손한 연기를 한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앞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그 제자가 된 사람이 제자로서 살아가면서 다시금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을 면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도 안 되는 복을 받은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자기 인생을 사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하나님으로부터 복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제자인 빌립보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했다. 천국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천국이 그들의 것인 예수님의 제자들은 계속해서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교만이 그들의 삶에서 언제든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있다.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내가 이런 말을 들어야 하나?’,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지?’, ‘내가 해냈지, 다른 사람은 이런 일을 할 수 없어.’ 존 칼빈은 사람의 마음이 날마다 우상을 찍어내는 공장과 같다고 했는데, 그 공장에서 가장 많이 찍어내는 상품이 바로 ‘교만’이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아담의 원죄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참으로 깊고 지독한 상처를 남긴 것 같다. 끊임없이 교만이라는 죄와 우리는 싸워야 한다. 우리 지체 속에서 우리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으로 사로잡는 악하고 강력한 한 다른 법이 있다(롬 7:23).
하지만 염려하지 말라.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신다. 그래서 고아같이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영을 두셨다(롬 8:26). 또한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겸손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고, 반드시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롬 8:28-30).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롬 8:31).
그러므로 겸손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우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의 마음을 품으라. 교만을 미워하라. 교만의 싹이 날 때 가만히 두어 키우지 말고 밟아 죽여라. 사람들 앞에서 나를 보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보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라. 그것이 모든 복을 주실 권한이 있는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된 삶이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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