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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우울증(2)

Unsplash의 Andrew Le

지난 글에 이어 이번에는 사도바울의 삶을 통해 우울증 문제를 성경적으로 바라보고 다루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바울의 삶

성경에 그려진 바울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본 받아야 할 여러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받았던 핍박, 고난, 질병의 고통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죄인 사울

먼저,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의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3절을 보면 자신을 포함해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러한 죄인이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유대교의 전통을 따르며 그리스도인들을 말살하는 것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라 믿었고 또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사울)에 대해 사도행전 9장 1절에서는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13~14절에서도 자신의 유대교를 향한 믿음과 열심이 어떠했는지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리스도인이 된 사울

그러나 에베소서 2장 8~9절의 말씀과 같이 그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자가 되어 이전에 열심(유대교를 따르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일)을 내었던 일에서 완전히 돌이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는 매우 급진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사도행전 9장 20, 22절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과거 자신이 핍박했던 것과 같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울을 죽이고자 하였고 그들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줄에 매달린 광주리에 몸을 숨기고 성벽을 내려와 그 위험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사울은 이제 핍박받는 한 그리스도인으로 남은 생을 살았습니다.

전도자 바울

사도바울은 초기 교회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특별히 선택된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행전 9:15)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 사도바울이 피할 수 없었던 한 가지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로부터의 핍박을 견뎌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죄 문제나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사도행전 9:16)

실로 바울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던 바울은 사도로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믿는 자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죽음에 이르는 육신적, 정신적 핍박과 고통을 끝까지 견뎌내고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본분을 다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고백을 통해 그가 어떻게 우울증에 빠질 만도 했던 상황들을 극복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잠시 지난 글에 다루었던 내용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 글은 의학적, 신경정신학적 이론을 지지하거나 평가하는 목적이 아님을 밝혀 두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이 문제를 인식해야 할지 성경의 예를 통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울증의 원인, 약물 부작용, 진단, 치료 등에 관련된 세세한 내용은 여기서 다루지 않음을 또한 밝힙니다.

우울증에 대한 성경적 정의

로버트 스미스는 우울증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낙심되는 기분, 느낌, 또는 소망이 없다는 이유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들을 다루지 않는 태도”라 말합니다. 마샬 애셔는 “우울증이란 하나님이 우리 삶을 주관하도록 내어드리는 대신 우리의 감정이 삶을 이끌어가도록 내어주는 것으로 이것은 죄다.” 존 스트리트는 “낙심한 것”과 “우울증”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울한 기분, 감정을 느낄지라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들을 여전히 다루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면 이는 “낙심한 것”으로 보지만 반면 우울증은 낙심한 상태에 더불어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는 기능 정지의 상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제이 애덤스는 “어떤 문제를 초기에 잘못 다루고 문제를 확장하는 악순환을 초래하여 당사자를 낙담한 상태로 몰아버리고, 절망, 죄책감으로 사로잡히게 만들어 행동이 지연되거나 정지된 상태”를 우울증이라 정의합니다. 자신의 감정에 지배당하는 생활에 익숙해지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우울증의 마지막 단계로서 종종 자살을 선택하여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바울에게 다가오는 시련, 고난, 핍박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분명히 묘사하여 그 핍박이 결코 과소평가 되거나 무시할 수 없는 실재적이고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이 감당해야 했던 순간들은 심히 고통스럽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모든 힘이 바닥날 만큼 심신이 극한 상황으로 내몰리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현실의 위협과 다가올 위험에 대한 중압감은 그 자체만으로도 믿음으로 사는 자나 믿음 없이 사는 자 모두에게 어려움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에 대해 사도바울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 상황들을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은 인간으로서 두렵고, 지칠 만도 하고, 주저할 만도 하며 너무나 억울하다 느낄 만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을 법한 앞이 캄캄한 상황들이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여기 사도바울의 고백은 히브리서 11장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준 모습과 많이 닮았습니다.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고린도후서 4장 8~9절을 보면 바울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전히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이렇듯 바울의 아름다운 간증에서 5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장 8~9절에 나타난 그의 고백에서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라고 표현한 대로 자신의 목숨을 잃고도 남을 핍박과 고통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라고 말한 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자랑스럽고 엄숙한 어조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도 하나님께 능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런 능력의 하나님을 떠나서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요한복음 15장 3절에서 예수님을 통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는 환경에 이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감정에 이끌리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라는 고백 그대로 살았습니다. 바울의 초점은 자신이 겪었던 핍박과 고통, 위압감의 현실 너머에 있는 복음의 진보와 그 일을 이루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그가 한 것은-“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립보서 1장 29절)-다니엘의 세 친구와 같이 자신의 생사와 안위는 이미 하나님의 손에 맡겨 놓고 자신의 믿음과 고백이 일치하는 삶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고 사도행전 16장 2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답답하고 어두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그분을 경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 자족을 배우다

바울이 빌립보서 4장 13절에 고백한 대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11~12절에 답이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족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자족함을 배웠던 환경은 “어떠한 형편”에서도, 그의 말대로 비천함, 풍부함, 배부름, 배고픔 등의 극과 극의 상황을 경험하며 여전히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 안에 만족하며 그분이 허락하신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을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희망이 없는 상황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3. 약할 때 강함이라

사도바울은 외부에서 자신에게 가해진 어려움 외에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신의 질병이 그의 믿음을 가로막을 수 있었던 문제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성경은 사도바울이 구체적으로 어떤 질병으로부터 고통받았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본인 스스로“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12:7~10)

바울은 육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갔습니다. 그리고“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묻는다면 대답은 “정상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의학이 발달한 현시대에도 수많은 불치병이 있습니다. 자신의 병이 고침받을 수 없다는 소식을 의사로부터 듣는다면 누구든지 그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간절한 기도를 향한 하나님의 대답은 거절이었고 병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닌 여전히 고통받는 육신을 가진 채 약한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참 실망하기 쉬운 순간입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자신의 기대와 달리 거절된 것에 대한 바울의 실망함 혹은 절망하는 마음을 볼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는 “크게 기뻐” 하였고, 자신의 “약한 것들”을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4.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그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였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결과적으로 환난(이방인들과 동족들로부터 자신이 받았던 핍박)은 바울을 인내하는 자로 성장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3절에서도 같은 교훈을 합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환난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나면 연단(character:하나님 보시기에 증명된 성품)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 결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자로 서게 됩니다. 지나온 과정에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족함을 배우고, 약한 가운데 강해졌던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다시 깨달으며 오직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고난받던 욥 또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10)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야고보서 5:11)

믿는 자들은 확실한 소망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믿는 자에게 거하시며 진리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음을 증거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실망하고 괴로워하고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5)

5.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바울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드러나는 것을 기뻐하였고 그렇게 살고자 애썼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사도바울은 “이것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21절에서 그는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렇게 고백합니다.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잃을지라도 그것이 하나의 밀알이 되어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을 원했습니다. 자신은 무대 뒤에서 드러나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귀한 것들을 드러내는데 수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에 비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나타내는 일을 위해 자신의 희생이 따른다 해도 그에게는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죽음을 바라본다면 실패 혹은 끝이라 결론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어떠한 형태의 죽음을 맞이하든, 자신에게 허락된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고 자랑하는 일에 헌신하는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므로 그것이 실패가 될 수 없었습니다. 더 나아가 자신의 마지막 숨이 다하는 순간 그토록 고대하던 그리스도를 만날 터라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라고 말하는 바울의 간절하고도 설레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사모하는 마음은 이 땅에서 자신의 생이 마감되는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깨달으며 사랑하는 제자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 다시 나타나 있습니다.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드러냈던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존귀하게 대해주실 것을 또한 기대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7~8)

[복음기도신문]

전경식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GTK 칼럼] 우울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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