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은퇴하신 박동현 교수님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대화가 오갔고 교수님은 곧 제게 질문하셨습니다.
“손 목사님은 거리에 계신 분을 어떻게 부르십니까?”
“노숙인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거리에 계신 분들은 그 말을 좋아하십니까?”
“노숙인이라는 단어가 그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생각해보질 못했습니다.”
소외계층이라는 말도 듣는 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불리는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이웃 중에서도 차별 받는 이웃이기에 그러합니다. 상처가 많은 이웃입니다. 살림공동체에서 갖는 매주 목요일 나눔의 시간에 노숙인이라는 단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또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형제가 갑자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전에 프레이포유 사역을 함께 한 목사님의 핸드폰에 자신의 이름이 ‘노숙인 OOO’으로 저장된 것을 보고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갑자기 제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예전에 자신을 노숙인이라고 부르지 말라던 살림공동체의 한 형제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목사님, 제발 노숙인이라 부르지 마세요.”
평소에는 형제의 이름을 부르는데 살림공동체에 오신 외부 손님과 대화를 나누거나 방송에서 인터뷰할 때, “우리 형제들은 노숙인 출신 사역자”라고 한 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살림공동체에서 나눔을 마치며 앞으로는 노숙인, 쪽방촌 주민, 소외계층이라 부르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분들이 원하는 이름을 부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노숙인은 거리에 계신 분들, 쪽방촌 주민은 좁은 방에 사는 분들, 소외계층은 우리의 이웃으로 부르자고 결정했습니다.<2019년 일기>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손은식 목사와 프레이포유 사역을 섬기는 사역자들의 사역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손은식 목사 | 2013년 말부터 서울 시내의 노숙자와 홀로 사는 어르신을 돕고 기도하는 프레이포유 사역으로 이 땅을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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