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선교의 나팔소리 최종덕 목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커녕 자신의 삶도 스스로 인도할 수 없다. 오직 복음 되신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생명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진리로 인도해야 하는 목회의 현장에도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 된다. ‘성도들이 복음의 삶을 살아내게 하기 위해서 목사가 할 일은 끊임없이 복음을 외치는 것 외에는 전혀 없다’고 강조하는 최종덕 목사를 만났다. <편집자>
– 고향이 어디신가요?
“경북 의성 출신이에요. 제가 살던 곳은 전기도 없고, 개울을 13번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는 그런 깡촌이었죠. 거기서 17살까지 살았어요. 근처에 크고 소문난 절이 하나 있었지만, 제가 사는 작은 동네에 교회가 있어서 교회 문턱을 밟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 성탄절에 한 번씩이라도 교회를 갈 수 있었죠. 감사한 일이죠.”
– 식구들도 교회에 다녔나요?
“아니요.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계셨고, 집안을 돌보는 일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죠. 늘 우셔서 눈이 항상 충혈된 모습을 하고 계셨던 것이 많이 생각나요. 많이 고생하셨죠. 정말 가난했었어요.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보다 중요한 건 땔감으로 나무라도 한 짐 해 놓아야 밥상 앞에 앉을 수 있었죠.”
땔감 해야 밥 먹을 수 있던 유년 시절
– 학업에 열중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겠네요.
“형편이 어려워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저히 고등학교를 가겠다는 말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직업훈련원에 다니기 위해 혼자 대구로 갔어요. 그렇게 17살에 객지 생활이 시작된 거죠. 고향에서 종종 다니던 교회도 잘 가지 않게 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죠. 노름을 하느라 한 달 월급을 고스란히 날리기도 하고 그렇게 생활비가 없어서 쫄쫄 굶기도 했죠. 싸움도 많이 하고 엉망이었어요. 그때 ‘왜 사나?’라는 생각이 처음 들더군요.”
– 어떤 계기로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대구에서 산지 한 3년 정도 지났을 때에 공단에서 일하는 분들이 합숙하는 자취방을 예배 장소로 사용하는 개척교회에 다니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다시 열심을 냈죠. 새벽기도도 하고 세례도 받고요. 그러다 대구에서 다니던 직장에 어려움이 생겨 경기도 성남에 이모님 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어요.
이모는 독실한 불교 신자셨는데, 밥상에서 기도를 하면 ‘밥을 내가 주지 하나님이 주냐?’고 핀잔을 주셨죠(웃음). 그리고 새벽에 뒷산에서 기도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불경 테이프를 크게 들어놓으시곤 했어요. 그래도 저는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두 달 만에 교회를 안 나가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세상으로 다시 빠져들었어요.”
– 누구나 십자가 복음을 만나는 길이 순조롭지는 않은 것 같아요.
“네. 저도 어떤 사건을 계기로 다시 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교회 옆에 방을 얻어 놓고 또 다시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기 시작했죠. 그게 잘 믿는 건 줄 알았어요.”
– 영혼의 목마름을 깊이 느끼기 시작한 시기가 있으셨나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착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아버지가 술에 취해 들어오시면 다른 식구들은 다 피해도 저는 아버지를 끌어안고 잠이 들곤 했어요. 그런 제가 좋으셨는지 아버지도 사람들에게 제 칭찬을 많이 하셨고, 주변 사람들도 착하다고 말해서 저는 제가 정말 착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실제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직분을 맡게 되고 제가 하는 말과 실제 삶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 제 모습을 보는 게 정말 괴로웠어요.”
– 그 목마름에 대한 해답을 만나기까지 과정에 대해 나눠주세요.
“무너지는 내면의 모습들을 보면서 회개를 하고, 눈물을 흘려도 해결이 안되더군요. 하나님께 ‘나 좀 도와주세요’라고 간구했지만 바뀌지 않았죠. 제게 이런 존재적인 목마름도 사실이었지만 또 다른 목마름이 있었어요. 그건 배움에 대한 갈증이었죠. 당시 성남에 야간 성경학교가 있었는데, 우연하게도 그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어요.
그렇게 성경학교는 다녔지만, 중졸인 저는 절대로 목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특이한 인도하심으로 한 교회에 전도사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펼쳐졌고, 그 교회에서 첫 설교를 하고 나서 자리에 앉았는데 마치 오랜 여행을 하고 집에 온 느낌이 들더라고요. 정말 편안했어요. 그래서 이 길인가보다 생각을 했죠. 그렇게 검정고시부터 시작해서 신학대학원까지 마치니까 나이가 40이 되었더군요.”
– 배움에 대한 목마름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신 거네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여전히 저는 제 열심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특별히 청소년 사역에 열심을 냈죠. 학교마다 쫓아다니며 기독 동아리를 섬기고, 학교 특별활동시간을 인도하곤 했죠. 그러다가 2004년에 우연히 한 선교단체에서 진행하는 선교관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그게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던 거죠.”
– 어떤 일이 있었나요?
“첫 강의부터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저는 늘 제 관점으로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 꿈과 비전 같은 것들을 주로 말했어요. ‘이것, 저것을 해야 한다. 좋은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는 식으로 주로 설교를 했었어요. 그런데 선교관학교를 통해서 사람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고 무엇을 하실 것인가’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보게 된 거죠. 충격이었어요.”
– 관점이 나로부터 하나님으로 옮겨진 중요한 사건이었군요.
“그리고 주님은 선교관학교에 이어서 복음학교라는 곳으로 인도해 주셨어요. 그곳에서 드디어 제 존재의 목마름에 대한 해답을 주셨어요. 열심히 살지만 내가 왜 변하지 않는지, 사람들에게 착하다고 칭찬은 듣지만 내 안에 왜 그런 모순적인 모습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보는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신학을 하면서 그리고 선교관학교를 하면서도 이 모든 것이 십자가복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몰랐었는데, 복음학교를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이 퍼즐 맞추기처럼 쫙 꿰어지는 시간이었어요.”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기 “충격”, 목회의 전환점
– 목회 현장에도 큰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당시 부교역자로 있으면서 청소년 사역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아이들에게 정말 복음을 말해줘야겠다.’라고 결심을 했는데, 주님은 지금 섬기고 있는 이 교회로 보내주셨죠. 당시 저는 교회 개척이나 담임 목회를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거든요.”
– 이 교회로 부임하시게 된 과정이 궁금한데요.
“처음에는 제가 일단 3개월만 강단을 섬기기로 했어요. 당시 교회가 좀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주님, 왜 소심하고 경험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접니까?’라고 물었더니 주님은 도리어 제게 ‘목사가 왜 필요하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 질문에 대답을 못한 채로 복음학교 때 필기한 노트를 뒤적거렸어요.
제가 메모한 내용 중에 ‘세상이 너를 필요로 한다면 너에게 있는 복음 때문이다.’라는 글귀가 튀어나오듯 크게 보이더군요. 그래서 강단에서 오직 십자가복음만 전했어요. 그렇게 이곳에서 목회가 시작되었죠.”
– 그 과정 중에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어려웠죠. 어느 날 한 성도님이 찾아 오셔서 ‘성도들이 너무 어렵습니다. 성도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말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하죠. 그렇지만 ‘목사가 필요한 이유는 복음 때문이다.’라는 이것을 포기하면 제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에 양보할 수는 없었죠. 치열한 싸움이었던 것 같아요.”
– 그렇게 격렬하게 복음으로 교회를 섬기시면서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좀 더 나눠주세요.
“제가 이 교회에서 사역을 한 지 이제 9년이 되었는데요, 먼저는 청년들이 믿음 안에서 세워져 가고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 청소년기에 복음을 만나 어느덧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들은 성도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어요. 특히 정말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친구가 복음으로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경우에는 큰 위로가 되죠.”
– 청년들이 복음에 힘을 기울이고 있군요.
“기존 성도님들도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이제는 복음과 선교라는 주제 앞에서 점점 반응하시는 모습들을 보게 되요. 속된말로 ‘날라리’ 집사였던 한 성도님은 십자가복음을 만난 이후에 선교훈련을 받고 선교사로 해외에 가셨어요. 그런 변화들이 정말 감사한 것 같아요.
또한 최근에 2주간 인도로 아웃리치를 다녀왔는데 팀원 중에 7개월 된 아기를 둔 자매가 있었어요. 남편 되는 형제가 선교에 대한 마음을 공유하고 싶어서 부인에게 권했고, 직장을 내려놓을 결단까지 했어요. 그 소식을 들은 교인들이 낮 시간에는 우리가 아이를 돌보겠다고 자원을 한 거예요.”
– 정말 놀라운 이야기인데요.
“어린 아이를 둔 엄마가 아이를 두고 해외에 나간다는 게 평범한 선택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성도 중에 그 누구도 그 자매의 결정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함께 협력하고 섬기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어요. 성도들이 선교에 대한 가치를 어느 정도 함께 공유하게 된 것 같아 감사했죠.”
교인들 “선교다녀오세요. 아기 봐드릴게요”
– 주님의 양무리를 복음으로 섬기는 일이 정말 만만치 않을 것 같아요.
“네. 복음을 실제로 누리는 삶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이 있어요. 복음을 안다고 하지만 살아내는 부분은 또 다른 차원이죠. 제게는 ‘착한 목사’로 인정받고 싶은 자신을 부인하고 성도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날카롭게 전해야 하는 숙제가 늘 따라다니죠.
지난 주간에는 사데교회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가 아닌가? 정말 살아 있는 것 맞나?’라고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사실은 주님이 제게 하시는 말씀이었죠.”
– 끝으로 한 말씀만 더 부탁드려요.
“겉모습만이 아니라 자원해서 복음의 삶을 살아내는 교회가 되기까지 목사는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해야 하는 것을 깨달아요. 우리 교회가 ‘복음으로 사역하는 교회’라는 소문을 들어요. 소문만 무성한 교회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 있어요. 아무쪼록 들은 바 복음을 세상 속에서 삶으로 살아내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주님이 하실 거예요.”
[GNPNEWS]
J.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