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 중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신앙이 자동적인 위안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자동적인 위로와 실존적인 능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
이 글은 지난 3월 7일 미국 The Atlantic지에 실린 팀 켈러 목사의 기고문입니다.
암 진단이 닥치기 전까지, 나는 평생 동안 다른 이들을 상담하던 목사였다. 이제 내가 했던 그 조언을 내가 들어야 한다.
인생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임박한 죽음 앞에 선 사람들에게 믿음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 설명했다. 1975년 장로교 목사가 된 이후, 나는 수없이 많은 병상 옆에서 환자를 상담했고 때로는 그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에 함께하기도 했다. 최근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를 기록한 소책자, ‘죽음에 관해서(On Death)’를 출간했다. 그 책을 출간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췌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2020년 2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시아 기독교인 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장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캔 검사 결과, 복부 림프절이 꽤 비대해져 있긴 했지만 별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고, 세 달이 지난 후 점검하기 위해 다시 병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즈음 내 책이 출판되었고 또 당시 뉴욕에 사는 우리 모두는 다 COVID-19 때문에 한창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내 몸 속에는 죽음의 사자가 단단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나는 온라인에서 췌장암의 희박한 생존 통계를 보며 몇 분 동안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바로 옆에는 내가 쓴 ‘죽음에 관해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쓴 그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갑자기 닥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나와 아내 캐시는 많은 시간을 눈물 속에서 보냈다. 우리는 둘 다 일흔을 지나고 있었지만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말짱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오십 년간 해오던 사역을 앞으로도 계속 할 수 있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캐시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보, 난 일흔이 되면 정말로 노인처럼 느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네요.”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은 계획이 있었고 또한 자녀와 손주라는 큰 기쁨이 있었다. 병이라는 건, ‘내가 정말로 엄청 늙었구나’라고 스스로 느낄 때나 찾아오는 불청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아직은 아니지. 아니, 이건 말이 안 되지. 하나님, 지금 나한테 뭘 하시는 건가요? 성경 중에서도 특히 시편은 이런 우리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주님, 왜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오 주님, 일어나십시오. 왜 주무십니까?” “오 주님? 나를 영원히 잊으신 겁니까?”
죽음 앞에서, 그것도 자기가 생각하기에 부당한 이유로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흔들리거나 또는 아예 믿음을 잃어버리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이런 현상을 많이 목격했다. 몇 년 전 암에 걸린 한 여성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더 이상 신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내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습니다. 내게 이런 병을 주는 사랑의 하나님(personal God)을 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습니다.” 정작 암이 죽인 것은 그녀가 믿던 하나님이었다.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갑자기 나는 내가 수술대에 누운 외과 의사처럼 느껴졌다. 내가 환자들에게 하던 그 조언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 중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신앙이 자동적인 위안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자동적인 위로와 실존적인 능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관한 합리적이고 또 의식적인 인정에도 불구하고 불치병 진단은 당장 내 속에서 무척이나 강력한 심리적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꺼져가는 빛을 항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라는 딜란 토마스(Dylan Thomas)의 조언에 따르는 대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도 안 돼, 난 죽을 수 없어. 이건 다른 사람들한테나 생기는 일이지 나한테는 아니야.” 이런 터무니 없는 말을 소리내서 말했을 때, 나는 바로 이 착각이야말로 그때까지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움직이던 실질적인 작동 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화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죽음에 대한 부정이 우리 문화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삶이 이러한 부정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그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죽음에 대한 부정이 우리 곁을 떠난 적은 없다. 16세기 개신교 신학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머물 것처럼 일을 벌이면서 살고 있다. 죽은 시체를 볼 때면 아주 잠시 덧없는 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하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우리 마음은 다시금 내 자신의 영속성이라는 생각으로 고정된다.” 죽음은 우리에게 추상적인 무엇일 뿐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현실 속에서 죽음은 여전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똑같은 이유로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우리의 믿음 또한 종종 추상적인 차원에 머문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굳이 믿음이 우리에게 정신적 동의 내지 수긍, 그 이상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연극이나 영화 속 전투에는 무대 소품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내 마음에서 비로소 현실이 되는 순간, 나는 나의 믿음 또한 내 마음에서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 나는 하루를 견딜 자신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부활에 대한 이론적 생각은 이제 내 생명을 붙잡는 진리가 되거나 아니면 폐기 처분할 쓰레기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나는 단지 종교인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거부하는 가운데, 평생 가졌던 신념마저 사라지는 과정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나는 또한 목사로서 단지 명목상에 불과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나 또는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우주에 대한 일련의 믿음을 가지고 산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은연 중의 믿음은 물질 세계가 저절로 생겨 났고 또한 우리가 죽은 후에 갈 초자연적인 세계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작가 줄리안 반스(Julian Barnes)가 주장했듯이 죽음은 결코 두려워할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의 항목이며, 사람들은 반스가 가졌던 생각을 활용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차단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세속적인 믿음이 위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비종교인들조차 종종 죽음이라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유한성과 죽음이 주는 확신이 마침내 당신이라는 존재를 관통할 때, 우리를 무너뜨리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그 현실을 대면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 큰 은혜와 사랑과 지혜로 보낼 방법은 없는 걸까? 나는 분명히 있다고 믿지만, 거기에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즉, 머리와 마음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내가 지금 머리와 마음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각각 추론과 느낌을 의미하는 이 두 단어의 기능이 상호 독립적이라는 현대적 관점을 반영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히브리성경은 마음이 생각과 의지 그리고 감정의 중심을 차지한다고 본다. 잠언은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대로다”라고 말한다. 즉, 합리적인 신념과 경험이 내 생각을 바꿀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는 결코 내 속에 일어나는 변화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신념을 재검토함으로써 내 신앙을 강화하기로 했다. 과연 신앙이라는 게 죽음을 상대할 수 있는지 말이다.
정형외과 의사인 폴 브랜드(Paul Brand)는 의사 인생 전반부를 인도에서 그리고 나머지를 미국에서 보냈다. 최근에 낸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미국에서 …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통을 피하려는 사회를 만났습니다. 환자들은 내가 이전에 치료했던 환경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안락한 수준에서 살고 있었지만 고통을 처리하는 그들의 능력은 훨씬 취약하고 고통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훨씬 더 심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왜 풍족한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악의 존재와 고통 그리고 죽음 때문에 더 고통받는 것처럼 보일까?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그의 책 ‘세속 시대(A Secular Age)’에서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방법과 정의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했지만, 아주 최근까지도 고통이 하나님의 존재를 말이 안 되게 한다고는 결론 내리지 못했다고 썼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부적절함이나 죄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다 편안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식의 현대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 인간은 자신의 논리적인 능력에 너무도 자신감을 갖게 된 나머지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면 아예 고통이란 없다는 식으로 가정한다고 테일러는 주장한다.
그러나 당신이 목격하거나 인내하는 고통에 대한 당신의 분노를 처리할 정도로 위대한 신이 있다면, 당신이 결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해도 그런 고통을 허용하는 분명한 이유를 가진 위대한 신도 있기 마련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가 행하시는 선과 악의 모든 이유를 다 알 수 있다고 확신하거나 또는 그 하나님이 항상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물을 대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테일러의 요점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게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갖고 있는 지나친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혼란을 자아낼 뿐이라는 것이다. [복음기도신문]
“ 하나님의 사랑과 부활에 대한 이론적 생각은 이제 내 생명을 붙잡는 진리가 되거나 아니면 폐기 처분할 쓰레기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
팀 켈러 Tim Keller |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 City to City의 회장과 The Gospel Coalition의 설립자.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의 저자.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를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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