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권적인 은혜의 복음 (2)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들려주신 유명한 세 가지의 감동적인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와 있다. 스스로 “난 바리새인이야. 난 신학자야. 난 율법선생이야.”라고 말하며 세리와 죄인을 무시하는 이들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신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당시 유대 사회는 양을 자기 자식을 키우듯, 한 마리 한 마리마다 이름을 지어가며 키웠다.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다는 것은 하나를 그냥 채운 정도가 아니라 동네 사람들을 불러놓고 기뻐할만한 일이었다. 주님은 이 비유를 진리에 대입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하나님은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멈추겠다고 하셨다. 예레미야 5장에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의인 한 사람만 찾으면 이 땅을 향한 심판을 멈추겠다고 하셨다. 하나님 앞에 있는 의인 한 사람은 수의 개념을 뛰어넘어 주님의 가슴에 큰 기쁨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노아, 다니엘, 다윗 같은 의인이 99명이면 얼마나 기쁨이 크겠는가? 그러나 하늘나라의 주인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는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바로 ‘너’, 즉 ‘우리’가 안 보이면 의인 99명이 주는 기쁨으로도 그것을 채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사람을 숫자와 능력으로 계산하는 우리의 저주받은 가치관과는 전혀 다르다. 한 사람의 자리는 숫자로 메워 놓을 수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사랑이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바리새인들은 전혀 감동 없는 메마른 눈으로 주님을 쳐다본다. 이때 주님은 두 번째 비유를 말씀하신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눅 15:8)
당시에 여인에게 은전 열 닢은 갖기 쉬운 금액이 아니었다. 또 은전 열 닢은 결혼약조로 목걸이에 거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10개 중에 하나를 잃어버리면 찾을 때까지 방을 쓸고 찾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눅 15:9) 여인이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이웃을 불러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별 것 아니지만 잃어버렸던 여인에게는 엄청난 기쁨이었다.
주님은 곧바로 영적인 진리를 대입시키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이 말은 ‘너희가 그렇게 경멸하고 수에 치지도 않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구나.’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큰 감동이 없자 주님은 ‘돌아온 아들을 위한 잔치이야기’를 시작하신다. (2018년 4월)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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