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김명호 칼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복음

ⓒ 복음기도신문

로마서 1:16-17 절의 참 意味(1)

로마서 1:16-17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다. 복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갈 2:20절과 더불어 많은 분들이 암송하고 있는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 없이 또 생각을 했어도 꼼꼼히 성경을 보지 않고 그냥 진정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냈다 외웠던 말씀이 아니였나 생각이 된다. 헬라어 텍스트로 롬 1:16-17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헬라어 본문

16 οὐ γὰρ ἐπαισχύνομαι τὸ εὐαγγέλιον· δύναμις γὰρ Θεοῦ ἐστιν εἰς σωτηρίαν παντὶ τῷ πιστεύοντι, Ἰουδαίῳ τε πρῶτον καὶ Ἕλληνι. 17 δικαιοσύνη γὰρ Θεοῦ ἐν αὐτῷ ἀποκαλύπτεται 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Ὁ δὲ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 원문과 역본의 차이

원문과 역본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문구는, 어느 한 기업의 광고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사람들이(딤후 2:15)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명구인 것 같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될 로마서 1:16-17절도 번역 성경과 여러 차이가 있다.

우선, 한글 성경과 차이를 보면, 크게 다른 것이 있는데 문장이, 헬라어 문장은 긴 문장임을 알 수 있다. 한글은, 1-2, 3-4, 5-6, 7, 8, 9-10, 11-12, 13, 14, 15, 16, 17절 총 12문장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1-7, 8-15절이 한 문장이다. 그리고 16-17절이 한 문장이다. 그래서 17절까지가 단지 세 문장이다.

이런 차이를 보고 사람들은 놀란다.
이렇게 헬라어가 긴 문장으로 되어있느냐고?

첫 인사말도 특이하다. 바울 서신의 인사말은 거의 처음 아니면 다음 절에 짧게 오지만, 로마서는 1-6절까지 자신을 길게 소개하고 난 후에야 7절에 가서 인사말이 나온다. 마치 이사야 선지서를 닮은 듯, 왜 그럴까? 원문은 외관상 보기에 좀 특이하고 번역 성경과는 차이가 많다. 물론 내부로 들어갈수록 차이는 크고 많을 것이다.

2) 차이를 간파한 우치무라 간조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는 바울-루터를 이을 하나님의 사람이라 소개할 정도로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요 신학자로 정말 귀한 분이다.

그는 일본을 구원할 그 근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고 복음 전도의 근본은, 성경 연구에 있음을 깨닫고 평생 말씀을 연구하며 그의 심령 안에 불타는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생각들을 글로 남겼다.

그가 처음 책을 써서, 자기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이 책이 나왔으니 이제 죽어도 좋다. 후세에 반드시 너의 정신을 알아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삿포로 농림학교에서 자기에게 세례를 주고 당시 조선 감리교 감독으로 나가 있는 미국 선교사 헤리스(Harris)에게 자기가 쓴 책을 보냈는데 그가 읽고 나서, “너의 책은 너의 손에서 펜이 떨어진 후에도, 영원히 남을 것이다”고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그의 나이 서른 셋, 그 때 그는 성경책 안에 자신의 묘비명을 이렇게 써 두었다고 한다. 내겐 늘 읽어도 감동이다.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하여
일본은 세계를 위하여,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우치무라 간조, 주님을 만난 후, 오로지 두 J(제이)를 품고, 평생을, 순전한 그리스도의 생명의 교회를 열망하고 참 교회로 살아갔던 사람, Japan & Jesus 그는 민족주의자가 아니였다.

일본이 제국주의로 치닫는 20세기 초, 일본 교회가 역할을 다하지 못한 때, 일본이 아시아 평화에 이바지해야지 침략국으로 나가면 하나님이 일본에 불벼락을 내릴 것이다 선지자적인 소리를 외쳤고, 한국 목사들이 신사참배를 할 때, 천황숭배를 거부하고, 일본이 조선을 합병할 때 조선의 아픔을 마음으로 슬퍼하고, 그의 국적은 일본에 메여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갔다.

참 예수를 따름으로, 천황숭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자기 민족으로부터 버림 받고, 그 어는 누구보다 더 교회를 사랑했던 그가, 無교회주의자로 찍혀, 자기 일본 교회로부터 버림받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아픔과 고통속에서, 독일 시인 쉴러(Schiller)가 쓴 한 싯구가 그의 영혼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웠다.

Der starke ist machtigsten allein!
(용사는 혼자 있을 때 가장 강하다!)

머리로 접수한 하나님의 사랑을, 겨레로부터 버림받고, 교회로부터 버림받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처절한 삶속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며, 고난을 통해, 심령으로 깨달아 “야다”(yada, ידע 생명의 지식) 하여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후에 고백을 했다. “만일 사랑의 하나님이 계셔서, 용사를 한층 더 용감하게 하려 하신다면, 그에게서 사랑하는 사람(것)을 빼앗아버리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야다”하여 생명으로 안 후, 그가 일어났고 그의 영혼이 회복되었다. 이 때 일본 동경 대학으로 유학을 갔던, 우리 한국 지성들이, 말씀의 사람, 우찌무라 간조에게 말씀 연구를 통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

오산학교를 세웠던 남강 이승훈(1864-1930)을 비롯, 김교신(1901-1945), 함석헌(1901-1989), 송두용(1904 -1986) 등등 말이다.

우치무라 간조, 그 분이『로마서 연구』(1921)라는 주석 책을 썼다. 그의 책을 보면, 롬 1:16-17절을 강해하면서 문제의 제기, 1,2,3를 기록하였다.

그는 항상 원어성경을 보고 성경을 강해하였다. 예를 들어, 롬 1:1절을 원어 순서대로 적으면, 롬 1:16-17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항상 진본을 텍스토로 삼고 원어 순서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적어 내려갔다.

정말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르고 귀한 태도다. 왜냐하면 오리지널 텍스트의 그 진가를, 그 가치를, 그 맛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는데, 그는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이렇게 회상을 했다.

“그러나 몸에 안일 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영의 쾌락을 신학교에서 얻었다. 매일 아침 기도회, 고요한 도서관, 유명한 명 대가의 설교와 연설, 노련한 목사의 가르침은 내 사상을 발전시킴에 있어서 큰 힘이 되었다.

특히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는 성서 기자의 사상에 접하게 하여, 바로 모세와 면접하는 느낌을 주었으며 바울에게 직접 듣는 유쾌함을 맛보게 했다. 이런 감개와 쾌락은 내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고통의 대부분을 씻어주었다.

나는 생각하였다. 만일 신학교육에 범위를 여기에 국한시킨다면, 그 학생의 미치는 효과는 현재보다 ‘백배’나 더 할 것이라고!

아아,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성서연구는 일부분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신, 성서 역사, 교회사, 변증학, 성서신학, 실천신학, 조직신학, 성가학, 종교학, 설교학, 목회학 그 밖의 것은 기억하지 못한다. 구령술의 번잡함은 이루 말할 수도 없다.

아 신성한 신학교의 공기도 나를 죄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하였다. 두 겹 세 겹의 벽돌 벽도 악마의 침입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다. 아침 저녁의 기도회, 쉴새 없는 찬미 소리도 내 마음속에 악마의 힘을 소멸하기엔 아무 효력이 없음을 깨달았다. 습관은 사물의 효력을 없에 버린다. 좋은 약도 늘 쓰면 효력을 잃고 만다…”

그는 알고 있었다.
말씀의 사람들에겐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그는 이렇게 롬 1:16-17 강해를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의 싸움을 오래 싸운 노장 바울 사도의 용사의 붓에서 나온 한 단어 한 구절이 간결하며 힘과 생명이 풍부하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고린도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을 때 였기에(행 20:2-3), 만약에 로마 교회가 아닌 내노라한 신자들, 선비와 변론가- 철학자들이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 이 말씀을 했다면 여러 가지 비평이 날아왔을 것이다.

(1)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이런 바울 답지 않게 나약한 말을, 이미 주님이 가르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인잨(人子)도 천사와 함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를 부끄러워하리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않는 것은 신자라면 당연한 일이지, 세삼스레 이것을 이렇게 선언할 필요가 뭐 있는가? 허허- 나약하고 쓰잘데기없는 말을 선포하다니, 소극적으로가 아닌 적극적으로 나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써야지!

(2)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 능력에는 선한 능력도 있고 반대로 악한 능력도 있고 그런데, 그런 것이 복음이 될 수 있는가. 복음이 단지 이런 능력에 불과하다면 누가 그것이 복음이다고 저급한 가르침을 믿겠는가? 기독교는 헬라 철학 보다 훨씬 큰 틀을 가진, 사유의 사상 체계라고 말했다면, 특별한 경외와 관심을 보일텐데…

(3)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 – 아니 그런 표현 보다는, 복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났다고 해야 복음의 본 뜻이 확 나타나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진노인 공의를 연상케 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이 외에도 여러 비평들을 그가 논리있게 생각하면서 적어 놓았다. 그리고 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어떤 귀한 것이 있는 것 같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어리석은 것 같은) 말에 사로잡혀 끌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아마 그 잘난 인텔리겐챠인 고린도 사람들도 이러한 심리 상태에서 결코 그를 떠나지 못하고 귀를 귀울였을 것이다(고전 1:18-25).

그의 예리한 성경에 대한 통찰이 성경에 대한 나의 무지를 드러내는 아침이다! [복음기도신문]

김명호 | 헤브론선교대학교 성경언어대학 교수. 복음과 기도의 기초 위에 성경의 원어 연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완성을 위한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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