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호 / 복음이면 충분합니다-영원한 사랑의 복음(5)]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과 사랑은 가장 불가능한 운명 속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주님은 끊어지지 않는 사랑, 영원히 함께 하시는 사랑이 되시기 위해 우리를 친구 삼으셨다(요 15:13~14). 주님의 이 사랑은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고, 물로도 불로도 끌 수 없다. 주님은 이 사랑으로 교회를 초대하셨다.
영원히 함께 하시는 사랑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다. 무엇보다 사랑의 속성(屬性)을 가장 많이 닮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먹고 산다. 사랑 못 받는 사람은 불행하다. 천하의 모든 것을 가지고도 사랑받지 못하면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이다. 반대로 이 땅에서 죽도록 사랑할,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대상을 만난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사랑의 능력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 못할 사람은 없다. 존재적으로 사랑할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사랑의 에너지는 더 구할 바가 못 된다. 문제는 사랑의 에너지의 방향이 바뀐 데 있다.
아담의 저주는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자아 사랑’으로 대체(代替)했다. ‘자아 사랑’은 참으로 끔찍하다. 망할 짓인 줄 뻔히 알아도 자기를 향한 사랑은 쇠하지도, 지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정말 무서운 저주다. 사탄에게 붙들려 한 평생 병든 자아의 탐욕을 따라 존재적으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 짓을 하며 ‘내’가 주인 되어 살아 온 인류는 스스로의 종교적 노력이나 선행으로는 이 무서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거저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발적이며 기쁘신 뜻대로 부어주신 은혜의 사랑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은혜의 사랑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포기하시지 않는다면 소망은 있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겔 16:6) 구원을 부르짖을만한 아무런 근거도 이유도 갖지 못한 버려진 사생아 같았던 우리에게, 창녀 고멜까지도 끝까지 품으셨던 지독하고, 운명적이며, 무서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모든 소망이 끝나갈 무렵, 돌이킬 기회라고는 단 일 분도 남지 않았던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의 우편 강도에게 남아 있었던 것은 가쁜 숨소리뿐이었다. 바로 그 때 오직 한 가닥 은혜를 의지했던 그가 힘을 다해 외마디 비명처럼 외친 말은 ‘나를 기억하소서’였다.
‘나를 기억하소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동서남북 어디에 흩어져 있을지라도, 망할 이유가 쌓였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그 어떤 영혼도 ‘끝났다’고 말해선 안 된다! (2017년 5월) <계속> [복음기도신문]
김용의 선교사
(순회선교사. LOG미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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