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벌거벗은 영광을 경험하고 열방으로 나아갑니다.”“裸の栄光を経験して国々へ進み出ます.”

K국으로 떠나는 김국남 목사

열방의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거룩한 사역에 동역할 일꾼을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나 그분과 동역하기 위해서는 우리 수준의 성실과 열정과 헌신과 성결로는 불가능하다.

내 안의 모든 선하고 아름답다고 여긴 것들이 십자가 앞에서 시들고 빛이 바래고 벌거벗겨진 이후에 비로소 그분과의 아름다운 동역이 시작된다.

이 비밀한 믿음의 여정을 통해 이제 열방으로 본격적인 발걸음을 옮기는 김국남 목사와 노미영 사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언제부터 신앙생활을 하게 되셨나요?
“전라남도 완도가 고향이에요. 믿지 않는 집안에서 10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죠. 그때 미국 선교사님이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초콜릿이나 우유를 나눠주시며 전도를 하셨어요. 선교사님이 제 친구 집에서 거주하셨는데, 그 친구에게 전도를 받아서 교회를 가게 되었죠.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어요.”

– 첫 예배 당시를 기억하세요?
“정말 인상적이었죠. 제가 살던 곳에서 10리 떨어진 이웃 동네의 마을회관에 임시로 세워진 교회였어요. 한 집사님이 파송되어 설교를 했는데,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 이야기였어요. 그 얘기를 얼마나 재밌게 하시는지 말씀이 가슴에 꽂혀버렸죠.”

– 어린 마음에도 감동이 컸나 보군요.
“그런데 바로 교회에 출석할 수는 없었어요. 동네 청년들이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았죠.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진 교회를 다니지 못했어요.” 이런 것을 보면 요즘 무슬림권이나 힌두권 등의 나라에서 개종한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완력으로 신앙생활을 못하게 하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동네 청년들의 방해로 교회 출석 못해

– 그러면 어떤 계기로 다시 교회를 나가게되셨나요?
“고 2때 지리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제군들,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뜬금없이 한 마디를 하셨죠. 그 말이 제 마음에 다시 불꽃을 일으킨거죠. 그래서 10리를 걸어서 교회를 다시 찾아 갔어요. 그런데 아무도 들어오라는 사람이 없어서 밖에서 서성거리다 그냥 돌아오기를 7주 동안 반복했죠.”

–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8주차 되던 주일날 예배당 문틈으로 보는데, 목사님이 나오시려고 여시는 문에 부딪혀 넘어졌어요. 그때 주일학교 교사 한 분이 저를 그분 집으로 데려가서 재워주면서 밤새 신앙지도를 해 주셨죠. 그날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했어요. 새벽시장 나가시는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서 캄캄한 어둠을 뚫고 다녔죠. 그때가 1973년이었어요.”

– 학창시절에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셨군요.
“제가 고3이었을 무렵 ‘엑스플로74’ 대회가 있었어요. 대회의 규모나 파장이 엄청났어요. 저도 그 무렵 강력한 성령체험을 하게됐죠. 그렇게 열심이었던 것 같아요. 여중이나 여고 할 것 없이 다른 학교에 가서 반마다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그랬죠. 교회 다니면서 성적이 떨어져서 집에서는 쫓겨났어요.

그래서 고3 때까지 목사님 사택에서 목사님과 같이 살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했는지… 주님이 하신거죠(웃음).”

– 목회자로의 부르심은 어떻게 확정하셨나요?
“엑스플로74 대회 마지막 날에 해외선교사로 서원을 했어요. 대회를 마치고 곧바로 기도원에 올라가서 일주일 금식하면서 진로를 놓고 기도했어요. 그때 신학대학으로갈 것에 대한 마음을 받은 거죠.”

고교시절 신앙생활하다 집에서 쫓겨나

– 목회를 시작하실 때 상황을 조금 들려주세요.
“고등학교 시절 목사님과 함께 지내면서 목사님을 통해 많은 은혜를 누렸어요. 그래서 목회자의 삶을 동경하게 됐죠. 신학교와 전도사 시절을 보낸 이후에 처음에는 서울에서 목회를 할 생각이었어요. 그때 만났던 한 목사님의 삶에 도전을 받고 경남 창원의 변두리에서 월세로 개척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죠. 그때가 1984년 12월이었어요.”

– 옆에서 바라보던 목회자의 삶과 실제로 살아내야 하는 삶에 차이점이 있었겠죠?
보통 기대와 현실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네. 개척하러 내려갈 때에는 꿈을 크게 가졌죠. 잘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아무도 안 오더라구요. 정말 어려웠어요. 공단 청년들이 교회의 주축이었는데, 경제적으로나 여러 여건에서 어려운 청년들이 머
물다 떠나가곤 했죠.

그러다 월세를 내지못해 건물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도 있었어요. 추운 겨울날 묘지에서 예배를 드리기도했어요.”

– 인내를 요하는 시간들이었을 것 같은데요.
“그랬던 것 같아요. 열심과 열정으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돌아보면 그 성실과 열심이 나의 의를 쌓았던 일이었어요. 10년 정도 사역했을 무렵, 한계가 왔어요. 저는 제 열심만 자랑했고, 교회의 어려움에 대한 책임은 모두 아내에게 떠넘겼죠. 그러면서 점점 어려워졌죠.”

–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이었나요?
“일종의 전환점이 있긴 했었어요. 주님께서 새롭게 개척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어요. 저희에게는 새로운 기회였죠. 그러나 건물만 갖추면 사람을 보내주실거라는 잘못된 기대로 빚을 내서 건물을 지었죠. 완전히 본질이 빗나간 목회를 추구하게 된 거죠.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온갖 세미나를 다녔어요.

중년에 접어들면서 자리를 잡고 안정되고 싶은 욕심과 나의 야망이 있었던 거죠. 숨어있는 나의 옛사람을 추구하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던 거에요. 그러면서 목마름이 극에 달했던 거죠. 영혼을 메말라가고 아내와는 정말 많이 다퉜어요. 모든 게 막히고 어려웠죠.“

– 어려움 가운데 주님이 깊이 만나 주신 거군요.
“십자가 복음 앞에서 너무 부끄러운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을 계속해서 갖게 되었어요. 저는 더 이상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목사가 아니라, 부담을 주는 목사였고, 자기 의를 힘써 추구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저는 굉장히 된 줄 알았거든요. ‘법 없이도 살 사람’, ‘성결하고 성실한 목사’ 이런 자기 인식이 저의 가장 큰 자아를 추구하는 죄였음을 알게 되었어요.”

– 말씀을 들으면서 죄에 대한 깨달음이 은혜를 깊이 누리는 첫 걸음이라는 마음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네. 저는 생각으로 짓는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생각은 자유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리고 인생을 윤리와 도덕으로 살아왔던 거죠. 죄의 열매가 맺힐 기회가 별로 없었던 거에요. 그러면서 저의 열심과 성실함을 자랑했어요. 선한 자아를 계속해서 드러냈던 거죠. 주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기 자랑이 되어버리니까요.

나의 열심은 바닥이 나고 그러나 저의 실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안의 모든 음란하고 더러운 생각들로 가득찬 ‘죄인’이었어요. 그런 죄인인 저를 참아 주시고 받아주신 십자가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를 깊이 알게 되는 과정이 있었죠. 벌거벗은 영광이었고,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되었죠.”

– 혹시 제일 깨닫기 힘들었던 죄가 있으셨다면 어떤 부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목회자의 우월감. 이것이 제일 깨닫기 어렵고 깨어지기 어려웠던 부분인 것 같아요. 이 부분은 한 선교단체의 6개월간 진행되는 훈련학교를 통해서 깨닫게 된 부분이에요. 주님이 맡겨주신 직분을 신분제도처럼 여기고 내 자신의 목회적 위치를 견고히 쌓아가는 죄악된 모습이 있었던 거죠.

주님께서 6개월 과정을 통해서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하늘의 권속이며 겸손히 서로 조건 없이 섬기고 섬김을 받아야 할 지체임을 깨닫는 자리까지 훈련을 시켜주셨어요.”

– 이제 선교지로 나가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 과정을 통해서 드디어 선교지로 나아가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거죠. 마태복음 4장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그 지역 백성에게 빛이 비치었다’는 말씀을 통해서 선교는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가서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어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내 안에 빛 되신 주님이 빛으로 드러나실 것을 믿어요. 그리고 이사야 62장 6-7절에 여호와로 쉬지 못하시게 하는 기도의 삶으로 그 땅을 섬길 말씀을 받았어요.”

– 선교지로 나갈 준비를 하시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는지.
“3월 1일이 출발이에요. 짐을 싸면서 ‘우리는 나그네구나. 순례자구나… 이 짐도 결국 다 버리고 주고 와야 할 것들이구나. 영원한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 섬기게 될 나라에 대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그 지역의 나라들이 점점 선교의 문을 닫고 종교법을 강화해서 선교사들을 추방시키고 있어요. 교회 등록이 너무 어려운 지역이죠. 복음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그 지역의 한 나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오직 생명을 낳는 복음과 기도의 증인들이 많이 일어나도록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 그 외 기도제목이 더 있으시면 나눠주세요.
“먼저는 가족을 향한 부담감이 있어요. 동족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처럼 가족들을 남겨두고 열방으로 나가는 것이 부담인 건 사실이에요. 주님께 의탁하고 나아가는 거죠. 특히 자녀들이 복음으로 온전히 세워지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경남 의령군에 있는 작은 교회를 섬겨 왔어요. 이제 목회자가 없는 가운데서도 세 가정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든든히 서 가도록, 그리고 그곳에 열방기도센터가 세워지기를 함께 기대하고 있어요.”

J.Sre 5 1 인터뷰

K国へ派遣されるキム・クンナム牧師

すべての国々の失った魂を救う尊い使役に、共に働く人々を立たせてくださる神様のご計画は驚くほどだ。しかし、神様と共に働くためには私たちレベルの真面目さと情熱、献身では不可能だ。

私の中のすべての善と美しいと思うことが十字架の前ではしおれて、裸になった後やがて神様との美しい働きが始まる。

この密かな信仰の歩みを通じてすべての国々へ向けて本格的に働く場所を移したキム・クンナム牧師とノ・ミヨンさんに会って話を聞いて見た。

– いつから信仰生活を始めました?

“全羅南道のワンドが故郷です。クリスチャンの家庭ではない家で10人兄弟の長男として生まれました。その当時アメリカの宣教師が町のあらゆる所を歩き回りながらチョコレートと牛乳を配りながら伝道をしていました。その宣教師は私の友人の家で泊まっていましたが、その友人に伝道されて教会に行くことになりました。それが小学校4先生の時でした。”

– 当初の礼拝を覚えていますか?

“とても印象的でした。そこは私が住んでいる所から10里離れたとある町のセンターで臨時に建てられた教会でした。ある執事(教会の役員)が派遣されて説教しましたが、ルカによる福音書19章のザアカイの話でした。その話をとても面白くしてくださったので胸に刻まれました。”

– まだ幼かったのに大きな感動を受けたようですね。

“しかし、すぐには教会に行けませんでした。町の青年たちが教会に行けないように妨げられました。そのために高校2年生まで教会に行けませんでした。”このようなことを見れば、最近のイスラム教徒やヒンドゥー教などの国で改宗した家族や村の人々に腕力で信仰生活を防止することと大きく違うところないという気がします。

 町の青年たちの妨げにより教会出席ができず

– その後、どんなきっかけで教会に行くようになりましたか。

“高校2年生時、地理先生が授業時間に“皆さん、イエス様を信じてください。”と予想もしていなかった一言でした。その言葉に再び私の心に火が燃え上がりました。そして10里を歩いて教会に行きました。しかし、誰も私にお入りくださいと声をかけてくれる人がいなくて外でうろついてはそのまま家に帰ってくることを7週間続けました。”

– その後どうなりましたか?

“8週目になる主日、隙間から礼拝堂に覗き見をしていましたが、牧師先生が出ようと門を開いた時その門にぶつかって倒れました。その時ある教学学校の先生が私を自分の家に招いて、泊まるようにして、一晩中信仰の指導をしてくださいました。その時から朝の早天祈り会が始まりました。早朝に市場に出かける母と共に家を出て、真っ暗な闇の中を通いました。その時が1973年でした。”

– 学生時代に情熱のある信仰生活を過ごしましたね。

“私が高校3年生の時、‘エクスプロ74’大会がありました。大会の規模と波長は凄かったです。私もその当時聖霊を体験しました。それだけ熱心でした。女子中や女子高校はもちろんのこと、他の学校へ行ってクラスごと回りながら伝導しました。あまりの熱心に成績は落ちる一方で、結局家からは追い出されました。

それで高校3年が終るまで牧師先生の私宅で牧師先生と一緒に生活しました。今考えて見れば、どうしてそこまでできたのか…主がなさいました(笑)。”

– 牧師としての召命はどのように確定されましたか?

“エクスプロ74大会最後の日に海外宣教師になりたいと神様に約束しました。大会が終わった後、直ちに祈祷院に上り、一週間断食お祈りで今後の進路について祈りました。その時進学大学に行くという心を与えられました。”

高校時代、熱心に信仰生活をしたことで家から追い出される

– 牧会を始めた時の状況を教えてください。

“高校の頃、牧師先生と共に過ごしながら牧師を通じて沢山の恵みをいただきました。それもあって、牧師の人生を憧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神学校を出て伝道師にとして働きを終えた後、最初はソウルで牧会をするつもりでした。その当時出会ったある牧師の人生にチャレンジを受け、慶南(キョンナム)昌原(チャンウォン)の郊外で毎月家賃を払いながら牧会を始めました。その時が1984年12月でした。”

– 側で見ていた牧会と実際やってみた牧会の人生に差があったと思いますが。

“期待と現実には差があるものですから。はい、開拓しようとした時には夢が大きかったです。うまくいくと思いました。しかし、一人も来なかったので本当に厳しかったです。公団青年たちが教会の中心であったが、経済的にも多くの条件から貧しい青年たちが泊まっていては去って行きました。

時には家賃を支払うことができず、建物から出る状況もありました。真冬の時に墓の前で礼拝を捧げた時もありました。”

– 忍耐を要する時間だったと思いますが。

“そうでした。熱心と情熱があればうまくいくと思いました。今振り返ってみると、その誠実と熱心が私の義を積んだことでした。 10年くらい働いた頃、限界にぶつかりました。自分の熱心だけが誇りであって、教会困難に対する責任はすべて妻に任せきりでした。そうしながらますます教会の働きは厳しかったです。”

– 具体的にどのような困難がありましたか?

“一種の転換点があったりしました。主が新たに開拓することができる道を開いてくださいました。私たちにとって新たなチャンスでした。しかし、建物さえあれば人々を満たしてくださるという誤った期待に借金をして物件を借りました。完全に本質から外れた牧会を追求す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教会をリバイバルさせようと色々な種類のセミナーに参加しました。

中年に入ってから落ち着きたい欲と野望があったのです。隠れていた私の古い姿を追求する偶像崇拝をしていました。そうしている内に渇きが極に達したのです。魂は渇いていき妻とはよく喧嘩しました。すべてが詰まって厳しかったです。”

– 困難の時に主が出会ってくださったのですね。

“十字架の福音の前で恥ずかしい自分を発見する時間を続けて持つようになりました。私は聖徒たちに恵みを与える牧師ではなく、負担を与える牧師であり、自分の義を追求していた人であることを悟りました。私は“法がなくても生ける人”、 “清くて誠実な牧師”であるという自己認識が私の自我を追求する罪であったことを知りました。”

– お話を聞いていると、御言葉を聞きながら罪を悟ることが恵みを深く味わう第一歩であることを新たに感じられます。

“はい。私は考えで犯す罪を真剣に受け止めなかったです。考えは自由だと思っていたからです。そして人生を倫理と道徳的に生きて来ました。罪の実を結ぶ機会があまりなかったです。そうしながら私の熱心と誠実さを誇りました。善の自我を続けて表しました。一見、主の話をしているようですが、結局自身の自慢になってしまいます。

私の熱心はすっかりなくなって、私の実状は頭からつま先まで提案のすべての淫乱で汚い思いでぎっしり埋まった‘罪人’でした。そんな罪人である私を我慢してくださり受け入れてくださった十字架の栄光がいかに大きいかを深く知ることになる過程がありました。裸の栄光であり、真の自由を味わえ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 悟るのが一番難しかった罪があったならどんな部分なのかお尋ねしてもよろしいですか?

“牧師としての優越感、これを悟ることが一番難しかったです。 ある宣教団体で6ヶ月間進行される訓練学校を通じて悟りました。主から任された職を身分制度のように感じて自分自身の牧会的位置を固めていこうとした罪の姿がありました。

主が6ヶ月の過程を通じてすべての聖徒は同じ天の権限の中にいて、お互い何の条件なしに仕えて仕える兄弟・姉妹であることを悟らせる時まで訓練させてくださいました。”

– これから宣教地に出かけるとお話を聞きました。

“色々な過程を通じていよいよ宣教地に出かける恵みをいただきました。マタイによる福音書4章に‘イエスがカファルナウムに行って住まれるとその地域民に光が映った’という御言葉を通じて宣教は何かをするのではなく、行って住むという事実を発見しました。

できることは何もないが、私の中に光となる主が光として照らされることを信じます。 そしてイザヤ書62章6-7節にて、主の沈黙を招いてはならない祈りの人生でその土地を仕える御言葉をいただきました。”

– 宣教地に出かける準備をしながらどんな気持ちになりましたか。

“3月1日が出発です。荷物を包みながら‘私たちは旅人だ。 巡礼者だ…この荷物も結局みな捨ててあげて来るものなのだ。 永遠なことのために永遠でないものを捨てる人生が本格的に始まったのだな’という気がしました。”

– 宣教地として出かける国について紹介をお願いします。

“その地域の国々がますます宣教の門を閉めて宗教法を強化して宣教師らを追放しています。 教会の登録がとても難しい地域です。福音の足を踏み入れられないようにするある国へ行きます。そこでただ生命を産む福音と祈りの証人がたくさん起きるように祈りをお願いしたいです。”

– その他にも祈り課題があれば話してください。

“まずは家族に対するプレッシャーがあります。同族に向けたパウロの心のように家族を残して国々に出るのが負担であることは事実です。主に委ねるほかありません。特に子供たちが福音で正しく立てられ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

私は慶南ウイリョングンにある小さな教会に仕えてきました。牧師がいない中でも、3家族が主に喜ばれる教会として堅く立って行くように、それから、そこに国々のため祈る祈りセンターが建てられることを期待しています。”

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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