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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인생을 주님 나라만 구하며 살고 싶어요”

골방의 기도 파수꾼 전미숙 목사(안산은총교회)

안산성시화운동본부는 2010년부터 2년간 안산지역의 성시화를 위해 기도24·365본부와 연합해 릴레이기도운동을 벌였다. 당시 각 교회가 한 주 동안 144시간을 릴레이로 열방을 위해 기도하는 ̒느헤미야52기도̓(이하 느헤미야기도)에 참여했다. 전미숙 목사도 안산성시화를 위해 이 기도에 동참했다가 기도운동이 끝난 지금까지도 7년째 느헤미야기도를 이어오고 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것을 소망하며 오늘도 홀로 기도의 골방을 지키는 전 목사를 만났다.

– 어떻게 느헤미야기도를 시작하게 되셨나요?

“안산성시화에서 기도운동이 진행될 당시 저는 안산 지역의 한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어요. 자연스럽게 느헤미야기도에 참여하게 됐죠. 안산 지역의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한 주 동안 기도의 분깃을 담당했는데 저는 화요 팀장으로 섬겼어요. 화요일에 진행되는 기도인도와 기도파수를 책임지는 직임이었죠. 이 기도를 하면서 처음 느헤미야기도정보 책을 봤어요. ‘이런 기도도 있구나.’ 저도 중보기도의 사명을 받고 기도를 해왔는데 이렇게 열방에 대한 정보를 보고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 중보기도 사명이 있으셨군요?

“남편이 목사였기 때문에 사모로 있을 때 중보기도의 사명을 받았어요. 그때는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선교사 얼굴을 주님이 보여주셨죠. 한 사람의 기도가 끝나면 또 다른 분을 보여주셨어요. 주님은 그렇게 좀 특별한 방법으로 중보기도의 사명을 주셨어요. 새벽기도도 한 시간을 일찍 나갔어요. 교회 성도들의 이름을 한 명씩 불러가며 기도했죠. 정작 제 기도는 하지도 못하면서요. 그렇게 기도하면 다 된 줄 알았는데 주님은 저를 오직 중보기도만 하는 존재로 만들어주셨어요.”

중보기도 사명을 받다

–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

“참 많은 과정이 있었네요. 제 인생 전부에 걸쳐 된 일이죠. 아무래도 제 어렸을 적 이야기부터 해야겠네요. 제가 처음 교회 갔을 때가 초등학교 2학년 때네요. 짝꿍이 어느 날 ‘너 교회 안가면 지옥 가. 내일 교회 올래?’라고 하는 말에 처음 교회를 나가게 됐어요. 그때 주님이 저를 택하신 것 같아요. 교회가 너무 좋았어요. 아버지는 제가 교회에 갔다 오기만 하면 때렸지만 주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커서 맞으면서도 교회를 다녔어요. 5학년 때는 방언도 받았죠.

하루는 학교 갈 때 버스비하라고 준 돈을 모아 40원짜리 성경책을 샀어요. 일 년에 30독은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아버지에게 들켜서 성경책이 불태워지기도 했어요. 그러면 돈을 모아 또 성경책을 사서 친구 집에 맡겨놓고 학교에서 내내 읽었어요. 너무 행복했어요. 이후 제가 성인이 되니 아버지도 저를 막지 못하셨죠. 감사하게도 나중엔 아버지도 구원받게 되셨어요.”

– 드라마 같은 얘기네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됐나요?

“교회에서 사역자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어요. 개척을 했는데 생활이 참 어려웠어요. 그때가 80년도니까 모두들 어려운 시절이었어요. 우리도 어렵게 쌀 한 되를 사서 쌀통에 부어놓으면 남편은 싹 털어서 성도들에게 줬죠. 하나님께는 최고지만 제게는 최악이었어요.

그러다 둘째 아들을 조산하게 되면서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할 상황이 됐어요.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제가 일을 하게 됐어요. 아이를 낳고 2주 후에 장롱을 팔아 리어커를 구해 계란 장사를 시작했어요. 아이들 봐줄 사람이 없으니 박스에 아이를 넣고 리어커에 싣고 다녔죠. 엄마들이 저를 긍휼하게 봐주었어요. 제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 계란을 사주곤 했어요.

그렇게 꾸준히 장사하다보니 돈을 많이 벌게 됐어요. 그러니 욕심이 생기더군요. 그때 교회를 지었어야 됐는데 노후대책으로 집을 지었어요. 나오는 세를 받아서 선교헌금을 한다는 명분도 있었지만 그게 화근이었어요.”

–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몇 년은 넓은 집에서 좋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세입자보호법이 바뀌고 세입자들이 한꺼번에 집을 빼달라고 하면서 돈을 해주지 못해 빚만 지고 말았어요. 얼마 후엔 아들이 교통사고가 났어요. 젊은 앤데 뼈가 붙지를 않고 각종 수술을 2년 동안 8번 했어요. 주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았죠. 주님이 저의 존재를 다루시려고 했던 거였어요. 저를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겠다던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수술실 앞에서 울면서 회개했어요. 그때 주님은 신학교로 저를 불러주셨죠. 그런데 주님은 그게 끝이 아니었나 봐요.”

– 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들이 회복된 후 남편은 교회 청년이 사역하던 선교지를 도우러 아들과 함께 나갔어요. 그런데 비자문제로 잠깐 한국에 들어온 사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주님은 계속 교회를 하라고 하시는데 제가 감당할 수 없어 3년을 방치했어요. 그러다 교회를 정리하고 병원사역을 하게 됐어요.

그때 주님이 이사야 56장 7절의 말씀을 주시면서 ‘너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마음을 주셨어요. 기도를 해도, 성경을 봐도 계속 그 마음을 주시는데 처음엔 순종할 수 없었어요. 남편하고 개척교회에서 사역하며 겪었던 고생이 떠올랐고, 조금씩 자리잡아가는 병원사역을 내려놓기가 아까웠죠. 그런데 주님이 내면의 음성으로 계속 말씀하셨어요. ‘깊은 곳에서 만나자, 네가 기도하면 내가 책임지겠다.’ 오직 기도만 하면서 매일 먹을 거 걱정, 집세 걱정하기가 싫었던 거죠.”

연속된 고난에 절망하다

– 그래서 결론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래도 어떡해요. 기도할 수 있는 곳을 달라고 기도했죠. 그렇게 허락해 주신 곳이 지금 은총교회에요. 그곳에서 본격적인 느헤미야기도가 시작됐어요. 초창기엔 안산성시화운동본부에서 진행하는 느헤미야기도에 참여하면서 우리 교회도 매월 첫 주에 기도를 했어요. 우리 교회가 기도하는 주가 아니면 다른 교회 기도시간에 참여했어요.

당시 저는 대부분의 밤과 새벽시간 기도에 참여한 것 같아요. 남편 있는 사람들은 밤에 기도를 못한다고들 했죠. 저는 남편도 없으니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었어요. 감사했어요. 그때는 느헤미야기도를 하러 오시는 집사님 한 분이 계셔서 한동안은 둘이서 밤새 기도를 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 기도는 2년만 하고 막을 내렸어요. 너무 힘드니까요. 저 같은 경우는 사명이니까 하지만 사실 교인들이 일주일 내내 연속으로 기도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 그리고 연속기도가 중단됐나요?
“아니요. 제가 그 기도를 이어가고 있어요. 우리 교회에서 느헤미야기도를 시작했을 때 안산지역의 목마른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 기도했어요.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왔어요. 그런데 3년 정도가 지나자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대여섯 명이 돌아가면서 기도할 수 있기는 했죠. 그러나 밤과 새벽 시간에는 저 혼자 기도를 해야 했어요. 낮에는 기도자들이 오니까 식사준비를 하고, 함께 기도하고, 밤에는 저 혼자 기도를 해야 하니까 일주일에 한 시간도 잠을 자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뇌경색이 와서 병원에 입원하게 됐어요. 또 무릎 꿇고 기도하다보니 물이 차서 관절염 수술을 하기도 했죠. 무릎 수술을 한다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기간에도 느헤미야기도하는 주간이 돌아오는 바람에 외출을 끊고 나와서 기도하고 병원으로 돌아가기도 했어요. 기도하는 것이 제 의무여서 순종했던 것이죠.”

▶ 동역자와 연합하여 기도하는 느헤미야52기도

– 어떻게 이렇게까지 기도를 할 수 있는지 놀랍네요. 지금도 안주무시고 기도하시나요?

“아니요. 뇌경색이 온 이후로는 세 시간은 자요. 주님이 지혜를 주셔서 한 시간 분량의 기도를 어느 정도 일찍 끝내고, 쉬는 시간을 주지 않고 기도하면 기도의 분깃을 모두 채우면서 세 시간 정도는 잘 수 있게 되더군요. 혼자서 기도하니까 시간 조절이 가능했어요. 물론 여럿이 기도하면 더 자기도 하죠.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는 얘기를 열방기도센터파트너쉽 모임에서 나눴어요. 그랬더니 혼자 기도하시는 분들이 많은 위로와 은혜를 받으시더군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잠을 자도록 만들었으니 난 잠을 잔다. 그래도 난 내 분량을 다 한다. 기도를 안 하는 것 보다 낫지 않냐?’ 그렇게 주님은 이 자리를 지키게 해주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저를 달아보신 것 같아요. ‘이렇게 사람이 없어도 기도할 수 있겠니? 사람이 많을 때는 할 수 있었지만 지금 너 혼자여도 할 수 있겠니?’ 2년 동안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응답을 드리고 난 이후, 지금은 감사하게도 함께 기도하는 동역자들을 몇 명 붙여주셨어요. 그래서 함께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와 예배, 전도 등을 이어가고 있어요.”

하루 세 시간 자며 기도하다

– 전도는 어떻게 진행하세요?

“매주 토요일마다 안산역에 가서 외국인 이주민을 대상으로 전도했어요. 네팔에서 선교하다가 오신 선교사님과 연합해서 이주민들에게 전도도 하고 주변을 돌면서 기도도 했어요. 또 일주일에 한 번은 한 선교단체 중동지부와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위한 기도모임을 가진 이후에 하고, 아는 목사님들과 함께 복음기도신문과 전도지를 들고 교회를 중심으로 전도를 나가기도 했어요.

지금은 아들네 손주를 돌보고 있어서 안산역 전도는 쉬고 대신 교회 앞 전도를 하고 있어요. 매주 금요일마다 하는데요, 1층에 있는 가게 사장님과 연합해서 해요. 사장님은 차를 끓여주고 저는 복음기도신문을 들고 전도하죠. 신문 한 장이지만 어떤 영혼이든지 구원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전해줘요.”

– 정말 기도하고 전도만 하면서 사시는군요. 어려운 점은 없으세요?

“사실 기도하면서 외로움과 싸우게 되요. 그래도 지금은 동역자들이 있으니 든든해요. 물론 많지는 않아요.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과 외부에서 오는 자매 한 명이 전부인데요. ‘둘이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감사하면서 기도하고 있어요. 외부에서 오는 자매는 2박 3일씩 와서 기도해요. 매주 화요일마다 열방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에도 오고요.

생각해보면 나는 기도할 수 없는 존재인데 주님이 감찰하시고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끌고 오신 것을 보면 앞으로도 인도하실 주님이 기대가 되요. 기도만 하는데도 주님이 죽이시지도, 굶기시지도 않으시고 이 자리에 서있게 하시니 감사뿐이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겠어요. 주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면서 작은 씨앗을 심듯 제 남은 삶엔 기도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아요.”

▶ 느헤미야52기도에 참여 한 손주들과 함께

– 앞으로의 계획과 기도제목을 말씀해주세요.

“지금 돌보고 있는 손주를 곧 캐나다에 데려다줄 계획이에요. 아들네가 캐나다에서 사역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본격적으로 우리 교회에서 24시간 365일 기도하는 열방기도센터를 시작하려고 해요. 물론 처음부터 날마다 24시간씩 기도는 하지 못해도 7시간 정도는 기도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안산 지역의 갈급한 사람들이 와서 언제든 기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 처음에 서원한 대로 이곳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세워질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아들이 있는 캐나다에도 열방기도센터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주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모르지만 제 남은 인생에 이젠 주님 나라만 구하면서 살고 싶어요.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좋겠어요. 건강을 붙잡아주셔서 계속 기도의 능선을 구축할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마감 후 추가기사

복음기도신문 기획회의에서 176호에 게재된 전미숙 목사 인터뷰 담당자는 지면 한계로 전 목사의 삶이 채 소개되지 못한 내용이 많다고 했다. 이에 마감 이후, 만남&만남 코너의 웹용 기사로 인터뷰기사를 추가하기로 했다. 믿음의 걸음을 걷는 전 목사의 삶을 추가, 소개한다. <편집자>

– 기도하면서 일어난 에피소드가 있나요?

“느헤미야기도 본부에서 우리 교회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어요. 같이 기도도 할 겸 격려 차원에서요. 그런데 그때가 이른 아침이었는데, 교회 문도 잠겨있고 불도 꺼져있고 제가 전화까지 안 받으니 선교사님들이 여간 어려우셨던 게 아니었나봐요. 사실 손주가 방에서 자고 있어서 주방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때 오셨던 거죠. 새벽에는 기도하러 오는 사람도 없고 저 혼자 있다 보니 문을 잠가 놓곤 했죠. 근데 손주가 그날따라 일찍 깨서 우는 바람에 방에 갔다가 전화가 온 것을 발견하고 급히 선교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다행히 교회 앞에 계셨어요. 그렇게 교회로 들어와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 교회도 느헤미야기도 한다고 신청만 해놓고 하지 않는 교회구나.’라고 생각하셨대요.

낙담되고 속상해하던 차에 제가 전화를 걸었던 것이죠. 주방에 마련된 기도의 자리를 보시고 너무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기쁘게 몇 시간을 함께 기도하고 떠나셨어요. 근데 그것이 제게도 격려가 되었어요. 내가 기도하는 것을 아무도 몰라줘도 주님만 아시면 되겠구나. 더욱 믿음을 씨앗을 심어야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 그런데 이렇게 몸이 아픈데도 기도를 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나요?

“주님의 일하심이 너무 컸기 때문이에요. 마태복음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말씀처럼 세상의 모든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를 구했죠. 나머지는 주님이 더하신다고 하시니까요. 그러나 공격은 쉴 새 없이 찾아왔어요. 먼저는 재정적으로 힘들었어요. 함께 기도하는 집사님 가정마저 부도를 맞고 참 둘이 힘이 들었어요. ‘교회 한구석에서 부업이라도 해야하나.’ 생각했는데 주님이 그것도 허락 안하시고 오직 기도로만 돌파하게 하셨어요.

결과적으로 지금 보면 굶지도 않고 교회 임대료며, 먹을 것, 입을 것들을 주님이 모두 신실하게 공급해주셨어요. 그렇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보면서 주님이 우리 기도를 이렇게 응답하시는데 열방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들도 반드시 응답하시겠다는 믿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기도 응답이 없어도 더욱 믿음으로 열방을 위해 기도하게 됐어요.”

–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나요?

“당연히 있었죠. 함께 기도할 사람이 없을 땐 너무 힘들고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말씀을 펴놓고 기도를 하다보면 주님이 제 마음을 일으켜 주시는 거예요. 어느 날은 시편 123편 2절의 말씀을 주셨어요.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그러면 그 말씀이 제 마음을 일으키시죠.

‘그렇지. 주님만 바라보며 사는 거지. 오직 주인이 은혜를 베풀어주어야만 살 수 있는 종처럼 그렇게 주님만 바라 봐야 되는 거지.’ 요즘은 스가랴를 묵상하고 있는데 3장에서 더러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에게 주님은 그 옷을 벗기시고 정결한 관을 씌워주시죠. 그것을 보는데 사탄도 참소할만한 더러운 제게 주님이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니. 불에 그슬린 것 같은 쓸모없는 나를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시고 붙들고 계시구나. 그러면 힘들어 포기하려다가도 다시 해야지. 주님이 붙드신다면 할 수 있지. 그러면서 다시 도전하게 돼요.”<끝>[복음기도신문]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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