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베트남에 입국한 찰리, 에그롱 선교사 부부가 전쟁의 참화 가운데에서 복음의 통로가 된 과정과 베트남 주민들의 상황을 담고 있다.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는 베트남의 현대 선교사(史)를 이들의 회고록 ‘베트남에 사랑을 담아’(To vietnam with Love)의 내용으로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1960년대 초반, 베트남 정부는 미국의 원조로 수천의 가난하고 문맹의 베트남 인들을 중부 고원지대로 이주시켰다. 부족민들이 살고 있었음에도 불도저로 정글을 밀고 시장과 카톨릭 성당, 관공서 빌딩 그리고 이주민들을 위한 집을 지었다. 마을이 건설되고 나면 500에서 1000명의 사람들이 이주하게 되고 그들에게 한 뼘 씩의 땅을 주었다. 그 중 레탄 마을은 가장 서쪽에 있는 재개발 마을이었는데 나는 그 마을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을 도왔다. 나는 마을 촌장과 사귀게 되었다. 그는 훈장을 받은 베트남 대위 출신이었다.
1965년에 레탄 마을은 베트콩의 손에 들어갔다. 마을을 구하기 위해 베트남 방위군들이 각 곳에서 쁠레이꾸의 시내로 모였다. 하지만 베트콩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베트남 하사관은 ‘베트콩이 여기에 없다. 다시 차에 오르라.’고 명령했고 모두 되돌아갔다. 미군 고문의 짚차가 선두를 유지했고 나머지는 그 뒤를 따랐다. 하늘에서 화염과 연기가 나타나더니 박격포탄이 선두와 후미 차 위에 떨어졌다.
이어 매복하고 있던 베트콩들이 양동 작전을 전개하여 방위군을 공격했다. 무전병은 다급한 무전소리는 전투상황의 심각성을 알렸다. “들리는가? 구조 요청, 우리는 포위당했다. 다 죽을 것이다. 모두 죽었다.” 미군부대가 헬리콥터로 베트남 방위대를 구하려고 했으나 지상으로부터 37미리 집중 사격을 받았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이 레탄 마을 정착촌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죽어가는 상황 더 기다릴 수 없어
떤 목사는 그 와중에 마을을 빠져 나와 나를 만나려고 쁠레이꾸로 왔다. 며칠이 지나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레탄 마을로 돌아갔다. “목자로서 내가 있을 곳은 양들이 있는 곳이다.” 그를 위한 기도와 악수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며칠이 지나 떤 목사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길가에 던져진 그의 시신을 성도들이 발견해 묻어줬다고 했다. 나는 떤 목사의 죽음 소식에 화가 났으나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의 죽음이 의미 없는 비극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쁠레이꾸에서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아 아내와 에디, 수지를 다랏으로 보냈다.
라탄 전투에 베트남의 특공 부대와 공수 여단, 해병대가 구조에 나섰다. 곧 암벽 지대에 노출되어 베트콩의 박격포탄 세례를 받게 되었다. 해병 12명이 포탄 한방에 다 날아갔다. 공수부대들이 쁠레이꾸 공항 활주로에 속속 도착하면서 큰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가 지속되면서 베트남군 방위대 200명의 시신이 쁠레이꾸로 수송되었다.
가족들의 흐느낌과 애곡 소리가 시체를 태우는 디젤유 냄새와 함께 하늘을 채웠다. 곳곳에서 여자들이 남편, 아들, 형제, 아버지, 아저씨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죽었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아이고 불쌍한 인생아.” 끊이지 않는 절규와 통제할 수 없는 슬픔이 사람들의 가슴을 무너져 내리게 했다. 일부는 고통을 참지 못해 근처 호수로 몸을 날리기도 했다.
가족들은 쁠레이꾸로 돌아왔고 나는 빨리 언어가 능통해져 성경 번역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무고한 생명이 수없이 죽어가는 이 상황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감사하게도 쟈라이어 능력이 조금씩 향상되어 갔다.
1966년 10월 13일, 막내 조안나 엘리자베스가 태어났다. 두 아들과 두 딸이 우리 집의 반가운 새 식구가 되었다.
밤낮으로 총, 대포, 박격포, 헬리콥터, 비행기, 폭탄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때로는 ‘부부 바바바’하고 터지는 융단 폭격 소리도 들렸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나 자신도 계속 살아있을지 보장이 없었다. 그렇게 1967년이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땐 몇 달 후에 세계 역사를 뒤바꿔 놓을 사건이 발생할 것이란 사실을 짐작도 하지 못했다. <계속> [GNP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