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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중심의 강력한 반공세력, 한국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이끌어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도움으로 서울수복 이후 1950년 10월 27일 평양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을 둘러싼 논란의 진실(5)- 남북한 분단, 이승만 때문인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에서 남북한이 왜 통일하지 못했을까? 일부에서는 북한의 인구가 남한에 비해 적어서 인구비례로 총선을 해도 공산화되지 않았을 것으로 김구와 김규식은 생각했는데, 이에 대해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고집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밖에도 이승만이 남북 분단 고착화에 책임이 있다는 여러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해방 직후의 당시로 돌아가보자. 1945년 9월 남한에 진주한 미국이 처음부터 좌우합작을 시도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이 좌우합작을 시도한 것은 1946년 5월 신탁통치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미 국무부가 중심이 된 이후의 일이다. 나중에 폭로되었지만, 당시 미 국무부에서 동아시아정책을 좌우한 엘리트 고위 관료의 상당수는 소련의 첩자들이었다.

당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앨저 히스가 잘 알려져 있다. 세계 2차 대전 중 루스벨트 행정부에서 국무부 고위 관료였던 히스는 철저한 소련 스파이였다.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이 만남을 갖고 전후 세계 체제를 논의한 얄타 회담에서 한반도는 미·소가 38선을 기점으로 분할통치하도록 해 남북분단의 시발점이 됐다. 그때 미국 측 실무 담당자가 히스였다.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협상 복안을 미리 다 알고 협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히스는 유엔 체제를 구축할 때도 임시 사무총장을 맡았다. 그를 가장 아낀 국무부 상관이 6·25 이전 한반도를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의 장본인 딘 애치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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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월 위증죄로 법정에 선 앨저 히스.

이렇게 히스를 중심으로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있는 미 국무부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의 정치세력이 미국의 정책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억압하는 정책을 구사했다. 구체적으로 김규식,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를 육성하여 그들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의 과도정부가 들어서서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과 통일정부를 세울 것을 협상하게 할 방침을 세웠다. 그렇지만 미 국무부의 이러한 방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어디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 방침에 따라 좌우합작에 응한 동유럽의 모든 국가는 공산화됐다. 소수이지만 잘 조직된 공산주의 세력이 정부 권력의 일부를 합법적으로 장악하면 그들은 곧바로 그것을 기지로 삼아 체제 전체를 공산화로 이끄는 공작을 동유럽 여러 지역에서 성공시켰다.

당시 이승만은 그 같은 공산세력의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독립 촉성국민회는 회원 수가 거의 500만 명에 달하는, 당시 남한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이었다. 이승만은 그들을 향해 끊임없이 공산주의는 우리 민족을 멸망으로 이끌 악의 체제라고 주장하며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민회 회원들은 흔들림 없이 이승만을 지지했으며, 그런 이승만을 미국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반면 김규식, 여운형 등이 이끄는 좌우합작의 중도 노선은 그 지지 세력이 소수의 지식인에 불과했다. 그들은 공산세력의 압력을 받아 북한에서 추방되었거나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두려움을 느끼는 남한의 대다수 주민으로부터 소외됐다. 1947년에 들어 미국이 좌우합작 노선을 포기하자 그들은 곧바로 닭 쫓던 개와 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여운형(당시 중도좌파 성향의 근로인민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암살당해 미국이 이승만을 마지못해 지지하게 됐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1947년 7월에 발생한 여운형 암살사건은 당시 시대 흐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우발적 사건에 불과했다. 1947년 들어 미국은 드디어 전후 세계의 경영과 관련하여 소련과의 협조체제를 포기하고 소련을 봉쇄하는 냉전을 개시한다. 그와 더불어 한국문제 처리에서도 소련과의 협조, 곧 좌우합작 방침을 포기하게 됐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우여곡절을 통해 성립됐다. 만약 이승만이 중심이 된 강력한 반공산주의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1946년에 한국은 미국이 추구한 좌우합작 노선에 따라 공산주의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립의 실질적인 주역으로서 국부라고 할 수 있다. <자료제공: 월드뷰>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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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을 둘러싼 논란의 진실(4)- 무장독립운동의 허실과 독립운동가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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