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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흐름에서 한국의 독립을 전망한 지도자, 이승만

▲한국인들이 191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대회'에서 태극기와 한국 독립의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모습. 미국 군악대가 앞장서고 있는 모습을 미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승만을 둘러싼 논란의 진실(2)- 청년 이승만은 누구인가?

조선사회에서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됨에따라 그때까지 과거 급제를 준비하던 청년 이승만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다 그 이듬해인 1895년 영어라도 배울까 싶어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자유’라는 근세 서양에서 발원한 이념을 배우게 된다.

1897년 배재학당을 졸업할 때 그는 자신의 조국을 서양과 같은 자유인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자유 이념의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는 망해버린 나라가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와 독립 정신에 투철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며 그 위에 한국의 독립이 세계의 민주주의와 평화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국제사회에 호소해야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이는 그날 곧 우리에게 독립의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1908년 그가 예견한 미.일의 충돌은 33년 뒤인 1941년 현실로 드러났다.

이러한 이승만의 정신과 독립에 대한 관점을 당시 그와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다. 이승만이 독립운동가 사회에서 이같이 갈등과 논쟁이 있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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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한 이승만.

국내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당시 한반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안밖에는 볼 수 없었지만 이승만은 달랐다.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교 박사 논문에서 건국 이후 미국이 중립국으로 전쟁 중인 어느 쌍방과도 자유롭게 통상할 수 있는 권리를 국제공법으로 확보해가는 역사에 관한 내용을 다뤘다. 논문은 주제의 참신성이나 독창성 면에서도 매우 우수했다. 이승만의 박사학위 취득을 폄하하는 사람은 그의 논문을 정독하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그 이면에 깔린 역사적, 철학적 관점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이승만은 당시 영국, 독일 등 제국주의 열강의 팽창정책을 비판하면서 호혜 평등의 자유 통상을 추구한 미국이 장차 세계사를 주도할 것이며, 그러한 세계사의 흐름을 타고 한국의 독립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다. 또 실제의 역사도 그렇게 흘렀다.

한국의 독립은 제국주의적 팽창 을 추구한 일본이 미국과 충돌하고 그에 의해 파괴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20세기 전반 독립운동가 중에 이러한 역사적 비전을 가진 사람은 이승만뿐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1922년 워싱턴군축회담에서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외면하자 미국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한 소련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련과 중국의 도움으로 중국과 만주 일대에 군사적 기지를 마련한 다음 일본과 전쟁을 벌일 꿈을 꾸었다. 그들은 언젠가 미국과 일본이 충돌할 것이고, 그날에 우리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할 기회가 찾아오며, 그때까지 단결하여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이승만의 주장을 외세의존적 허무주의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3년간 벌어진 미 군정 하의 독립운동에서도 세계사의 흐름을 조망하는 이승만의 식견은 다른 지도자들과 달랐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초부터 폴란드 등 동 유럽에서 소련 공산체제가 저지른 만행을 보면서 해방된 조국이 그 악의 체제에 포섭되는 것을 극구 경계했다. 그가 1945~1948년 미 군정 기간에 벌인 독립운동은 결국 반공 투쟁이었다.

그렇지만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 당시의 유력한 정치지도자들이나 대다수 지식인들의 이념적 지향은 그렇게 분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공존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 잡혀 있었다.

결국 대한민국의 성립을 이끈 정치지도력은 거의 유일하게 이승만 개인에 의존했다. 그의 노선이 승리한 것은 그의 철학과 역사관이 다른 정치지도자와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가운데, 당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러한 이승만의 노선에 동의하고 그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이승만의 공과 과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완전히 망한 나라를 다시 세운 큰 공을 세웠다. 그런 측면에서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없었을 수도 있다. 만약 지금 민족.민중주의 역사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좌우합작의 어중간한 정부가 세워졌다면, 미국이 철수하고 공산체제로 전락하는 나라가 됐을 것은 명약관화하다. <자료제공: 월드뷰> [복음기도신문]

[관련 기사]

이승만을 둘러싼 논란의 진실(1) – 민족주의.민중주의 vs 자유민주주의 역사관으로 바라본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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