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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으로 평생 청렴했던 이승만, 매일 기도로 시작하고 마쳐

▲191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회의에 참여한 사람들. 왼쪽에서 세번째가 이승만.

이승만을 둘러싼 논란의 진실(1)
민족주의.민중주의 vs 자유민주주의 역사관으로 바라본 이승만

기독교 세계관 월간지 월드뷰 8월호는 ‘이승만의 건국전쟁’을 주제로 이영훈 교수(이승만학당 교장)를 통해 이승만을 둘러싼 여러 논란에 관해 전문가로서 자세하게 밝혔다. 이에 복음기도신문은 이 인터뷰 내용을 몇 회에 걸쳐 요약, 소개한다.<편집자>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지만, 근대적인 의미의 역사학 성립을 갖지 못했다. 근대적 역사학이란 역사적 사실을 있었던 그대로 개관적으로 파악하고 그 인과를 분석하는 방식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특정 정치적 이념에 매여 근대 역사를 자유롭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이념이란 우리나라에 뿌리 깊은 민족주의 내지 민중주의 역사관이다.

이 같은 역사관이 오랫동안 학자들에 의해 유포되면서 최근 ‘건국전쟁’을 통해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해 전국민적인 관심이 일어났지만 이에 대한 비판과 비방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민족.민중주의 역사관에 따르면, 1945년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이념 차이를 극복하고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정부를 세웠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이승만 등 친일파들이 미국을 등에 업고 남한 만의 단독정부를 세워 불행한 역사가 출발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승만에 관한 기존의 비판과 비방은 모두 이 역사관에서 나왔다.

이영훈 교수는 2004년 고등학교 한국근.현대사라는 교과서 논쟁을 계기로 민중.민족주의 역사관의 대안으로 자유민주주의 역사관을 모색하면서 이승만이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에 대해 제대로 알지못했다는 자성과 함께 그의 사상과 업적을 주목하게 됐다.

이승만은 그의 저서 <독립정신>을 통해 인간이 조물주로부터 누구도 빼앗길 수 없는 권리의 소지자로서 자유인으로 태어났으며, 그 자유인은 세계를 상대로 통상을 하는 자로, 자유 통상은 문명개화의 근본 동력이라고 파악했다.

이러한 사상은 근대 한국 역사에서 이승만에 의해 처음 조명됐다.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나 정치가이기 이전에 큰 사상가이자 문필가이다. 그의 사상과 철학은 서양 근대 계몽주의 철학이나 정치학에 정통할뿐 아니라 그것을 동양의 오래된 유교 문명과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평가했다.

하지만 민족연구소라는 좌파 민족주의 단체에서 제작해 유포한 ‘백년전쟁’에서 이승만을 방탕하고 타락한 인물로 묘사하고 주장했는데, 이는 악의에 찬 비방일뿐이다.

이승만의 일상생활은 종교인으로 매우 엄격했으며, 금욕적이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다음 평생 그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났다. 금전과 관련해서도 그는 청빈했다. 그가 1960년 대통령에서 내려온 이후 하와이로 휴양 차 떠날 때, 그는 완전히 빈털터리였다. 그가 정말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12년간 집권한 독재자였다면 그리 빈손이었을까. 그가 1934년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한 것은 마땅한 결혼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전 20년 이상의 독신생활에서 그는 어느 여자와도 염문을 뿌린 적이 없다.

또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의 외교고문으로 일본의 한국지배 정당성을 주장한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한 장인환과 전명운의 재판과 관련된 이승만에 대한 오해도 계획적인 모함의 결과다. 당시 이 사건재판에 대해 교민들로부터 통역을 부탁받은 이승만이 “나는 기독교인으로 살인자를 위해 통역할 수 없다.”라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주장은 김원용이라는 이승만 반대파가 지어낸 낭설이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승만은 하버드대학교에서 학업 중이었으며, 샌프란시스코로 달려갈 형편이 안되어 당장 가지 못했다. 대신 그는 두 사람을 위한 교민들의 모금 활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같은 해 7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의 재판은 장기간 중단돼 통역으로 도울 수 없는 상태였다.

당시 교민들의 회고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는 한 달 동안 이승만은 미국인 변호사에게 두 사람의 살인이 공의에 입각한 것을 설득력있게 전달했다. 이후 그해 연말 재개된 재판에서 두 사람이 사형을 면한 것은 이승만의 도움을 받은 변호사의 변론 덕분이다.

그럼에도 불구, 이승만이 두 사람의 재판을 외면했다는 비방이 반대파로부터 나온 것은 당시 교민 사회가 심하게 분열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자료제공: 월드뷰>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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