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이라 불린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에 관한 말씀으로 채워져 있다. 1-3절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위대한 일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4절에서 7절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정의는 성경 전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명확한 사랑의 정의다. 마지막 8-13절에서는 모든 위대한 은사들이 사라지더라도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고 항상 있을 것 중 최고라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은 확실히 사랑 장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이 아무런 문맥 없이 사랑을 논하는 장이 아니란 걸 알아야 한다. 12장에서 시작된 은사에 관한 가르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이 자기 뜻대로 나눠주신 은사, 교회의 각 지체를 돕고 섬기기 위해 주신 은사를 풍성히 누리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했고(고전 1:7), 특히 그들은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였다(고전 1:5).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 풍성한 은사를 가지고 질서 있게 서로를 돌보기는커녕 교회 가운데 분쟁을 일으키고 서로 자기 은사를 더욱 크게 사용하기 위해 투쟁했다(고전 12:25, 31). 귀해 보이는 은사를 가진 자는 자만심에 빠졌고, 약해 보이는 지체는 무시당했다(고전 12:23-25). 쉽게 말해 은사가 탁월한 슈퍼스타가 많았지만, 팀플레이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부족함 없이 은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교회를 위해 어떻게 은사를 활용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 장을 시작하기 직전 이렇게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 12:31). 한 마디로 “이제부터 내가 은사를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라는 말이다. 은사는 반드시 사랑과 함께 사용해야 한다.
은사 빼기 사랑은 nothing
1-3절까지 바울은 각각의 구절을 조건문으로 문장을 시작한다. “만일 내가…”(If I)로 시작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또한 가정이다(“사랑이 없으면”). 그리고 분명히 과장이 들어있다.
조건절에서 바울은 은사를 최대한 발휘한 장면을 과장해서 묘사한다. 당시 방언은 배우지 않은 외국 언어를 가리켰는데, 바울은 “천사의 말”까지 하게 될지라도…라고 과장했다. 당시 예언은 하나님의 비밀과 지식의 일부를 전달하는 말씀 선포였는데, 바울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이라고 과장했다. “믿음”에 대해서는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라고 했고, 구제와 섬김에 대해서도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라고 과장했다.
바울이 반복적으로 과장법을 사용한 이유는 조건절 뒤에 반복해서 강조되는 이 표현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그 유창하고 대단해 보이는 방언도 헛소리에 불과하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지식을 달달 꿰고 있어도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이 없으면 산을 옮기는 대단한 일을 믿음으로 행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가진 소유물과 몸뚱이를 다 내어줘도 아무 유익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은사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앞서 살펴본 대로 고린도 교회엔 “언변과 지식”에 관한 은사가 풍성했다. 그래서 서로 방언과 예언을 하기 위해 싸우느라 모일 때마다 무질서한 예배가 벌어졌다. 누가 더 유창한 방언을 구사할 것인가? 천상의 소리를 낼 것인가? 누가 설교의 능력을 보여줄 것인가? 강단에서 불을 내릴 것인가? 탁월하고 지혜로운 지식을 쏟아낼 것인가? 누가 엄청난 믿음을 보여줄 것인가? 이것이 그들이 가진 초미의 관심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아무리 대단한 방언, 심지어 천사의 말을 구사해도 사랑이 없으면 쓸데없는 소음에 불과하고, 아무리 대단한 비밀과 지식을 설파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은사 빼기 사랑은 낫 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가르침의 은사가 사랑 없이 사용될 수 있을까? 나중에 4-7절까지 사랑의 아름답고 명확한 정의를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잠시 대략적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것이 사랑 없이 가르침의 은사가 사용될 수 있는 맹점을 보여줄 것이다.
사랑 없는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4절)
먼저, 오래 참음과 온유함 없이 가르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가르침이다. 오래 참음과 온유는 굉장히 유사한 개념이다. 둘 다 절제와 관련된 덕목인데, 오래 참음은 어떤 대상에 대해 나의 육신의 반응을 억제하고 통제하는 것이라면, 온유는 그 대상에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권리를 내 이익을 위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 덕목에 있어 가장 본이 되는 분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은 욕을 받으셨을 때 욕으로 갚지 않으셨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가지고 있는 권세로 그들을 위협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모든 것을 맡기셨다(벧전 2:23).
강단에서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사적으로 무언가 가르칠 때,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우리는 쉽게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다. 가령 상대방이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길 때, 우리는 참지 못하고 육신 적인 분노로 반응할 수 있다. 신실하게 말씀을 전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리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될 것을, 우리는 그 먼지를 상대방 머리 위에 부어버리고 싶어 한다. 특별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상담할 때, 목사나 교사가 가진 권위를 합당하지 않은 사사로운 이유로 휘두르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때가 바로 우리의 가르침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는 때다.
우리는 진정 사랑하는 자의 영혼이 잘됨 같이 그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는 마음으로 가르치는가? 상대방의 반응과 상관없이 옛 자아의 욕구를 통제하고, 내세울 만한 권리를 하나님의 영광과 상대방의 선을 위해 절제하며 가르치는가?
사랑은…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4절)
당신의 가르침에 시기, 자랑, 교만이 들어있다면 그 은사가 활용되는 것에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사랑 없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여러 설교자가 있는 목회 현장에서 함께 하나님의 양을 먹이는 협력 목자가 되기보다 더 많은 양을 자기편으로 끌고 가기 위한 경쟁 관계가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더 많은 성도가 따르는 설교자를 시기하고, 누가 그를 칭찬하거나 그 사람의 설교에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우연이라도 듣게 되면 분노한다. 고린도 교회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가진 이들이 서로에게 품었던 마음이 바로 시기하는 마음이다.
설교 시간에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을 봤는가? 생각보다 적지 않은 사람이 말씀을 전하는 시간에 자기 자랑을 한다. 혹은 교회 자랑을 한다. 설교 영상을 보고 외부에서 많은 사람이 더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설교자는 자신의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설교한다. 고린도 교회가 그랬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자랑은 교만에 뿌리를 두고 자란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지만,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다. 자기 의를 내세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교묘하게 자기 자랑을 한다. 자기가 이룬 업적과 자기를 통해 은혜를 입은 사람들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성경을 일천 번 읽었다고 자랑하거나, 어마어마한 헌금을 한다고 자랑하거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다 들어주신다고 자랑하거나, 자신의 가르침을 따른 사람이 얼마나 잘 됐는지 자랑하거나, 내가 얼마나 헌신하고 봉사하고 기도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는지 말하기 바쁜 설교자의 가르침을 들을 때, 거기에 얼마나 사랑이 담겨 있는지 생각해보라. 사랑은 절대로 시기나 자랑이나 교만과 함께할 수 없다. 그런 설교는 사랑이 없는 설교로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주께 모든 것을 받은 종은 스스로 “무익한 종”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구하지 아니하며…(5절)
고린도 교회 성도 중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가진 이들은 그 은사를 무례하게 행했는데, 성도 전체의 유익보다는 자기의 유익을 추구했고, 그래서 무질서하게 은사를 사용했다. 방언을 사용할 때 통역이 없어 아무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데도, 자기 유익을 위해 유창한 방언을 구사하기 원했다. 그런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배는 아주 무질서한 혼돈의 도가니였을 것이다.
무례함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유익을 먼저 추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다른 사람을 충분히 배려한다면 그 사람에게 필요한 예의를 갖출 것이다. 은사는 그 성격상 자신이 아닌 다른 지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사랑 없는 가르침은 은사의 본성을 거스른다. 그래서 은사를 활용하는 동안(가르치는 동안) 듣는 이에게 무례하게 행하는데도 자기 유익을 추구하느라 그 폐해를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울리는 꽹과리처럼 유익이 없는 것이다.
교사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그 은사를 활용할 때 혹 무례히 행하지는 않는지 스스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공적인 설교 시간에 특정인의 범죄를 지적하거나, 청중이 모두 아는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고 설교를 하거나, 초청받은 교회에 가서 부탁받은 것과 상관 없이 그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가르침을 주거나, 공격적인 말투와 정제되지 않은 표현 등으로 충분히 불쾌감을 줄 수 있다. 그때 기억해야 한다. 사랑이 없는 무례한 가르침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5절)
고린도 교회 팽배했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분열의 문제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가장 먼저 이 문제를 다뤘는데, 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분당을 지었다(고전 1:12). 이러한 분열은 그들의 가르침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쾌감(성냄)이나 원한(악한 것을 생각). 이러한 악덕은 가르침 중에도 묻어 나왔을 것이다. 예언의 가르침을 마치고 나면 몇몇 사람이 들은 말씀을 가지고 분별하게 되어 있었다(고전 14:29). 바울이 지적한 분열의 문제가 심각했다면, 서로의 가르침을 분별할 때 큰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진리를 다루는 일은 예리한 칼을 다루는 일과 같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쪼개는 양날 검과 같이 진리는 날카롭다. 가르치는 사람이 사랑으로 말씀을 사용하면, 말씀은 영혼의 병든 부분을 도려내고 건강하게 만들어주지만, 분노와 원한으로 사용하면, 건강한 영혼을 해치고 병들게 할 수 있다. 깊은 상처를 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교회에서 다른 교회를 비난하거나, 원한이 있는 다른 교회를 조롱하기 위해 가르침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가령 나를 비판한 타 교회 목사의 가르침을 이단처럼 묘사하거나, 교회 안에서 일어난 잘못을 공적인 가르침 시간에 끄집어내어 분노를 표출할 수도 있다. 은사 주의 교회나 기독교 번영신학을 퍼뜨리는 사람의 예시를 들 때 주의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옳게 분변하는 건 마땅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반드시 그 분별을 사랑으로 전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같이 아무 것도 아니다.
정리
사랑이 없는 가르침은 아무런 유익도 의미도 없다. 특별히 사도 바울이 1-2절에 조건절로 설명한 방언(심지어 천사의 말까지 하는), 예언(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에 관한 가르침)에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거나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공적이나 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가르침이 정말 위에서 제시한 사랑의 덕목으로 채워져 있는지, 그 사랑으로 전달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6, 7절을 다루지 않았다.
성범죄를 일으키고 나서 회개도 하지 않고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여 말씀을 전하는 한 목사의 교회 성도에게 “당신은 그의 죄가 아무렇지도 않은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목사의 설교에서 나오는 능력을 보면 하나님이 여전히 그를 사용하신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바울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수사학에 뛰어나고 청중을 울고 웃게 하며 어쩌면 영적 교훈을 가슴에 콕콕 박아주는 달변가라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그 목사에게 사랑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는가? 6절에 나오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사랑의 특성 때문이다. 다음 기회에 계속 나누기 원한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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