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9)
날이 밝기 전에 행군이 시작되었는데 밝아오면 노상에서 아침을 먹고 구름이 끼어 흐린 날씨에는 계속 행군을 한다면서 가랑잎을 뜯어 온몸을 위장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볼 때 금속물체가 노출 되지 않게 위장을 하는 것이다.
도로 양쪽에 행렬을 갖추고 가는데 갑자기 앞으로 전달 “항공!”하며 신호를 보낸다. 도로변에 있던 모든 인민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 버린다. 그때 아군 폭격기가 저공비행을 하더니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냥 지나쳐 가는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온 몸을 풀잎으로 위장하면 공중에서 내려다봐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잠시 후 연대장 연락병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한다.
“조 동무, 나를 따라 오라요.”
연대장 앞에 섰는데 대검으로 포박된 칡넝굴을 잘라내더니 지금부터 자기 배낭을 지고 함께 행동하라고 명령한다.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됐으니 국군으로 보면 군속이다. 연대장의 관물을 지게 되었는데 연대장의 취침용 담요 몇 장과 작전지도 4권이었다. 국군 배낭보다 작전에 사용하는 데는 인민군 배낭이 오히려 편리하게 보였다. 국군배낭은 보기에 좋고 견고하다.
반면 인민군 배낭은 흡사 승려들이 등에 메고 다니는 두루막과 비슷하다. 쉽게 열고 쉽게 닫도록 되어있다. 어깨띠가 두루막의 잠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부터 결박이 풀리고 자연스럽게 연대장 멤버의 한 사람이 되었다. 여러 날 동안 행군은 지속됐다.
또 ‘항공!’ 소리가 전달되고 모두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나도 같이 행동을 취하는데 우리 대열 위를 지날 땐 저공으로 폭음을 내더니 약 100m 앞에서는 ‘꽝’ ‘꽝’ 폭탄 터지는 소리가 귓가를 흔들었다.
“모두 개울가로 내려가 바위틈에 숨어 몸을 피하라.”
연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회는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재빨리 개울가에 내려가 짊어지고 있던 배낭을 팽개치고 오던 길 쪽으로 뛰어가서 바위틈에 몸을 숨겼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해제!’하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모두 도로 위 제자리로 올라가는 것이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도망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바위틈에 숨어 도사리고 있었다. 저만큼 개울가에서 ‘조 동무 조 동무’를 외치며 내가 숨어 있는 쪽으로 몇 명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만일 제 정신으로 그들을 맞으면 도망가려 했던 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래 모르겠다. 잠든 척하자.’ 입에서 침을 흘리며 무조건 잠든 척하고 누워 있었다. 누군가 툭툭 쳤다.
“조 동무 여기 있었구만.”
나를 깨우면서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잠을 자고 있냐면서 해제되었으니 빨리 가자고 일으켜 세운다. 훗날 선배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명수배로 도피중인 범인이 쫓기다가 경찰에 체포돼 수갑이 채워지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내 마음이 바로 그랬다. 일단 체념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다시 행렬에 합류해 북쪽으로 행군을 하는데 조금 전 아군의 비행공습에 투하한 휘발유 탱크가 폭발하면서 여러 명의 인민군이 까맣게 타서 도상 주변에 죽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이 전쟁 중에 죽을 때는 반드시 엎드려 죽는다. 그들 역시 전부 엎드린 상태로 죽었다. 까맣게 탄 엉덩이가 하얗게 갈라져 있었다. 나는 애써 이 끔찍한 죽음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연대장이 내 곁을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면서 다친 데가 없느냐고 위로하더니 내일이면 자기와 헤어져야 한다고 했다. 포로수용소 간부에게 조 동무에 대해 좋게 당부할 것이니 모쪼록 공화국의 충성된 동무가 되길 바란다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나는 포로들의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의 가호를 빌었다.
그날 밤 마지막 야영을 숲속에서 하게 되었는데 연대장이 나를 또 부른다고 데리러 왔다. 연대장 막사에 불려갔더니 비스켓을 주면서 다음 날 사리원에 도착해서 국군포로들은 인계되는데 조 동무가 특별히 노래 솜씨가 있으니 잘 부탁할 것이라고 하면서 작별을 아쉬워했다. 나는 눈물어린 어조로 말했다.
“연대장님, 그동안 저를 사랑해주신 은혜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마지막 인사를 하고 막사를 빠져나왔다. 나는 연대장 경호팀 막사에 돌아와 누워 천막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을 보며 내일 닥쳐 올 운명이 어떻게 될지 공상에 빠져 들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하루하루가 천년 같은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날은 기약조차 할 수 없어 달빛에 흐르는 구름을 타고 내 마음을 전한다고 고백했다.
‘밤낮 사흘 길이면 당신 곁에 갈 수 있는데 달빛을 등불 삼아 당신의 안녕을 하나님께 빕니다. 부디 건강하소서’
사리원 형무소에 수감되다
1951년 4월말 경 인민군을 따라 사리원에 도착한 아군 포로들은 모두 형무소에 수감됐다. 형무소 담장은 감히 탈출할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높았다. 감방 1개에 10명 정도가 수감되었는데 포로들의 식사는 주먹밥에 콩나물국이 전부다. 포로들은 한 명씩 불려나가 소속부대명과 출생지, 출생연도 등의 조사를 받았다. 수감 중에는 아침저녁으로 점호를 받으며 삼엄한 감시를 받았다. 그리고 감방장 1명을 지명하여 엄격한 통제를 받도록 했다.
이곳은 일제 시대부터 형무소로 세워진 곳인데 6.25사변 이후 국군 포로수용소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검사가 끝나고 3일 되는 날부터 교육이 시작된다. 오전에는 김일성 수령에 대한 교육을 한다. 2교시는 김일성 수령을 신격화한 교육으로 출생 때부터 성장기까지의 행적과 인민공화국의 영도자가 되기까지의 역사를 기술하고 그 뜻을 받들어 충성을 다하자는 교육을 시킨다. 정신적 무장을 철저하게 만드는 교육인 것이다.
오후에는 1개월 동안 김일성 장군 노래를 배우는 시간이다. 모든 포로들에게 노랫말을 적은 종이를 나눠주고 인민군 병사가 노래를 가르친다. 10명씩 조를 편성해 노래 성적을 점검하는데 열심히 배우지 않을 수가 없다. 노래 성적이 부진한 팀에게는 그날 한 끼의 식사를 공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지도부에서 나를 호출했다. 내가 특별히 노래 솜씨가 있고 자질이 있다고 들었다면서 그동안 배운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한번 불러 보라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노래에 대해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고 살아왔다고 자부해온 나였기에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장백산 줄기줄기 빛나는 태양 … 그 이름도 빛나는 …”
노래가 끝나자 지도부 동무란 자가 말했다.
“동무 노래 솜씨가 원래 자질이 있구만, 좋았어.”
매우 만족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순간 인민군 연대장의 마지막 한 마디를 기억했다. 비록 적군의 지휘관이긴 했지만 고향 선배요, 향수에 젖은 인정이 결국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했다.
이튿날부터 나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 강사가 됐다. 노예가 노예들을 가르치는 꼴이 됐다. 나는 열심히 노래를 가르치며 매일 몇 시부터 몇 명을 연습시켰는지 일일보고 형식으로 보고서를 작성해 지도부에 제출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은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됐다.
어떻게 하면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 내가 집중할 건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높은 담장을 뛰어넘을 재주는 없어 보였다. 내 자리로 들 때면 불을 꺼야 한다. 지정 시간에 불을 끄지 않으면 순찰 동무로부터 재제를 당한다. 이곳에서도 밤에 실내 방송을 통해 ‘항공!’을 크게 외친다. 한국군이나 유엔군의 야간공습이 있기 때문에 포로들이 있는 방들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수용소 3일째 되는 날이다. 인민군 군관(장교) 동무가 독도법을 가르쳤다. 나는 신병으로 입대할 때도 위급한 전선장황 때문에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니 독도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국군인 내가 인민군에게 독도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참으로 오묘한 일이다. 별 흥미는 없었지만 배워서 손해 볼 건 없다는 생각에 열심히 받았다.
수용소에 들어온 지 15일째 되는 밤이었다. 교육일지를 지도부에 제출하려고 복도를 걸어가는데 ‘항공~’하는 실내 방송과 동시에 쾅쾅 벼락치는 폭음이 울리면서 하늘을 찌르는듯한 불길이 솟아오르더니 옆 건물에 불이 붙어 타오르는 것이 보였다. 불빛이 노출되어 유엔군 B29의 야간공습을 당한 것이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연병장(수용소 운동장)으로 뛰쳐 나왔다. 수용소 전체 건물이 화염에 쌓여 부상자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진짜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순간 머리속으로 ‘또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스쳤다.
수용소 정문 쪽으로 달음박질 쳐 보았더니 보초병조차 보이지 않았다. 비명 소리만 들렸다. 나는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수용소 뒷산으로 기어 올라보니 온 천지가 불바다였다. 높은 곳으로 무작정 올라갔다. 다시 높은 산이 보이면 오르고 또 올랐다. 얼마나 올라왔을까.
새벽이 되어 산을 내려다보니 산 아래 운해가 깔려 있을 뿐 인적은 찾아볼 수 없이 고요하다. 어디로 가야할까. 사방을 돌아봐도 방향을 알 수 없어 방황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니 차츰 운해가 사라졌다. 어젯밤 그 순간 나는 자유로이 복도를 거닐고 있었지만 국군 포로들은 밖에서 문을 잠가 혹시 변을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들었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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