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의 선교사 컬럼Ⅰ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1)
공생애를 시작하신 주님은 처음부터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을 받으셨다. 공생애 사역 초기의 일이다. 홀로 걸을 수 없는 중풍병자 한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왔다.
병자의 친구들은 사람이 많아 하는 수 없이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뚫고 그 병자를 달아 내렸다.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상황에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네 상을 들고 일어서 가라.” 그 병자는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전혀 소망 없는 자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고치셨다. 병만 고치신 것이 아니었다. 병만 고치셨더라면 인기가 오르고,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병자를 향해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다. 그곳 현장에는 트집거리를 찾고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있었다. 충돌이 일어났다.
영적인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신성모독죄’에 해당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는데, 주님이 이 주제를 건드리셨다. 주님은 이미 다가 올 일들을 알고 계셨다.
주님은 의식보다 본질을, 중심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형식과 의식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런 주님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은 그들에게 충격적이고 파격적이고 위협적이었다.
자기들이 생명처럼 생각하는 율법을 폐하고, 조상들의 전통을 무시하셨으니 그런 주님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 중풍병자가 침상에 매달려 내려오자 주님은 병을 고치시기도 전에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선언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마음이 굳게 닫혔다.
전통과 의식은 담을 수 없는 것
또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세리가 있었다. 마태였다. 이 당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로 매국노 취급을 당했다. 하늘에서 왔다더니, 거룩한 선지자라더니, 죄인을 제자로 부르셨으니 그들에겐 충격이었을 것이다.
보통 바리새인들은 죄인들과 한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그런데 주님은 죄인들과 함께 교제하고 식사하셨다. 자기들의 정서와 전통이 완전히 무시당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주님을 비난하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주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내가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며 그들의 비난에 대답하셨다.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금식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시빗거리가 되었다.
비난하던 그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혼인집 잔치에서 신랑과 함께 하는 친구들이 금식하겠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기는 그 날에는 금식을 하게 될 것이다.”
전통과 의식은 하나님의 나라를 담을 그릇이 못 된다. 전통을 폐하고, 먹기를 탐하며, 종교지도자들의 눈에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었던 예수님의 사역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예가 된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주님의 말씀과 사역은 율법과 의식의 폐지 요구가 아니었다.
율법을 꽉 짜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은 온데간데없이 자기 의를 내세우고, 영적 과시만 하던 종교지도자들이 생명과 본질 앞에 맞닥뜨리자 그들의 실체와 본색이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자기 의, 자기 사랑에 빠지면 위험하다. 누구보다 열심을 내고, 비록 말씀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 해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의 경건과 성경지식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비판이 되고, 외식의 위험에 놓이게 된다. ‘주여, 주여’ 부르짖으면서도 이런 태도가 가능하다.(2014.11 메시지 정리) <계속> [GNPNEWS]
<순회선교단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