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높이라 Prize Wisdom 잠 4:8

“이제는 제가 하늘나라 시민임을 알아요”

 나눔&나눔  삶의 나눔으로 되새겨 보는 하나님의 은혜

본향을 꿈꾸며 나그네를 섬기는 허엘레나 전도사

구소련에서 고려인으로 태어나 한국을 그리워했다. 정체성의 혼란으로 방황하다 출석하게 된 교회에서 우연하게 한국에 오게 된 허엘레나. 그리고 10여 년이 지나 그녀는 전도사가 되어, 러시아지역 출신 이주민을 섬기는 사역자로 탈바꿈했다.

한때 치과의사로 살아가다 이제 주의 종이 되어 한걸음 한걸음 걷고 있는 한 나그네의 인생 여정을 소개한다.<편집자>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고려인 4세로 구소련에서 태어났어요. 현재 우즈베키스탄 지역이죠. 누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항상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워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곳이니까요. 어린 시절은 우즈벡에서 지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지금의 러시아에 있는 의대로 진학하게 됐죠. 그런데 대학 입학 통지를 받고 곧바로 구소련이 붕괴 됐어요.

격동의 시기였죠. 각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는 바람에 졸지에 저의 국적은 제가 지내고 있던 러시아로, 부모님의 국적은 우즈벡으로 정해지게 됐어요. 공부를 계속 했어야 했기 때문에 러시아에 머물면서 공부하고 취업도 하게 됐어요. 그런데 7년 동안의 그곳 생활은 너무 힘들었어요.”

– 무엇이 힘들었나요?

“인종차별이었어요. 러시아, 그것도 제가 있던 노보시비리스크에는 동양인이 거의 없었어요. 전부 백인만 있는 것 같은 세상에서 어디를 가도 동양인은 저 혼자뿐이었어요. 대중교통을 타도 모두 저를 쳐다보면서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를 쳤죠. 그것도 매일이요.

얼마나 위축되고 외롭고 고통스러웠는지 몰라요. 어릴 때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고려인의 정체성이 무너지면서 내가 고려인으로 태어난 것이 정말 싫었어요. 그때부터 인생의 방황이 시작된 것 같아요.”

인종차별로 고려인의 정체성이 무너지고

– 참 어려운 시간을 보내셨군요.

“당시 아무런 소망이 없었어요. 그러다 우연하게 아는 언니를 통해 한국 선교사님이 세우신 교회에 가게 됐어요. 일단 교회에 가면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아 믿음도 없으면서 재미삼아 다녔어요. 덕분에 학교 공부도 무사히 마치게 됐고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국립병원에 취직도 하게 됐어요.”

– 전문 의료인으로 삶을 시작하셨군요.

“주어진 인생을 열심히 살면 크고 위대한 일이 저에게 일어날 것 같았어요.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의사 생활도 열심히 해서 치과 과장까지 이르게 됐죠. 그런데 제 안에 뭔가 부족하다는 마음이 지워지지 않았어요. 마음 한켠에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 늘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유는 알 수 없었죠.

노보시비리스크에서 그랬듯이 이곳에서도 교회에는 나갔지만 외롭고 심심해서 나갔던 교회에서는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가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한국에서 열리는 한때 소련 연방국을 일컫는 CIS(독립국가연합) 교회 리더 훈련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어요. 드디어 2000년도에 나의 조국, 한국 땅을 처음 밟게 된 것이죠.”

– 그 무렵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으셨나요?

“그때는 한국말을 전혀 못했어요. 모국에 왔지만 한국말을 모르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려인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이곳에서도 저는 한국 사람은 될 수 없었죠. 러시아에서도 이방인으로 살았는데 결국 한국에 와서도 저는 이방인이었던 거예요.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해졌어요. 그러던 차에 대회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평소에는 한심하다고 여겼던 신앙인들의 그 믿음이 대단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도 하나님에 대해 알고 믿음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죠. 그래서 유학을 결정하게 됐어요.”

– 한국에서의 유학생활은 어땠어요?

“하나님이 인도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시간의 연속이었어요. 한국에 올 때 가져온 재정은 항공권과 학비, 기숙사비와 식비를 제외하고 나니 거의 남지 않았어요. 아직도 한국에서 지내야하는 시간은 9개월이나 남았는데 앞이 캄캄했죠. 그 누구도 기댈만한 사람은 없었어요.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냐며 가족도 반대한 걸음이었으니까요. 오직 제가 붙들 수 있는 건 하나님 밖에는 없었어요. 절박하니까 새벽기도에 나가게 됐어요. 한국말 설교는 못 알아들으니 그저 기도만 할뿐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저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됐어요. 차비가 없어 걸어 다녔지만 마음 안에 기쁨이 사라지지 않았죠.

어느 날 주님께서 아르바이트를 허락해 주시면서 적은 재정이었지만 9개월을 은혜로 지내게 됐어요. 이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의학공부도 더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저에게는 기적과 같은 일이었죠. 점점 잘 풀려가는 듯 했는데 제 인생의 위기가 바로 그때 찾아왔어요.”

“하나님을 알고 싶어요”

–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할텐데요.

“원하던 공부도 하고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연구비와 생활비를 지원받아 재정적으로도 풍족했어요. 제가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지만 이상하게도 행복하지 않았어요. 열심히 살아서 모든 것을 이루면 제 삶이 바뀔 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기대했던 만큼 삶은 바뀌지 않았고 공허함이 밀려오면서 우울증을 앓게 됐어요.

삶의 소망이 없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을 것만 같았어요. 어느 날은 새벽기도 때 왜 내게 이런 일이 있느냐고 하나님께 따져 물었어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면 하나님을 보게 해달라고 매일 새벽마다 울며 기도했어요. 그런데 주님이 저를 만나주셨어요.”

– 주님이 더 원하고 기다리셨던 시간이겠지요.

“맞아요. 어느 날 갈급한 마음으로 한 집회에 참석했어요. 설교가 끝나고 마지막 순서로 성찬식을 하는데 주님이 그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님 손과 발에 못을 박은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얼마나 통곡을 했는지 몰라요.

그때에야 비로소 십자가 복음에 대한 진리를 알게 되었어요. 살인자인 나를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고자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 사랑이 마음속에서 솟구치면서 그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어두운 그림자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됐어요. 세상이 달라보였어요. 보는 것마다 아름답고 마음속에서 미워했던 원수들이 모두 사라졌죠.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주님을 더욱 알고 싶은 마음에 성경을 보기 시작했어요. 하나님을 알게 될수록 하나님께 내 삶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그러던 중에 이사야 61장 1절 말씀을 주셨어요.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라고 하시며 이 땅에 사는 외국인들을 섬길 마음을 주셨어요. 그런데 순종의 발걸음을 떼기까지는 또 과정이 필요했어요.”

116_5_1 2rd–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었겠군요.

“그때가 박사과정 2년차에 접어들 무렵이었어요. 만약 주님이 부르신 길을 간다면 공부는 포기해야 했죠. 포기하기 싫은 마음에 의사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요리조리 궁리해 봐도 주님은 단 하나의 마음만 주셨어요.

이 땅에 이주민을 위한 선교사로의 부르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하고 어떤 방법으로 섬길 수 있는지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아는 분으로부터 한 교회의 러시아어 예배의 인도자로 청빙을 받게 됐어요. 단지 새벽예배를 열심히 나간다는 이유에서였죠. 제가 무슨 예배 설교를 하겠어요. 감사함으로 받고 통역으로 섬기겠다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순종의 걸음을 걸었어요.

그러나 기쁨도 잠시 교회 지체와 지속적인 관계의 어려움으로 교회를 섬기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알고 보면 문화차이였는데 그때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지 못했죠. 서로 문화가 다르니 말하는 방식과 받아들이는 방식이 많이 달랐어요. 결국 오해가 쌓이고 둘 사이의 감정의 골은 깊어져만 갔죠. 마침내 교회를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함께 예배드렸던 몇 명의 지체가 저와 함께 나오게 됐어요. 그런데 그 일이 예상과는 다르게 저의 발길을 붙잡았어요.”

– 쉽지 않았던 시간이었겠군요.

“섬기던 교회 지체들을 두고 나오는 것도 주님께 책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지체들이 덩달아 나온다고 해서 교회에도 정말 죄송했어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함께 나온 지체들이 이제 우리끼리 예배를 드리자고 하는 것이었어요. 아니, 목회자도 없이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나 라는 생각에 한사코 마다했어요.

그런데 주님이 내 양을 치라는 말씀을 계속 생각나게 하시는 거예요. 어차피 이분들은 외국인 근로자들이니까 길어봤자 몇 개월만 예배를 드리면 되겠지 싶어 돌아오는 주일에 한 식당에서 첫 예배를 드렸어요. 그리고 예배가 거듭될수록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싶어 다른 여러 방법을 제시했지만 지체들은 꿈쩍도 안했죠. 결국 정착하지 않고 이 상태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신학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신학교에 진학했어요.

하나님이 한 장소를 허락하시더니 우연히 다른 러시아예배 모임과 연합하게 되면서 교회가 더 성장하게 됐죠. 교회가 더 커지는 것을 보면서 이제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의 완전한 인도하심이었어요.”

이주민들을 섬기다 교회를 개척하다

– 교회는 지금 어떤 모습인가요?

“저희 교회 성도들은 대부분 이주민 노동자들이에요. 제가 겪었던 것처럼 한국 문화에 어렵게 적응하기도 하고 말이 안 통하니 일방적으로 오해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이 대부분이에요. 그런 성도들을 만날 때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고 안식을 누리기를 기도했죠. 그런데 최근 교회에서 4박5일 동안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듣고 그 복음이 자신에게 실제가 될 수 있도록 훈련하는 시간을 가지게 됐어요.

“죽은 자리에서 십자가로 나아가는 회개”

이제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죠. 모두 십자가에서 자신들의 옛자아가 죽었다고 선포했으니까요. 그러나 제 예상은 빗나갔어요. 그 이후에도 여전히 옛자아로 반응하고 심지어 다투기까지 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보게 됐죠. 마음이 많이 상심이 되기도 했지만 달라진 한 가지 모습 때문에 소망이 됐어요.

성도들이 서로 옛자아의 모습이 드러날 때마다 진리를 말해주면 즉시 인정하고 자기가 죽은 십자가로 나아가 회개하는 거예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우리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여전히 우리는 소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어요.”

– 앞으로 계획과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제가 왜 고려인으로 태어났는지, 그것도 한국이 아니라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쓸 수밖에 없는 구소련에서 태어났는지 항상 궁금했어요. 그러나 이제는 알아요. 저는 러시아인도 한국인도 아닌 하늘나라 시민이라는 걸요. 하나님이 이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않도록 저를 러시아 고려인으로 태어나게 하셨죠. 그리고 이 땅에서 저와 같은 나그네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본향을 소개할 수 있도록 불러주셨어요.

저는 이 땅의 나그네들을 사랑하며 고통 받는 이주민들의 위로자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끝까지 순종하며 가고 싶어요. 이 땅의 이주민들이 모두 예수님을 만나서 본국으로 돌아갈 때 선교사로 파송되도록 기도해주세요.” [GNPNEWS]
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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