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1)
우리 국군은 1950년 12월경 함경북도 횡령에 입성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우리를 열렬히 환영했다. 부녀자들은 꽃다발을 준비해 장병들에게 걸어주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무렵 서부전선에서는 국군이 이미 압록강에 도착하여 이승만 대통령에게 선물할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우리 부대도 승전의 기쁨에 들떠 목전의 두만강 물을 수통에 담으리라 내심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후퇴명령이 하달됐다. 1.4후퇴였다. 두고두고 대한민국 역사의 비극을 불러 온 통한의 1.4후퇴가 시작됐다. 그날 장병들의 허탈감은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우리 군은 이튿날 밤 청진에 집결했다. 다음날 아침 연대장 한신 대령이 단상에 올랐다. 작업모를 깊게 눌러쓴 한신 대령은 위를 우러러보더니 지금부터 전군은 작전상 후퇴를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목적지는 흥남부두라고 밝히고 지금부터 죽는 것은 개죽음이며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조국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역설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것을 당부했다.
나는 중대장 연락병으로서 두 명의 군속과 함께 목숨을 걸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갈 묘안을 찾아야 했다. 당시 함경도 지방에 내린 눈은 무려 20~30cm나 됐다. 겨우내 눈이 얼어붙으면 이듬해 봄철이 돼야 녹는다고 들었다. 두 명의 군속을 데리고 나는 무조건 민가에 들어가 마구간에 메인 소를 주인의 허락도 없이 협박해 탈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 등에 눈썰매를 채우고 동상방지용 짚신(일명 살피)을 신겨 그 위에 무거운 군장을 싣고 무조건 흥남부두까지 달려야 했다. 우리 중대 일행은 1월 6일경 밤낮을 달려 드디어 목적지인 바람찬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그런데 중대원을 점검해 보니 더러 낙오자가 생겼다. 그러나 구출할 방법이 없었다.
흥남부두에는 이미 수만 명의 피난민들이 백사장을 가득 메웠고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가 까맣게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박격포 탄피를 태워 추운 몸들을 녹이는 거였다. 그렇게라도 해야 동상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봐도 당시 흥남부두의 뼈를 깎는 듯한 추위를 모두 어떻게 견뎌냈는지 기적 같은 일들이다.
해상에서는 아군의 군함들이 후퇴병력을 엄호하기 위해 계속 함포사격을 가하고 있었고 부두에는 거대한 LST(일명 아가리배)군함이 아군의 승선을 기디리고 있었다. 드디어 1월7일 부대별로 승선이 개시됐다.
수 만 명의 피난민과 한국군 그리고 유엔군이 승선하는데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아비규환의 장면이었다. 목숨을 걸고 승선하려는 피난민 중에는 아군의 군복을 입은 여성들도 꽤 눈에 띄었다. 신원을 물어보니 군인가족이란다. 언제부터 군인가족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도대체 LST군함의 승선 정원은 얼마나 될까. 나중에 알고 보니 무려 12만 명에 달한다고 했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이 6만여 명이고 피난민을 10만여 명으로 추정하면 최소한 4만 명은 배를 타지 못했을 것이다. 배 위는 꽃이 핀 것처럼 피난민으로 장식되었는데 그날 낮에 LST는 흥남두부를 출발해 이틀 후 강원도 묵호항에 안착했다.
묵호항에서 하선한 후에야 피난 과정 스토리를 듣게 됐다. 흥남부두에서 철수할 무렵 LST작전 권한은 당시 미군 군단장의 지휘권 아래 있었다. 이때 한국군과 유엔군만 승선을 허락했고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의 승선은 일체 불허한다는 명령이 당시 우리 군 수도사단장인 ‘김백일’ 장군에게 통보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 장군은 불복하고 수차례에 걸쳐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김백일’ 장군은 미 군단장과 마주앉은 자리에서 끝내 미군 측에서 피난민의 승선을 거부한다면 자신은 한국군과 피난민을 이끌고 육로로 후퇴하겠다고 비장한 결의를 피력했고 자신에게 별을 달아준 것은 오로지 선량한 우리 국민이라고 선포하며 돌아섰다는 것이다. 비로소 미 군단장은 김 장군의 손을 잡으며 그토록 국민을 사랑하는 장군의 의지에 감명을 받았다면서 마침내 피난민의 승선을 허락했다는 얘기였다.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국가와 민족을 지킨 그의 참다운 군인 정신에 가슴이 뭉클한데 며칠 전 배달 된 향군보기사(2011년 8월 1일)를 보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백성을 사랑했던 김백일 장군의 동상에 가해진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의 소행이 너무도 한심하고 개탄스럽다. 김백일 장군은 휴전 후 작고했다.
그리고 그의 동상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인천자유공원에 세워진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철거하려던 종북세력들이 김 장군의 동상에도 쇠사슬을 걸어 철거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분노할 일이다.
그는 당시 수도사단장으로 6.25 발발 이후 처음 38선을 돌파하고 최북단 회령까지 진격한 전쟁영웅이며 군신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명장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몹쓸 짓을 한 그들이 철거하려는 이유는 김 장군이 일군 육군소위였다는 것이다. 무지함이 나라를 무너뜨리는 안타까운 현실에 마음이 답답하다.
후퇴는 했지만 우리 부대는 재공격을 앞두고 묵호 해변의 뒷산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곳에서 입대 동기인 ‘강화출’ 하사를 만나 북진 중 함경도 명천 땅에서 ‘동영순’ 양으로부터 받은 손수건을 자랑하며 추억담을 들려줬다. 강 하사는 ‘조 하사, 전쟁 중에 여자가 준 손수건은 재수 없다’며 당장 없애버리라고 말했다. 순간 미련이 남았지만 부질없는 생각이라 정리하고 손수건을 그에게 건네주며 없애버리라고 했다.
그는 손수건을 받자마자 라이터 불을 붙여 태워버렸다. 불타는 손수건을 바라보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당시에 절박했을 모녀의 심정이 헤아려졌다. 아마도 영순은 나를 사랑했다기보다 하나뿐인 오빠를 구출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내가 필요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질없는 미련을 거기서 접었다. 구름처럼 날아간 일장춘몽이었다.
드디어 우리 부대의 2차 공격이 시작됐다. 1951년 1월이었다. 강릉 대관령 전투에 앞서 아군의 B29전폭기는 전진하는 우리 부대 앞 적진에 무섭게 포탄을 퍼부었다. 그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대관령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강릉시를 지나 주문진까지 진격했다. 아군은 양양 남대천 도하 작전시 약간의 적의 저항을 받았으나 곧 무장을 접수하고 바로 간성까지 입성했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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