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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양 칼럼] 기독교와 합리주의를 결합하려는 시도

사진: Anuja Tilj on unsplash

눈먼 기독교(34)

14-16세기의 르네상스, 17-18세기의 계몽주의, 19-21세기의 현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은 바로 이성의 절대화다. 수백 년 전 인간의 이성이 억압을 당하고, 전통의 구습(舊習)에 얽매여 있을 때, 먼저 예술에서 자유로운 사고가 시작됐고, 이후 종교와 사상에서 이성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모습이 자유롭게 추구돼 왔다. 그래서 지금은 이성이라는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무조건 배척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가 되었다. 비합리성과 비논리성은 곧 존재 가치가 부정되거나 존재 자체가 부인되고 있다. 그리고 그 부정과 부인의 첫째 순위 대상이 바로 기독교적 절대관이다. “이성의, 이성에 의한, 이성을 위한 종교”라고[1] 할 수 있는 합리주의는 절대 신과 진리를 신봉하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 다음의 글은 기독교를 왜곡시키는 주장이지만 이미 대중에게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선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현실 세계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 내는 세계 안의 건강한 합리성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그것마저 넘어서는 영속적 진리에 속할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잘못된 신앙이나 초자연주의를 강조하는 저급한 신비주의 혹은 저급한 영성은 걸러질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종교는 믿음이 아닌 ‘깨달음’을 요구한다고 하겠다. (중략) 물론 그 깨달음이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각’에 다름 아니다.[2]

하나님의 진리가 있다면, 현존하는 합리성과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하는 진리라는 말은, 엄격히 말해, 성경적 세계관이 아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이성과 충돌하는 사건과 인물이 줄기차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처녀의 몸에서 아기로 태어난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죄 없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죽어서 장사지낸 바 된 육체가 다시 살아난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잘못한 게 아무리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예수를 거부하면 지옥에 가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성부·성자·성령의 세 위격(位格)으로[3] 존재하면서 동시에 완전히 하나인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당연히 이 모든 것은 합리성과 철저하게 상충된다. 그래서 위 글의 저자는 기독교는 믿음이 아니라 깨달음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왜 이렇게 주장할까? 합리성의 잣대를 대보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되지 않는 요소가 너무 많기에 성경은 이해와 앎 이전에 믿음과 확신을 먼저 말한다. 물론 그 믿음 자체가 맹목적인 것이므로 거부해야 한다고 합리주의자들은 말한다. 성경에 진술된 비합리적인 것들을 믿는 것 대신 그 진술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진정한 종교적 깨달음은 언제나 ‘합리주의’(rationalism)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힘에 대한 설득의 승리’를 지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신앙의 시대는 곧 위대한 합리주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본질적인 합리성’(intrinsic reasonableness)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있지 않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해당한다. 종교적 통찰이라는 깨달음-혹은 깨달은 자의 삶-은 결국 옳고 타당하기 때문에 부드럽게 설득적으로 전체 인류사에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4]

지금 저자가 주장한 합리주의는 불완전한 존재 방식 그 자체다. 인간의 결핍과 부족을 포함한 가치관을 일컬어 그는 합리주의라고 말한다. 그는 자칭 기독교를 ‘안다’고 하지만 성경은 절대로 완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성경은 오류가 없는 책이 아니라 이런저런 오류가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오류를 수용하고 개선하는 것이 진정한 합리주의적 기독교라고 말한다. 성경의 오류를 말하면서 그것이 기독교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세속의 합리주의자와 손잡은 기독교 자유주의자의 케케묵은 수법이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화이트헤드[5]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오류란 보다 고등한 유기체의 징표이며, 상승적 진화를 촉진하는 교사이기도 하다. 오류는 우리가 진보를 위해서 치르는 대가인 것이다.” 과연 과정 신학의 대가다운 말이다. 절대적 진리와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화이트헤드는 진리란 것이 수많은 잘못을 고쳐가며 만들어져가는 과정이지 이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합리주의자들이 말하는 기독교란, 한 마디로, 성경에 나오는 비합리적이며 절대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합리적이고 불완전한 요소만을 수용한 기독교다. 당연히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다.


[1] 1863년 11월 9일, 미국 게티즈버그에서 링컨 대통령이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강조한 연설 문구 중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패러디한 표현이다. 이 유명한 문구는 사실 링컨과 동시대를 살면서 노예제 폐지 운동에 앞장섰던 테어도어 파커 목사의 연설집에 이미 실려 있던 것이었다.

[2] 미선, 『기독교 대전환』, 대장간, 149쪽

[3] 인격, person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존귀와 능력이 완전히 동등하다.

[4] 앞의 책 162-163쪽

[5]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서 대표적 무신론자인 버트런드 러셀과 평생 사제 겸 친구였으며, 아버지가 성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Park Sun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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