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모얌바를 다녀온 후,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말라리아라고 확신했다. 이곳에서는 열이 나면 열에 아홉은 말라리아다.
이곳 사람들은 감기처럼 말라리아를 앓는다. 현지 선교사님도 일 년에 두어 번 앓는다고 하니 ‘언젠가 나도 앓을 수 있겠구나.’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위험한 질병이라고 생각했지만, 수많은 말라리아 환자를 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위험은 하지만 약 먹고 며칠 앓고 나면 괜찮아지는 감기, 몸살 같은 병이 되었다.
해열제와 항생제 등의 상비약이 갖춰져 있으니까 약 잘 챙겨 먹고, 잘 먹고, 푹 쉬면 괜찮을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의 주변에는 말라리아에서 회복된 사람들이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보다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 설마 죽기야 하겠어? 라는 무대뽀 같은 믿음도 생겼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심각했다.
약을 먹어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40도를 오르내리는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뿐 아니라 영혼마저도 탈수증상이 나타났다.
비로소 나는 나의 무지를 회개했다. 무지했기에 말라리아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뇌까지 전이된 말라리아 바이러스 때문에 죽다 살았다는 현지 선교사님의 덤덤한 고백이 있기까지 어떤 고통의 무게를 감당하셨는지 체감되었다.
고열에 복통과 설사, 구토 증상까지 겹쳤다. 말라리아와 함께 장티푸스까지 같이 온 것이다. 열에 취해 정신이 희미해질 때면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정신이 잠깐 돌아올 때면 ‘유언을 남겨야 하나. 장례 절차는 어떻게 해야 하나. 코로나 시국에 한국으로 가지 못한 나의 시신은 이곳에 묻혀야 하는구나!’라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이런 생각마저도 고열과 온몸의 통증과 두통 앞에서는 사치였다.
모두가 잠든 밤. 상황은 더 심각했다. 정신이 가물거렸다.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지만, 곁에는 아무도 없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오롯이 하나님과 나. 둘뿐이었다. 내일을 보장받을 수 없는 밤.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아까울 게 뭐가 있을까, 나의 죽음은 순교가 될 수 있을까 싶다가도 이렇게 외롭게 죽는 게 억울해서 안 되요 라며 따지고 싶었고, 엉엉 소리 내 울고 싶었다.
하지만 온몸의 물기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은 탈수증상에 한마디 말도, 한 방울의 눈물도 용납되지 않았던 밤. 뼈가 부서지고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 속에서 나는 회개했다.
그동안 아픈 이들을 향한 나의 기도가 얼마나 형식적이었는지, 죽을 만큼 아픈 고통이 가르쳐 주었다. 그동안 큰 병 없이 건강하게 살아온 것에 대한 감사가 얼마나 얕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곳 사람들이 아프다고 했을 때, 그 아픔에 마음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 습관적으로 약을 주고 입에 발린 기도를 했다. 말라리아로 누군가가 죽었다고 했을 때, 안타까움보다 시에라리온에 태어난 그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사랑 없는 나의 강퍅함을 회개하고 또 회개하였다. 그리고 사과하고 싶었다. 말라리아의 고통을 호소했지만, 약 먹고 기도하면 괜찮아질 거라는 성의 없는 위로를 건넸던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다해 그들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고, 말라리아를 견뎌낸 이들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이 고통의 밤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혜의 순간이라는 것을.
만약 한국이었다면 시설 좋은 병원에서 실력 있는 의료진들에게 진료받고, 양질의 치료 약을 처방받고, 안락한 병실에 누워 많은 이들의 위로와 섬김을 받았겠지만, 대신 고통이 주는 유익, 심장을 도려낼 듯한 아픈 회개의 기도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롯이 100%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오갈 데 없고, 의지할 이 하나 없는 시에라리온으로 보내서 손가락 까딱할 수 없을 만큼의 육체적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의 회개를 받으시고, 나의 교만을 꺾으셨다.
“그러므로 야곱이 이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니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창세기 32:30~31)
언약을 받은 벧엘을 지나 언약을 붙잡고 씨름하는 브니엘을 통과하는 시간이었다.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절름발이로 만든 뒤 이스라엘로 삼아주셨듯이 하나님은 나의 환도뼈를 부러뜨리고 절름발이로 만들어서 예수라는 지팡이가 아니면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는 자가 되게 하셨다.
약해져야만 받을 수 있는 은혜. 약함도 은혜가 되게 하시는 은혜. 하나님이 얼마나 큰지 약해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높아지는 것만 할 줄 알았던 나의 탐욕. 내 생각. 나의 교만에 가리어졌던 하나님이 육체의 고통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져서 낮아질 대로 낮아진 그 고통의 밤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렇게 회개의 밤들을 보내고 보름이 지나서야 열은 잡히고 보름이 더 지난 후에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열이 빠져나가면서 그동안 나를 묶고 있는 것들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마치 디톡스를 한 것처럼 내 안의 독과 힘이 빠져나가고 십자가밖에 남은 게 없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의 어느 한 날, 그렇게 찾아오신 하나님이 선사하신 기적과도 같은 선물이었다. <계속>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작지만 피어있는 꽃들>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김봄 | 기록하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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