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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성공적인 기도의 단계(3) – 아버지 되심에 복종함

ⓒ pixabay

성경: 이사야 64:8; 마태복음 7:7-11; 누가복음 11:2-4; 히브리서 4:16

우리는 우리가 기도할 때 사용하는 말들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얼마나 자주 깊이 생각하는가? 오늘날 하나님에 관한 어떤 이름이나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구절이 ‘과연 아직까지도 의미를 담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든다면, 그 말은 이렇듯 아무렇게나 남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의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의 삶은 쉽고도 신속하게 그러한 관습에 빠지게 되는데, 그것은 날마다 동일한 단어와 구절들을 아무 의미도 없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혹은 그것을 누구에게 말하는 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암송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신 기도의 본보기는 그러한 횡설수설의 반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주님의 기도에 사용된 모든 단어들은 신중하고, 의도적이며, 그리고 영적인 의미로 채워져 있는데, 예수님이 주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름 역시 그렇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시옵소서’”(눅 11:2-4).

그 기도는 하나님의 부성을 언급하며 시작된다. 첫 번째 단어인 호칭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그에게로 나아가는 것은 그가 주권 군주, 의로운 재판장, 그리고 우리의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름다운 표현은 그의 보좌로의 무제한 접근(히 4:16)을 허락하신 은혜를 생각나게 하며, 그러한 사실은 마치 아들이나 딸이 사랑하는 아빠에게 나아가듯이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친밀한 관계가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담대함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우리의 말들이 어떠한 마법의 힘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떻게든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주실 의무가 있다는 뜻도 아니다; 그리고 분명히 우리의 믿음이 물질적인 보상을 받을 만하다는 것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은혜롭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에게로 초대하신다는 뜻이다.

아버지-자녀 관계의 친밀함이 있다고 해서, 그를 주권적인 하나님으로서 경외하는 공경심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러한 친밀함이 우리 자신을 격상시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지하는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궁극적으로 그가 우리의 주권자 하나님이요, 창조주, 재판관, 그리고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우리의 깊은 갈망을 충족케 하시는 분이 되신다. 만약 우리의 기도가 진실로 그를 예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진리에 대한 인식으로 채워져 있어야 할 것이다.

이사야 64:8의 기도를 예로 들어보자. “그러나 지금, 오 하나님,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요, 우리는 진흙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우리의 토기장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당신의 손의 작품이나이다.” 이것이 기도의 적절한 영이다: 주님, 당신이 우리를 지으셨나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나이다. 당신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실 수 있나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과 연합되었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의미로 우리는 당신의 자녀이며—당신의 뜻과 당신의 능력과 그리고 당신의 축복을 전적으로 의지하나이다.

이것은 보복적이고, 난폭하며, 질투하고, 불의하고, 어떠한 공로나 제단에 바쳐진 제물로 호전적인 신을 진정시키게 한다고 믿으며 사람이 만든 신에게로 나아오는 이방인의 기도와는 매우 다르다. 우리가 기도해야하는 내용의 성경적인 관점은 하나님 자신이 궁극적인 희생을 드리시고 그의 아들되신 인자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공로를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원자로 붙드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갈 3:26; 참조 요1:12-13; 고후 6:8).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그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일컬음을 받게 된 것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우리를 대신하여 드려지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최상의 것을 이미 받았다. “그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 아들을 주셨는데, 그 하나님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시리요?”(롬 8:32).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마 7:7-11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약속을 하신다:

구하라, 그러면 너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너에게 열릴 것이다. 혹시 너희 가운데에 아들이 빵을 구할 때에 그에게 돌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혹은 아들이 생선을 구할 때에 그가 아들에게 뱀을 주겠느냐? 만일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의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는 것을 알찐대,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에게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친밀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어린 아이가 이 세상의 아버지에게로 나아가는 동일한 부드러움과 신뢰로써,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가 있다.

우리는 담대하게 갈 수가 있다. 우리가 진정시킬 필요가 없는, 그러나 우리를 그의 것으로 품으시는 사랑하시는 신성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그의 참된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보내시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신 것이다”(갈 4:6). “아바”는 깊은 애정을 나타내는 단어이며 갈대아 방언으로부터 유래된 “아버지”란 뜻의 일상적인 단어이다. 그 말이 발음하기에 편리하므로, 오늘날의 영어에서 “대디” 혹은 “파파”를 사용하는 것처럼, 신약시대의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한 칭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아바”라고 부를 때 그것은 격의 없이 무신경한 끄덕임이거나 주제 넘은 친근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적절한 표현을 빌린다면, “아바”—“아버지”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뢰감으로 채워진 심오한 예배의 표현이다: “하나님, 내가 당신의 자녀인 것을 아나이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친밀한 접근을 허락하심을 아나이다. 당신이 절대적이고 무한한 자원을 가지시고, 또한 우리에게 최상을 베푸심을 아나이다.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순종해야 할 필요를 아나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시든지, 그것이 최상이라는 것도 아나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라는 진리 속에 포함되어있으며, 그것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를 시작하는가에 대해 가르쳐주신 방법이다.

뜻을 잘못 이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가 우리의 하늘 아버지에게 기도드릴 때에, 우리는 그에게 순종할 책임만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또한 우리에게 최상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주실 권리를 갖고 계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를 찬양하고 그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완전한 신뢰와 의존을 고백하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는 예배하는 자녀로서 그에게 나아온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의미가 예수님의 본보기 기도의 바로 첫 단어에 내포되어 있다. [복음기도신문]

존 맥아더 |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 담임

원문 : www.gty.org/blog/B120507/steps-to-successful-prayer-part-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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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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