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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당신의 신학을 점검하라: 1. 말씀의 절대 권위에 복종하는 신학

▲ 19세기 종교개혁자들. 사진 : TGC 제공

나는 2008년 교회가 오랜 시간 기도하고 계획한 바에 따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미국 LA에 있는 마스터스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주님은 수년 전 “내 양을 먹이라”고 나를 부르셨지만, 그 소명에 충성하기 위해 반드시 신학대학원을 가야만 했던 건 아니다. 베드로가 3년 동안 집중적으로 예수님께 제자 훈련 받은 것처럼, 바울이 가말리엘에게 집약적으로 배운 성경 지식이 회심 후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일에 유익이 됐던 것처럼, 바울이 디모데에게 충성된 사람들을 부탁하고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도록 훈련하라고 명한 것처럼, 이 일에 자기 삶을 헌신하기로 작정한 주님의 충성된 종들에게 다년 간 집중적으로 배우고 훈련받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였다. 무엇보다 교회가 한 마음으로 이를 지지했다.

마스터스 신학교에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 것은 교회의 추천사와 구원 간증문이었다. 교회가 지지하지 않으면 개인이 아무리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해도 받아주지 않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먼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을 참으로 알아가도록 지도하려는 학교의 바른 원칙에 수긍이 갔다. 심지어 학교에서는 아내가 남편과 다른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경우 화평을 이룬 후에 지원할 것을 요구했다. 성경에 기록된 장로의 자격에 준하는 기준에서 현저히 멀어진 학생은 여러 번 권면 후에 퇴학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학교의 분명한 목적은 학문적 훈련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으로 빚는 것이었다.

완벽한 교회가 없는 것처럼 완벽한 신학교도 없다. 하지만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않은 교회가 있는 것처럼 건강한 신학교와 건강하지 않은 신학교를 구분할 수는 있다. 건강하지 않은 교회가 너무 많아 차라리 교회 밖으로 나가는 것이 올바른 해답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건강하지 않은 신학교가 너무 많아 차라리 신학교 전체를 부정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다. 하나님이 주신 교사의 은사를 가지고 저술이나 강의 활동에 삶을 송두리째 바쳐 충성된 일꾼을 훈련하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의 삶과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모두 싸잡아 부정하지 않는 한. 우리는 기관, 학교, 단체, 교회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가르치는 신학을 가지고 그들을 평가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을 근거로 분별할 수 있을까? 이제부터 건강한 신학의 기준이 되는 항목이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혹시 신학을 배우기 원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것이 옳은 선택을 위한 하나의 검증 기준이 되기를 바란다.

1.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무오한 성경의 충분함을 토대로 삼는가?

구약과 신약의 구속사와 이어지는 교회사에서 일관성 있게 발견되는 부분은 하나님께서 말씀의 회복을 통해 자기 백성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 학자 에스라를 통해 율법을 풀어 설명하게 하셨고, 중세 시대 하나님이 교회를 회복하실 때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일으켜 세우셨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성공회의 형식적인 틀에 억눌린 교회를 개혁한, 작지만 강력한 부흥이 일어났는데, ‘기독교 형제단’으로 알려진 이들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의 충분한 능력을 신뢰하며 오직 하나님의 계시라는 최종 권위 앞에 굴복했다.

건강한 신학은 교리가 아니라 성경을 가르친다. 교리를 조직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사람이 정리한 이론이 아니라 성경에 권위를 두고 가르친다는 말이다. 교리가 성경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교리를 정립하는 권위가 되는 것이다. 예로, 수많은 신학이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이론인 고등비평을 필수 이론으로 수용하지만, 건강한 신학은 그것의 폐해를 경고하며 합당한 이유로 거부한다. 많은 신학이 진화론을 일부 혹은 전부 수용하지만, 건강한 신학은 창세기 1-3장의 역사적, 신학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기록된 말씀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마스터스 신학대학원의 총장인 존 맥아더 목사는 성경의 무오성과 충분성에 관한 시카고 조약에 서명한 유명인사 중 하나로 학교에서나 교회에서나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종종 이 날카롭고 예리한 기준에서 벗어난 교수를 해임하기도 했다. 건강한 신학교는 이처럼 가르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성경의 절대 권위 앞에 굴복해야 한다.

이안 머리는 “분열된 복음주의”에서 이와 같이 경고했다.

신학교가 온전한 성경무오설을 부인하기 시작하면, 신학 교육은 목회자의 신앙을 더 풍성하고 단단히 세우기보다는, 쓸데없는 짓이 되고 파괴적인 결과만 가져온다. 이런 교육은 신학생들을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는 확실한 것으로 무장시키는 대신, 교수들의 입을 통해 성경 학계의 최근 동향이나 알도록 만든다. 실제로 이런 이론들은 금방 구식이 되고, 항상 새로운 ‘시각’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신학 교수들은 이런 문제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아마도 이들이 보기엔 유행의 변화는 발전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며, 신학도 다른 학문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이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부흥과개혁사, 2009, 278-9pp)

‘복음주의’ 안에 있는 교회나 학교는 반드시 성경의 무오성과 충분성을 신뢰하고 성경의 최종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복음주의’의 이름을 가지고도 이 핵심 원리를 부정하거나 변경하는 이들이 정말 많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하거나 그 권위를 업신여기지 않는다. ‘새 이론’, ‘새 관점’ 등 다양한 이름의 해석법을 통해 결과적으로 성경에서 점점 멀어진다. 장로교 신학(개혁신학), 침례교 신학, 루터 신학 등 다양한 신학적 노선과 분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누구도 성경 본문의 역사적-문법적 의미를 자기 신학의 틀을 가지고 변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가 되어야 한다. 성경의 의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조, 신앙 고백, 교리, 믿는 바를 결정해야 한다. 머리가 말한 것처럼 오직 성경의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신학교는 목회자의 신앙을 더 풍성하고 단단히 세우고, 확신을 가진 설교자로 세우며, 견고한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시킬 수 있다.

한 가지 추가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의 무오성과 충분성을 신뢰하는 이들 가운데 유독 폐쇄적인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자기들이 보는 성경 번역본만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거나, 자기들의 성경 해석이 항상 옳고 다른 이들의 분별은 다 틀렸다고 말하는 이들이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만 오류가 없는 분별력을 주시고 순수한 성경의 지식을 허락하신다고 믿고, 자기들 밖에 있는 자들에겐 마치 성령의 은사가 조금도 주어지지 않거나 부족하고 변질된 해석을 허락하신 것처럼 취급한다. 자기들이 세운 교회는 성경의 순수한 교회고 그 밖의 교회는 다 변질된 교회라고 말한다(이단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포교 방식도 이와 같다). 나는 이렇게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관점을 가진 이들이 정말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인정하고 그 권위 앞에 굴복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성경이 아니라 자기의 신념이 성경의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 분별이 성경보다 높은 권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진리는 항상 사랑과 함께 전달되어야 하고 사랑은 언제나 교만하지 않다.

중세 시대 교부 어거스틴은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사랑을”이란 말을 했다. 이를 제대로 실천한 이들이 있었는데 앞서 소개한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기독교 형제단이었다. 그들은 성공회에서 한때 목사였거나 장로였거나 일반 성도였고 각자 영향을 받은 신학과 배운 교리도 달랐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회심을 경험한 거듭난 성도라는 사실 하나에 서로를 ‘형제’라 불렀다. 그리고 성경을 최종 권위에 두고 그 안에서 본질적인 것에서 하나가 되고, 비본질적인 것에서 자유를 누렸다. 그리고 세상에서 그들을 두드러지게 만든 특징은 ‘(아가페) 사랑’이었다.

바른 신학은 바로 이것을 지향한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든 참된 신학은 우리를 본질적인 것에서 하나 되게 한다. 그 힘은 우리가 성경의 절대 권위 앞에 굴복하고 말씀의 무오함과 충분함에 완전히 매료된 자들이라는 공통점에서 온다. 또한 참 신학은 우리를 비본질적인 것에서 자유롭게 한다. 누구도 ‘나만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특별히 비본질적인 영역에서 성경은 언제든 우리의 견해가 틀렸다는 것을 드러낼 권리가 있다. 나와 다른 분별을 가진 성도를 통해 하나님은 나의 관점을 바꾸시거나 혹은 더욱 견고하게 세우실 수 있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고 거부할만큼 교만한 신학은 어디서 배웠든 성경적인 신학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참 신학은 하나님과 성도에 대한 사랑을 증폭시킨다. 가지고 있는 신학적 지식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동시에 성도를 세워준다.

끝으로 자문해보라. 당신의 신학은 그것이 훈련 기관, 신학교, 교회, 책 등 무엇으로 구축되었든.

  1. 성경을 더욱 신뢰하고 그 권위를 존중하게 하는가?
  2. 오류가 없고 충분한 말씀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게 하는가?
  3. 본질에 있어서 하나 되게 하고, 비본질에 있어서 자유하게 하며, 무엇을 하든 하나님과 성도를 뜨겁게 사랑하게 하는가?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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