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이야기 (12)
데살로니가에서 뵈레아로 피신한 바울 일행이 그곳에서도 많은 영향력을 끼친다는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바울을 추적해 뵈레아까지 찾아갔다. 그들은 데살로니가에서 그랬던 것처럼 불량배를 동원해 뵈레아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결국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두고 바다로 피신했다.
이때 바울이 아테네를 가기 위해서 배를 탄 항구는 어디일까? 뵈레아는 바다에서 40킬로 떨어진 내륙의 도시이다. 뵈레아에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뜨리뽀따모스(τριπόταμος)라는 작은 강이 지금도 흐르고 있다. 성경은 “바다까지 가게 하되”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바울이 배를 탄 항구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은 도시 디온
바울 사도 당시, 디온은 빌립보 못지않은 로마의 직할 도시로 번영했다. 비록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의 지리적 위치와 상황을 고려하면 바울이 디온에서 배를 타고 갔을 가능성이 높다.
디온은 에그나티아 도로와 연결된 지선 위에 위치해 있었다. 에그나티아 도로는 일루리곤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이어지는 로마의 주요 도로로, 뵈레아 시내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이어졌다. 디온에서 비아 에그나티아 도로까지 연결된 지선은 디온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했다. 마케도니아왕국은 수도 펠라를 중심으로 뵈레아, 베르기나, 디온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비아 에그나티아 이전부터 도로를 사용했다.
디온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헬레니즘 문화와 생활이 깃든 중요한 도시였다. 이곳은 올림퍼스 산 아래 첫 번째 도시로, ‘디온(Dion)’이라는 이름 자체가 ‘제우스 의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올림퍼스 신화에 따르면, 신들의 왕 데오스(영어로는 제우스)가 올림퍼스 산에 보좌를 두고 있다고 전해진다.
많은 학자들은 알렉산더를 헬레니즘의 시조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더에게 이러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그의 부모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2세는 빌립보를 건설하고 이집트 암몬 신을 위한 신전으로 만들었다. 왜 마케도니아가 이집트의 주신인 암몬 신전을 만들었을까?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를 야만인이라고 무시하던 다른 도시국가들을 무시하기 위한 의도일까? 훗날 이 신전은 바실리카 A라는 불리는 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 왕후는 신기(神氣)가 많은 여인이었다. 그녀가 섬긴 신은 제우스 암몬 신이다.
제우스는 그리스의 주신이고 암몬은 이집트이 주신이다. 올림피아 왕후는 어린 아들인 알렉산더에게 자신의 생각을 주입했다. 올림피아 왕비는 제우스의 주 무기인 벼락이 자기 뱃속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은 남편의 아들이 아닌 제우스의 아들이라고 확신했다. 올림피아가 제우스에 관한 이야기를 어린 아들에게 자주 말하는 것을 빌립2세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이가 친구들과 어울릴 나이에 뵈레아에서 멀지 않은 미아자에 학교를 세우고 또래 아이들을 모아서 이 아이들을 교육시키게 된다. 알렉산더와 프톨레마이오스, 헤파이스티온 , 카산드로스 등 헬레니즘 제국을 세운 사람들이다. 아이들이 13세가 될 때에 아테네에서 도편 추방을 당한 아리스토텔레스를 이 학교의 선생으로 부르면서 학교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 아카데미아로 알려지게 된다.
기원전 5세기 말 마케도니아인들의 눈에 올림퍼스 산은 그리스신화의 고향답게 신기가 서려있다. 누구나 한번 보면 시퍼런 산의 정기가 신들의 이야기가 떠오르는 지역으로 여긴다. 이곳에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신전이 자리 잡은 것은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매년 9월에 제우스의 제사를 드렸다. 알렉산더 대왕도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봄에는 마케도니아 군대의 승리를 위한 9일간 제전이 벌어졌다.
특히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3세와의 전쟁에 앞서 디온의 제우스 신전에서 장엄한 제사를 드리고 출정을 선언했다. 이러한 알렉산더의 행동들은 어려서부터 주입된 어머니 올림피아의 영향이라고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어떻든 이러한 전통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중요한 군사 및 종교적 행사로 자리잡았다.
기원전 169년, 디온은 로마에게 함락되었고, 이후 로마의 옥타비안이 꼴로나스 줄리아 아구스타 디엔시스(Colonas Julia Augusta Diensis)라는 긴 이름인 로마의 해외 거주지로 조성된다. 디온은 바울 당시에 이 지역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경제적인 도시로 발전한다. 최전성기는 알렉산더를 롤 모델로 생각했던 로마의 황제들 시대에 경제 중심지로 번영했다. 특히 트라얀 ,히드리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같은 황체들의 통치하에서 최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지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디온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가, 1806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오늘날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디온의 중심에는 로마 도시 특유의 직선 도로인 켄트리코 드로모(κεντρικό δρόμο, main road)가 있었다. 도로 양옆으로는 목욕장, 음악당, 극장, 교회, 그리고 화려한 모자이크의 대저택들의 유적이 남아 있다.
바울에 대한 기록은 디온에서 찾을 수 없지만, 로마시민권자인 바울이 당시 로마의 직할 도시와 물류 중심지인 디온을 이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안전과 복음 전파를 위해 로마 군대와 물류 네트워크를 활용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측에 기반한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디온을 방문할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은 바울이다. 동족의 박해와 질투 속에서도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멈추지 않았다. 디온은 역사적으로 신화와 로마의 문화를 품고 있었지만, 바울의 열정과 믿음은 이곳에서도 여전히 느껴지는 곳이다. [복음기도신문]
김수길 선교사 | 총신 신학대학원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GMS 선교사로 27년간 그리스에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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