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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위로를 받으라, 작은 자여

사진: Alessandro Erbetta on Unsplash

세상 모든 어려움을 다 지고 간다는 생각을 한 적 있는가? 삶이 주는 책임과 의무,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잔혹한 현실이 주는 무게에 짓눌린 적 있는가? 

“세상의 무게”는 어쩌면 당신의 소명, 즉 당신이 인생에서 짊어지고 가야 하는 소명을 가리킬 수도 있다. 따라서 소명에 대한 압박감에 짓눌릴 수 있다. 하루의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사용 가능한 자원도 충분하지 않다. 저기 수평선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실패할 가능성은 엄연한 현실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가 있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무너질 거 같다고 느낄 수도 있다. 

“세상의 무게”는 가족이 짊어지고 가는 짐을 가리킬 수도 있다. 부모라면 자녀 양육, 그리고 자녀의 영혼을 형성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책임이 주는 막중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누구나 자녀가 잘되기를 바란다. 자녀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다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금 한계를 느낀다. 무엇보다 우리가 자녀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모든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할 수도 없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지도 않고 또 무오하지도 않다.

때로 “세상의 무게”는 단순히 존재와 현실이 주는 무거움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는 죽는 존재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는 죽음이 자명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우리 앞에는 내세가 놓여 있다.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며,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기쁨 또는 영원한 불행을 향해서, 그러니까 어느 한쪽을 향해서 지금도 하루하루 다가가고 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설교집 영광의 무게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실존의 부담을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탁월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누구나 장래에 만날 잠재적인 영광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 그러나 내 이웃이 미래에 만날 영광에 관해서 내 일처럼 자주 또는 깊이 생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내 이웃에게 주어질 영광의 짐 또는 무게가 내 등에 지워져야 한다. 이웃에게 주어질 영광은 너무도 크고 무겁기에 오로지 겸손한 자만이 지고 갈 수 있다. 교만한 자의 등은 결코 질 수 없는 짐이다. 바로 등이 부러질 것이다.(45)

겸손한 자만이 짊어질 수 있는 너무나 무거운 짐,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리가 직면한 직업의 짐, 가족의 짐, 실존의 짐을 짊어지는 데 꼭 필요한 겸손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까?

무겁고 커가는 짐

삶의 짐이 특히 무겁게 느껴질 때면, 나는 루이스의 소설 페렐란드라의 몇 문장을 떠올린다. 공상과학 소설에서 위안을 찾는 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루이스는 이야기 속에 진실과 위안을 동시에 심어주는 데 있어서 실로 대가이다. 

이 소설은 루이스의 ‘우주’ 3부작의 제2권으로, 영웅 엘윈 랜섬이 재난을 피하기 위해 페렐란드라 행성으로 여행을 떠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창세기 3장의 유혹 이야기를 변형한 것이다. 페렐란드라의 여왕은 악마의 힘에 사로잡힌 지상의 인간, 언맨에게 유혹을 받는다. 언맨은 여왕을 그리스도(소설에서는 말렐딜이라고 부름)에 대한 불순종으로 이끌고, 그녀의 상상력을 자극함으로 말렐딜의 법칙에 반역하도록 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끌어낸다. 

이 유혹 이야기에서 다른 점은 랜섬이라는 존재이다. 랜섬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참여자로서 페렐란드라에 있다. 그는 거침없는 제삼자이며, 언맨의 거짓말과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순수함과 의로움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며칠 동안 그는 언맨과 논쟁을 벌이고 진실을 무기로 그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반박하지만, 결과는 다시 진실이 왜곡되고 거짓(the Lie)이 섬김을 받는 현실이다. 거짓으로 인해 여왕의 상상력이 흐려지고 결심이 약해지는 것을 보면서 랜섬의 부담은 점점 더 커진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랜섬은 말렐딜을 만나고 새롭게 깨닫는다. 논쟁을 통해 언맨으로 하여금 순종으로 이끄는 대신 물리적 전투를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맨과 싸움으로써 악마가 소유했을 뿐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페렐란드라의 유일한 닻인 몸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위로를 받으라, 작은 자여’

페렐란드라의 미래에 대한 부담이 중년이 된 그의 어깨에 얹혀 있는 상태에서, 랜섬은 이에 굴복한다. 그는 언맨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히고 바다를 가로질러까지 그를 추격하지만, 두 사람은 파도에 휩쓸려 해안가 동굴에 던져진다. 결국 랜섬은 언맨을 죽이지만, 그건 실로 엄청난 환난을 겪고 난 이후이다. 전투로 인해서 그는 발꿈치에 부상을 입었고, 산 아래로까지 내려가야만 했고 또한 빛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 또 한 번의 길고 힘든 등반을 견뎌내야만 했다. 

여행을 마친 랜섬은 거대한 산자락에서 말렐딜을 섬기는 천사의 힘을 가진 두 명의 엘딜라와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 중에 화성을 지배하는 엘딜라인 말라칸드라는 랜섬에게 “세계가 오늘 탄생했다”고 알려준다. 여왕과 페렐란드라의 왕은 시험을 통과했다. 결과는 이것이다. “오늘 처음으로 저 아래 세계의 두 생물, 짐승처럼 숨을 쉬고 번식하는 말렐딜의 두 형상이 네 부모가 넘어진 그 계단을 올라서서 원래 앉아야 할 왕좌에 앉았다”(169).

이 말을 들은 랜섬은 땅에 쓰러진다. 그가 짊어진 무게가 너무 커서 그 짐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책임뿐만 아니라 분명히 성공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 그러니까 세상의 무게에 쓰러질 거 같은 바로 그때 천사의 힘을 가진 존재가 하는 말이 내게 위로가 되었다. 

“위로를 받으라.” 말라칸드라가 말했다. “네가 하는 일이 아니다. 당신은 위대하지 않지만 깊은 하늘이 놀랄 정도로 엄청난 일을 너는 막을 수 있었다. 작은 자여, 당신의 작음 속에서 위로를 받으라. 그는 당신에게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않는다. 그냥 받고 기뻐하라. 네 어깨가 이 세상을 다 짊어져야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말라. 바라보라! 세상은 당신의 머리 아래에 있고, 당신을 움직이고 있다”(169).

작음이 주는 큰 위로

바로 여기에 루이스가 제공하는 편안함의 역설이 있다. 한편으로 랜섬은 책임이 있다. 언맨과 싸워야 하는 부담은 오로지 그에게만 달려 있었다. 소명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후퇴하는 것은 순전히 그에 달렸다. 그럼에도 임무를 완수한 후, 바로 승리의 순간에 그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한다. “네가 하는 일이 아니다. … 그는 당신에게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제공하는 편안함은 작음의 편안함이다. 루이스는 그것을 랜섬에게만 아니라 독자에게도 제공한다. 랜섬은 위대하지 않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선물이므로, 마땅히 받고 기뻐해야 한다. 우리의 작음에 안식하며, 두려움에서 구출되어 우리 어깨가 세상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광의 무게에 꺾이지 않도록 하는 겸손이다. 

소망으로 짐을 지라 

작디작은 우리의 존재를 위로해 주는 사람은 루이스만이 아니다. 다윗 왕도 시편 131편에서 같은 위로를 제공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겸손하게 다윗은 세상의 무게를 감당하길 거부한다. 대신 그는 자신의 작음에서 위안을 받는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세상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젖 뗀 아이는 없다. 젖 뗀 아이는 엄마 품에 안겨서 만족한다. 아이는 또한 공로를 구하지도 않는다. 결코 과대망상 아래에서 바둥거리며 노력하지 않는다. 아이는 단순한 기쁨으로 자신의 작음을 포용한다. 

지도력, 가르침, 목회, 양육, 그리고 존재의 무게가 나를 짓누른다고 느낄 때, 나는 다윗처럼 내 영혼을 진정시키고 고요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나에게는 너무 수준 높은 고상한 생각 앞에서, 격렬한 열정과 감정의 이빨 속에서, 그리고 현실의 무게 아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작은 자여, 너의 작음 속에서 위로를 받으라. 그는 너에게서 아무런 공로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의 무게는 너의 것이 아니다. 이미 다른 누군가가, 피 묻은 그의 어깨로 그 짐을 짊어졌다. 오로지 그분만이 짊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골고다까지, 무덤 속으로, 그리고 스올에 이르기까지 그 짐을 지셨고 다시 부활의 빛으로 나가셨다. 겁먹지 마라, 작은 자여, 젖 뗀 아이와 같이, 그리고 주님을 영원히 소망하는 자 같이, 겸손하게 네게 주어진 짐을 져라. [복음기도신문]

조 리그니(Joe Rigney) | 조 리그니는 Bethlehem College & Seminary 의 학장이다. 지은 책으로는 ‘전투 이상: 정욕에서 벗어나 어떻게 승리와 자유 그리고 치료를 경험하는가(More Than a Battle: How to Experience Victory, Freedom, and Healing from Lust)’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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