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꼰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꼰대의 뜻은 “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이라고 하고, “꼰대스럽다”는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데가 있다”라는 뜻이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그래서 꼰대스러운 화법을 가리켜 “라떼 화법”이라고도 한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면서 자기 경험을 가지고 생각을 일반화 및 강요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꼰대를 싫어한다. 타인 공감은 떨어지고 자기주장만 강하기 때문이다. 이 사회도 꼰대를 혐오스러운 존재로 묘사한다. 십수 년 전만 해도 ‘그냥 성격이 좀 센 아저씨, 아줌마’ 정도의 평가를 받았던 이들이 지금은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회피대상 취급으로 받는다.
필자도 꼰대스러운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꼰대가 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다. 그 이유는 꼰대가 말하는 내용과 이를 전달하는 방식 때문이다. 먼저, 말의 내용에 있어서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은 각각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볼 때 올바른 원칙에 입각한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은 헌신적으로 주님을 섬기다가 교회에서 큰 상처를 받은 자기 경험을 일반화하여 그러니까 교회를 적당히 다니는 게 맞다고 주장할 수 있다. 똑같은 경험을 했지만, 교회는 거룩함을 이루어가는(아직 온전하지 않은) 성도가 모인 곳이므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충성하라고 조언할 수도 있다. 경험을 일반화할 때, 성경의 원칙에 따라 경험을 바르게 해석하고 원리를 도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태의연한 사고” 역시 기준은 성경이다. 단지 오래된 가치 기준, 전통과 배경에서 나온 삶의 규칙이나 예의라고 해서 다 꼰대스러운 것은 아니다. 만일 그 오래된 가치 기준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온 가치 기준이라면, 하나님 말씀으로 분명히 밝히신 하나님의 가치 기준이라면, 누구의 입에서 나왔든 그 내용만으로 ‘꼰대스럽다’고 말해선 안 된다. 하지만 꼰대가 살았던 시대 배경과 시대 정신이 낳은 비성경적 혹은 반성경적인 원리원칙을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강요한다면, 듣는 사람의 태도 역시 중요하겠지만, 그 내용 면에서는 꼰대 같은 말을 한 것이 틀림이 없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자유로운 교제를 할 때도 여자는 조신하게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 것을 종용한다면 성경이 아닌 유교적 배경과 시대에서 배운 원칙을 강요하는 셈이다. 반대로 여자가 교회를 다스리거나 가르치는 것을 금하는 것은 누군가에겐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한 원칙이다(딤전 2:12).
꼰대는 말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사전이 정의한 것을 보면 “그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남을 가르치려 드는” 것, “강요”하는 것의 문제가 부각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만일 주장하는 내용이 성경의 기준에 입각한 참된 말이라 할지라도 성경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하라고 명령한다(엡 4:15). 사도 바울은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미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말했다(고전 13:2). 하나님의 참 진리를 말하는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사랑”이 함께 수반되어야 한다. 사랑 때문에 진리를 희석하거나 타협하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다만 그 변하지 않는 진리를 오래 참고, 온유하고,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않으면서, 무례하지 않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유익이 아니라 듣는 이의 유익을 추구하고, 성내거나 악한 것을 내지 말고,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태도로 가르쳐야 한다(고전 13장).
특히 교회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통해 성도를 섬기는 이들이 꼰대스럽다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워서 가르치는 내용을 바꾸는 경우가 많다.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라는 비판을 받기 싫어서 현 시대 정신에 거슬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스스로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으로 취급하고, 사랑이란 이름 아래 그 주제에 관하여 침묵한다. 하지만 다듬고 노력해야 할 부분은 가르칠 내용이 아니라 가르치는 방식이다. 참사랑은 청자가 반드시 들어야 할 진리, 하나님께서 전달하라고 명령하신 메시지를 감추거나 축소 및 변경하는 것이 아니다. 참사랑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담대하게 그러나 사랑의 태도를 담아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자나 교사 역시 똑같은 하나님의 진리 아래 말씀의 수여자가 아니라 수행자로, 입법자나 재판장이 아니라 그 말씀으로 심판을 받을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가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마지막으로, 꼰대를 꼰대라고 말하는 것, 누군가를 꼰대스럽다고 평가하는 우리 마음은 항상 옳을까? 칼 트루먼은 <신좌파의 성혁명과 성정치화>라는 책에서 오늘날 시대의 정신을 분석했다(부흥과개혁사, 2022). 철학자 찰스 테일러, 심리 사회학자 필립 리프, 윤리학자 알렉스테어 매킨타이어가 주장한 개념을 종합하여 과거에 우리는 신성한 질서를 근거로 옳고 그름을 판단했지만, 지금은 오직 개인이 어떻게 느끼는가(심리), 개인의 행복에 득이 되는가에 따라 철저하게 내면적, 심리적으로 판단한다고 평가했다. 개인의 심리나 행복을 거스르는 외부 권위는 출처가 무엇이든 모조리 부정하고 심지어 혐오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내가 남자 몸에 갇힌 여자라고 느끼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어?’ ‘느끼는 대로 살아야 행복한 데 누가 내 행복을 감히 방해하는 거야?’)
투루먼은 이런 시대 정신의 시작점으로 철학자 루소의 사상을 꼽았는데, 루소는 사람은 건전하고 순수하게 태어나지만, 사회의 여러 사고방식에 순응하면서 부패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오랜 사회 경험을 한 사람들, 사회의 여러 요구에 이미 굴복한 사람들이 강요하는 것을 따르기보다는 순수성이 더 남아있는 청년이 느끼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오늘날 서구 세계는 일반적으로 젊은이에게 지혜가 있다고 믿으며 노년층을 부패하거나 근시안적이거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왜 그럴까? 부분적으로 그것은 자연, 사회, 청년 특유의 순수성이 지닌 진정성에 대한 루소의 기본 논점이 지금 이 시대의 공인되지 않은 가정 중 하나로 자리 잡았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사회적 상상의 일부다(154p)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정신이 그렇다. 꼰대가 말하는 것이 아무리 옳고, 말하는 방식이 참으로 사랑스러워도 듣기 싫으면 듣기 싫은 거다. 꼰대스러운거다. 내가 느끼는 것을 거스른다면,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을 건드린다면 말하는 사람의 권위가 어디에서 왔든지, 전달하는 방식이 어떻든지 상관없다. 외부 권위에 대한 존중, 특히 신적 권위에 대한 존중은 개인의 심리와 행복감에 대한 존중 밑에 짓밟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꼰대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만일 우리가 꼰대라고 여기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참된 것을 사랑 안에서 말할 때도 단지 듣기 싫어서, 그가 주장하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꼰대스럽고 근시안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듣는 우리가 단지 자유로워지고 싶어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위와 요구에서 자유롭고 싶어서. 하나님의 사고방식이 싫고 내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어서.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을 불경하게도 꼰대스럽다고 여기며 그 말씀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고방식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전달하는 자에게 ‘당신은 참 꼰대스럽다’라고 속으로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다면 말이다. [복음기도신문]
조정의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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