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 하나 되는 게 왜 이리 어려울까? 당신이 내 마음과 같다면, 이 질문 앞에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굳이 눈물을 언급한 것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게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일반적인 교회 내 불화에 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불화는 우리가 사랑하는 교회,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사이에 일어나는 것이다.
또 나는 지금 (기독교를 정의하는) 일차적 기독교 교리나 (교단을 구분하는) 이차적 교리 같은 수준 높은 주제에 관한 불일치가 불러오는 분열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불일치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뿐 아니라, 온 교회를 분열시키는 훨씬 더 일반적이지만 또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갈등이다. 왜 이런 갈등이 생기는 걸까? 진지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겸손하고 온화하며 참을성 있게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다(엡 4:1-3)
당신도 나와 같다면, 이런 분열을 보면서 가끔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는 “왜 교회 안에서 하나 되는 게 이렇게 힘들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당신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면, 이 질문은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잘못된 가정을 드러낸다. 이 질문 뒤에 숨어 있는 가정은 이것이다(나는 이런 가정을 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를 사랑하고 신뢰하고,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하며, 신학적으로 대체로 동의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일치는 결코 어렵지 않아야 한다.’ 이런 가정은 겉보기에는 꽤 그럴싸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가정이 합리적이라고 해서 꼭 바른 건 아니다. 특히 성경이 이런 가정을 지지하지 않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일치는 언제나 어렵다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얼마든지 하나 될 수 있다. 성경은 일치의 경험을 “아름답고 즐거운”(시 133:1) 것으로 묘사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이 되십시오”(빌 2:2).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우리 안에 내재한 죄와의 싸움이 결코 과거보다 쉬워질 거라고 약속한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인생의 고통이 견딜 만해질 거라 약속한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일치도 이런 사랑의 일부이다)이 과거와 달리 별다른 대가도 치르지 않고 인간적으로도 쉬워질 거라 약속한 적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성령으로 충만하고 뜨거운 그리스도인들 사이라고 해도 그들 사이의 일치가 결코 과거보다 더 쉬워질 거라고 약속한 적이 없다.
어쨌든, 신약성경 안에도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이 서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다투는 기록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일치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바울의 편지를 읽어야 한다. 다음 사례는 바울이 하나 됨에 관해서 얼마나 자주 언급하는지에 대한 작은 예시이다.
- 그는 고린도 성도들의 “분열”과 “분쟁”을 책망한다(고전 1:10-11).
-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분쟁과 분열과 파당”의 위험을 경고한다(갈 5:20).
- 그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라고 권면한다(빌 4:2).
- 그는 골로새 성도들에게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가르친다(골 3:13).
- 그리고 그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나쁜 말은 입 밖에 내지 말고 …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라고 권면한다(엡 4:29-31).
맘만 먹으면 나는 얼마든지 더 많은 구절을 인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리스도인의 일치가 어렵지 않아야 한다는 우리의 가정은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일치는 교회 초창기 때부터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일치가 어려운 이유
일치가 쉬울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없다. 그뿐 아니라, 성경은 일치가 항상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에게는 “교회의 일치가 왜 그렇게 어려운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거기에는 수많은 요인이 있다. 심각한 영적 공격을 받는 교회(엡 6:12), 양의 탈을 쓴 이리에게 침투당한 교회(행 20:29),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불신자의 선동에 휩쓸려 “분쟁과 분열과 파당”에 시달리는 교회(갈 5:19-21), 미성숙한 신자들이 당파적 다툼에 유혹받는 교회(고전 3:1-4) 등등을 생각해보라.
그러나 수많은 요인 중에서도 왜 교회의 일치가 그토록 어려운지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상위 수준의 요인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은 왜 우리가 향후 누릴 궁극적인 기쁨과 그의 영광을 위해서 굳이 우리의 하나 됨을 그렇게 힘들게 만드신 걸까?
일치는 우리를 단련한다
성경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자기의 몸에 몸소 지시고서,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벧전 2:24).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에게 용서의 선물(그는 “우리 죄를 담당하셨음”)과 거룩함의 선물(“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을 주신 것이다. 우리의 거룩함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 우리를 당신의 거룩한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은 다 큰 선물이다. 그러나 거룩하게 하는 선물은 종종 고통이라는 포장에 쌓여서 오는 경향이 있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삶을 배우는 것은 언제나 힘들고 종종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엡 4:3)을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엡 4:22-24). 일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따라서 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 더 많이 죽고, 다른 사람의 죄를 더 많이 참는 기회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이다.
일치는 그리스도를 높인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나는 이 구절을 들을 때면 목가적인 기독교 공동체를 상상하곤 한다. 성경 속, 심지어 사도행전의 첫 장에서도 본 적 없는 낭만적인 기독교 공동체 말이다.
그럼 예수님은 과연 어떤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걸까? 바로 이전 구절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3)고 하시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꿈꾼 것은 십자가를 품은 공동체, 서로를 향한 희생적인 사랑이 자신을 “종의 모습”을 취하게 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이다(빌 2:3, 7).
일치의 추구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 무엇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뚜렷하게 또 절정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듯,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도 하나님의 사랑처럼 세상을 향해 공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요일 3:16).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포기하지 말자
지역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은 수준 높은 소명이다. 그것은 성화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수단이며, 사랑에 굶주린 세상에서 이 세상에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줌으로 이 세상이 갈망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포하는 수단이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이 소명에서 실패하는지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 그러나 길게 또 종합적으로 보도록 하자. 너무나 자주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는 것(요 15:4), 거룩함을 위해 애쓰지 않는 것(히 12:14),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는 것(살전 5:17),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 것(눅 6:27),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지 않는 것(롬 12:14),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을 겪을 때 그것을 온전히 기뻐하지 않는 것(약 1:2)을 생각할 때, 화평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너무 자주 지키지 못하는 것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의 실패가 불순종의 핑계 또는 변명이 되면 안 된다. 우리 죄를 자백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과 다른 형제의 용서함을 받아 요한일서 1:9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자. 포기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할 수 있는 대로”(롬 12:18) “성령이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겠다고 결심함으로, 항상 인내하시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 속에 나타내자.
그리스도인의 일치는 높은 소명이며, 그렇기에 어려운 소명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빌 1:19)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 15:5). 하지만 그게 정상이다. 하나 됨이란 우리가 품은 목가적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속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를 세상 속에 나타내는 거룩한 소명이기 때문이다. [복음기도신문]
존 블룸(Jon Bloom) | 존 블룸은 Desiring God의 공동 설립자로 이사장과 작가로 섬기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믿음,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와 ‘Not by Sight’ 가 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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