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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근본주의(4): 내가 믿어야 할 모든 것은 ‘사도신경’에 있습니까?

사진: learnreligions.com 캡처

요일 4:2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신조는 근본적인 교리를 새롭게 세우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조는 거짓 교리를 부인하기 위한 것이고, 확립된 진리를 확인하므로 새로운 오류를 규탄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새로이 생긴 오류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확증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교회의 신조와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점점 더 길어졌고 복잡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인 기독교 교리를 매우 현대적으로 고백한 ‘Together for the Gospel’(역자주: 교파를 초월한 순수 복음주의자들이 모이는 컨퍼런스로 2년에 한 번씩 열린다. http://t4g.org/)은 포괄적이고, 상세하며, 뉘앙스가 있는 신앙 선언문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사도신경 같은 기독교 교리의 오래된 선언문은 초점이 훨씬 단순하고 좁은 경향이 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역사적으로 볼 때 사도신경은 신앙에 대한 가장 최초의 간단한 진술 중 하나이다. 사도신경은 (사도적 교리의 주요 요점을 요약하고 있지만) 신앙에 대한 철저한 진술은 아니며, 그렇게 의도된 것도 아니다. 사도신경은 유대교 또는 이교도 종교와 기독교를 구별하기 위해 고안된 간략하고 기초적인 고백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사도신경을 독점적인 신앙을 위한 방어의 벽이 아니라 포용적인 종교의 너그러운 문으로 사용하기로 결심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사도신경이 주장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오히려 사도신경이 다루기 실패한 문제들을 간과해 버린다.

트리니티 방송 네트워크(Trinity Broadcasting Network)의 후임 사장인 폴 크라우치(Paul Crouch)는 그의 글에서 이러한 느낌을 완벽하게 포착했다.

처녀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에 올라 가셨고, 우리의 죄는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았습니다. 그분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능력과 영광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절대적인 본질들을 넘어서, 정직한 남녀들이 “교리적 순결”이라는 무한한 문제에 대해 반대하고 논쟁할 수 있는 무한한 여지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열거한 몇 가지 요점에 믿음을 표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지 가르칠 수 있도록 허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공개적으로 신학적 검증을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서로 동의하지 않는 것은 괜찮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종류의 비판적 교리 평가에서 “형제 또는 자매의 이름을 내놓고 판단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주장에 어긋난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행동을 “이단 사냥”이라고 불렀다.

진실은 사실상 교회의 모든 역사적인 신조가, 크라우치가 호소한 자상하고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정반대의 의견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신조는 오류와 맞서도록 작성되었다. 신조는 진리를 교리적이고 구체적이며 잘 묘사된 용어로 제시한다. 신조들 모두가 반론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논쟁적이다. 신조는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를 목표로 한다. 니케아 신경은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그리스도의 두 본질의 교리를 말해준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신조, 그리스 신조, 러시아 신조, 개신교 신조가 있다. 사실상, 사도신경 후에 모든 신조들은 교리 논쟁의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신앙의 정통을 시험하는 기준이 사도신경 외에 더는 없어야 한다는 것은, 폴 크라우치 혼자 제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견해는 더 많은 수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동의하는 의견이다.

아마도 이 견해의 가장 인기 있고 설득력 있는 옹호자는 닉슨 백악관(the Nixon White House)의 전 변호사였으며 감옥 협회(Prison Fellowship)의 창시자인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일 것이다. 콜슨은 달필에 달변으로 잘 알려진 복음주의 안에서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가 수년 동안 쓴 많은 것들에 깊이 감사한다. 종종 그의 통찰력은 대단히 예리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서 나 역시 때때로 그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콜슨이 정통 기독교를 정의한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는 기독교의 타협할 수 없는 진리들이 모두 사도신경으로 해결되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는 모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이 고대 신조에 동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믿음의 진술로써 충분하며 이것을 동의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사도신경이 형제의 모임을 시험해보기 위함으로써 거짓 교리에 맞설 충분한 보호 장치를 포함하고 있을까?

사도신경은 특정 저자 또는 날짜를 추적할 수 없다.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초기의 텍스트는 4세기 중반부터지만, 더 이전에도 존재했다고 가정된다. 로마 가톨릭의 전통에 따르면 사도들 자신이 이 신조를 썼으며, 각각 하나씩의 신앙문서를 기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는 없다. 예를 들어 “그는 지옥에 내려갔다.”라는 구절은 4세기 후반까지 사도신경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 시대의 다른 신조로부터 따온 것이었다. “가톨릭”이라는 말, “성도의 친교”라는 구절, 그리고 마지막 구절 “영원한 생명”은 모두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오늘날 알려진 완성된 신조는 7세기 또는 8세기까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사도신경은 결코 진정한 기독교에 필수적인 모든 근본적인 교리에 대한 완전한 진술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신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사실, 아리우스라는 이단을 따랐던 여호와의 증인의 고대 선구자들은 사도신경에 동의한다는 것을 호소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했다. 윌리엄 커닝햄(William Cunningham)은 말했다. “아들과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안들이 신조에 동의한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별로 필수적이지 않은 사항들이 사도신경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심판한 사람이 본디오 빌라도임을 아는 것이 구원에 필수적일까?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에서 “지옥으로 내려갔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하는가? 진실로 거듭난 모든 사람들이 거룩한 가톨릭 교회 또는 성도들의 모임을 정의할 수 있어야 하나?

진실은 사도신경에서 많은 진술들이 광범위하게 변화하거나 심지어는 모순적인 해석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주요 기독교 전통들 간에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의 지옥 강림이 실제로 그가 지옥의 불길에 들어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성경 어디에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라틴어 용어를 내세우면서 그가 죽은 자의 영역인 지옥으로 내려갔음을 의미한다고 믿는다. 아니면 “거룩한 가톨릭 교회”는 어떤가? 교황을 따르는 사람들은 독단적으로 이 단어를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한다. 개신교인들은 문자적 의미에 따라 “가톨릭”을 “전체적인(Universal)”으로 해석한다. “성도들의 친교”는 여러 주석가들에 의해 이미 천국에 있는 성도들의 형제애, 지상의 성도와 하늘의 성도간의 실제적인 교제, 혹은 여기 지구 상의 믿는 자들 사이의 교제라고 해석되어 왔다.

윌리엄 커닝햄(William Cunningham)은 루터교 작가인 이티기오스(Ittigius)가 쓴 글을 인용했다. “루터교 신자들과 칼빈주의자들, 그리고 교황적인 해석까지 신조의 모든 문장들에 대한 해석을 병행하여 전시했다… 이후 다른 작가는 모든 기사에 대해 알미니안(Arminian)적인 또는 펠라기우스(Pelagian)적인 해석을 포함하는 네 번째 칼럼을 추가했다.” 커닝햄에 따르면 이 시스템들 중 어느 하나도 신조의 의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 모두가 분명히 서로 모순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신조의 말들은 많은 견해들 중에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결정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이 다양한 해석들 간의 차이는 진정한 기독교와 거짓된 기독교의 차이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은 폴 크라우치 (Paul Crouch)와 찰스 콜슨(Charles Colson)이 제기한 교리적인 입장으로 되돌아온다. 그들은 어떻게 주관적인 신조에 근거하여 객관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사도신경을 근본적인 기독교 교리의 중재자로서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 정체성의 끊임없는 부식으로 이미 고통을 겪고 있는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우리 신앙의 근본은 성경 외부의 어떤 출처로부터 나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 안에서 우리의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 이 말씀에 대한 연구가 바로 다음 시간에도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관한 시리즈로 계속될 것이다.

카메론 부텔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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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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