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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칼럼] 왜 아직도 선교에서 미전도 종족이 중요한가

사진: unsplash

 미전도 종족 선교는 회심자 숫자와 개척 교회 숫자로 성공을 평가하지 않는, 적절한 기대 수준을 가진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한다 

민족 고유의 언어를 쓰는 미전도 종족(ethnolinguistic people groups) 선교는 최근 들어 더 이상 선교에 있어서 전략적 우선순위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 중요성이 떨어지고 있다. 그런 주장의 요지는 이것이다. 미전도 종족(UPGs, unreached people groups) 선교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에 세계 선교가 다소 위험한 영역에 들어섰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성경적 방법 대신 세속적인 선교 방법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도 있다. 미전도 종족 선교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각 나라 지역 교회 사역에 필요한 핵심 자원까지 잠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게 맞는 말일까? 나는 예수님이 준 대사명 속에는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아직 완수되지 않은 사명을 완수하라는 명령이 들어 있고, 그러므로 미전도 종족 선교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믿는데, 거기에는 다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판타 타 에스네(Panta ta ethne)의 의미는 여전히 ‘종족’을 의미하고 아직까지도 많은 종족이 복음을 접하지 못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명령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모든 민족’에 해당하는 그리스어가 바로 판타 타 에스네다. 이 구절 속 ‘모든 민족’이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정치적 국가의 개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보편적인 동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비유대인 또는 이방 민족으로 이해하는 게 맞다고 주장한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그의 책 ‘열방을 향해 가라’(Let The Nations Be Glad)에서 민족을 의미하는 헬라어 에스노스(ethnos)와 판타 타 에스네가 신약 안에서 단수와 복수로 쓰인 사례를 모두 열거하고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의 결과를 종합해서 볼 때, 판타 타 에스네는 ‘모든 민족(종족)’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다. 물론 이 단어가 쓰일 때마다 항상 민족을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런 가능성은 헬라어 구약에 나오는, 거의 백 번에 가까운 판타 타 에스네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보면 훨씬 더 자명해진다. 헬라어 구약에서 이 단어는 말 그대로 단 한 번도 ‘이방인 개인’을 의미한 적이 없다. 언제나 ‘모든 민족’을 의미했고,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밖에 있는 다른 종족을 의미한다.  

성경이 말하는 종족이 구체적으로 어떤 종족인지 확실하게 규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했을 때 그의 제자들이 이해했던 바로 그 의미 그대로 이 종족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바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마 28:19–20; 눅24:45–47; 행 1:8; 롬 15:21).

예수님의 대사명 속에 미전도 종족이 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대사명 속에 선교에 필요한 전략도 들어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전도자도 없고, 제자도 없고, 또 가장 중요한 교회도 없는, 전도해야 하는 3,193개의 종족이 무작위로 존재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만연하다. 접근하기가 어렵고, 복음을 향한 정부의 적대적 태도 그리고 그 종족의 언어를 유창한 수준으로까지 배우는 데 어려움이 있는 정도에 따라 미전도 종족들이 분류되어 있다. 

이런 어려움에 더해서, 미전도 종족은 종종 선교에 필요한 자원의 먹이 사슬 가장 아래에서 논의되는 게 현실이다. 기독교인의 기부 중 1퍼센트도 채 안 되는 자원이 미전도 종족 선교에 쓰인다. 미전도 종족과 함께 사는 기독교인 선교 사역자는 전체 선교 사역자 중 4퍼센트도 채 안 된다. 이것은 지금 미전도 종족 선교가 지금 예수님의 대사명 속에서 얼마나 하찮게 취급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수치다. 상황이 이런데도, 마치 미전도 종족 선교가 여전히 선교에서 ‘전략적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혹자가 주장하듯이 미전도 종족에 대한 강조를 축소시킬 때(de-emphasizing) 과연 어떤 결과가 닥칠지는 상상만 해도 무섭다.   

미전도 종족은 접근하기도 어렵고, 함께 살기도 어렵고 게다가 그 안에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성숙한 인격에 끈기와 좋은 훈련까지 받은 형제, 자매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히 회심자 숫자와 개척 교회 숫자로 성공을 평가하지 않는, 적절한 기대 수준을 가진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한다. 미전도 종족 전도는 가능하다. 오늘날에도 느리지만 체계적으로 미전도 종족 선교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향한 환호성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2. 잘못된 방법이 목적까지 바꾸지는 않는다

많은 이들이 마태복음 24장 14절을 잘못 이해한 탓에, 오늘도 빠른 속도로 이 과업을 마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사역하고 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구절에 대해서 선교적으로 또 종말론적으로 오해하고 있다. 선교적인 오해는, 오늘날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초대 교회와 같이 교회를 개척하고 강하게 성장시킬 필요는 없이 단지 복음을 불신자에게 ‘선포’하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식으로 선교를 축소하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오해로는, 미전도 종족을 규명하고 그들에게 단지 복음을 선포하기만 하면 우리의 사명은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불러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식의 잘못된 선교에 대한 비전과 전략은 결국 제자 양육에 필요한 장기적인 관점을 훼손시킬 뿐 아니라, 신약 성경이 말하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것을 힘들게 만든다. 이런 생각은 궁극적으로 무책임한 방법론으로 귀결된다. 선교사 양성 기관인 래디어스 인터내셔널(Radius International)에서 우리는 이러한 방법론을 서면으로 부인했으며 또한 최근에는 이와 관련해서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교회 개척 운동, 제자 양육 운동, 내부인 운동(Insider Movement), 단시간 교회 개척 외에 이런 비슷한 운동에서 만나는 속도와 실용주의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나쁜 선교 방법이 초래한 결과이지 결코 미전도 종족 선교를 지나치게 강조해서가 아니다. 이 두 가지를 혼돈하는 것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해롭다. 오늘날 지배적인 선교 방법이 도입되기 한참 전에도 (기억하자, 방법론은 단지 신학의 산물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에이미 카마이클(Amy Carmichael), 글래디스 아일워드(Gladys Aylward), 윌리엄 보든(William Borden), 그리고 존 페이튼(John Paton). 그들은 하나같이 영어를 쓰는 민족은 이미 충분한 복음의 빛을 받고 있지만, 다른 민족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3. 복음이 전파된 종족과 그렇지 않은 종족을 서로 대립 관계에 두는 대신, 우리는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복음이 전파된’ 종족과 ‘미전도’ 종족을 놓고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식의 생각은 강제적이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선택을 요구한다. 물론 미전도 지역을 향해서도 해야 할 많은 사역이 있지만, 동시에 이미 복음이 들어간 지역에서도 할 일은 적지 않다. 신학교와 성경 학교, 또 국가별 훈련소 설립과 더불어 강력한 지역 교회를 세우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지역 교회를 통해서 양성하는 회심자와 제자들은 자신들의 고유 언어를 가지고 그 지역을 복음화 하는 데 가장 강력한 힘이 될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해당 지역 또는 그 너머까지 미전도 종족에 복음을 전하는 데도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러나 명확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바울에 의하면 이미 복음이 들어간 종족과 그 지역에서 몇 퍼센트의 사람이 회심을 했는가는 상호간에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복음이 들어간 지역에서 선교를 하는 것이 덜 가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바울을 미전도 지역인 스페인으로 보낸(롬 15:23-24) 바로 그 하나님은 디도와 디모데를 이미 복음이 들어간 그레데와 에베소로 보내 계속해서 그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도록 했다. 바울이 받은 독특한 사명은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걸쳐서 자신이 이미 구축한 것과 동일한 토대를 모든 미전도 국가, 모든 종족 그리고 모든 언어마다 놓는 것이었다. 디모데와 디도는 단지 다른 사명을 받은 것일 뿐, 그게 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곳이 선교지다”라는 생각이 팽배한 상황에서 복음이 들어간 종족과 미전도 종족을 구분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오늘날 교회를 나설 때면 입구에 이런 글귀를 붙여놓은 교회가 많다. “당신은 이제 선교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선생님도 많다. “우리는 다 선교사입니다.” 이런 구호들이 다 좋은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는 그게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다.  

자, ‘모든 기독교인은 선교사다’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고 해보자. 그러면 지금 미국의 도시에서 사는 당신에게 이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결국 당신이 사는 도시에는 수천, 수만 명의 선교사가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케라리쉬(Kerarish), 파샤이(Pashayi) 및 암토(Amto) 종족에는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다. 그렇다면 전략적으로 볼 때 우리의 선교 에너지와 자원을 어디에 쏟는 것이 바른 것일까? 이미 복음이 들어간 지역과 미전도 지역에 대한 구분을 모호하게 하면 할수록, 우리는 복음이 없고, 제자도 없고, 또 교회가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잃게 된다.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장소에 전략적인 우선순위를 두라고 말한 바울이 비난 받아서는 안 된다(롬 15:20). 그의 선교 사명은 해당 지역에 더 이상 선교할 대상이 없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선교의 개척자인 바울에 의하면, 이미 복음이 들어간 지역이 따로 있었고, 거기서 선교하는 것은 바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몫이었다. 디도와 디모데는 교회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들은 존중과 격려를 받았다. 역할의 차이는 명확하고 보완적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받은 사명에 따른 차이가 분명히 있다. 

대사명에 따르면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무리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여전히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선한 목자에 대해 들어본 적 없는, 잃어버린 양들을 향한 사랑에 우리 교회가 게으르지 않기를 바란다. 

 대사명에 따르면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정하는 것은, 아무리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여전히 선교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Brooks Buser & Chad Vegas | 브룩스 버저는 선교사들에게 선교현장 사전훈련을 제공하는 Radius International의 대표. 차드 베가스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Sovereign Grace Church의 개척 목사이고, Radius International의 설립 이사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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