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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칼럼] 팀 켈러 ‘죽음 앞에서 더 깊어지는 신앙’(하)

▲ 팀 켈러 목사. 사진: 유튜브 채널 The Gospel Coalition 캡처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게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단지 내가 믿고 한 켠에 제껴두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나를 지탱하는 희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팀 켈러의 ‘죽음 앞에서 더 깊어지는 신앙’(상)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역사적 개신교의 정통과 일치하는 공개된 나의 믿음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내가 실제로 갖고 있던 지식까지도 함께 살펴보아야만 했다. 내 믿음이 사실은 내가 사는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행여 무의식적으로나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가정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삶은 다 내 중심으로 잘 돌아가야 하고, 이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다”였다. 내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받아들이면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내 직관에 반하는 것이지만, 심오한 차원에서는 해방감을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만큼 작고 유한하다고 가정하는 것이 맘이 편할지는 몰라도, 그것은 결코 분노에 대한 치료법이 될 수 없다.

머리가 필요한 또 하나의 영역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미 부활절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한 상태였다. 암 진단을 받기 이전까지만 해도 부활은 내게 사실상 상당 부분 이론적인 문제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라는 게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는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숱한 비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lying Spaghetti Monster, 기독교를 패러디한 종교의 숭배 대상물 – 역자 주)을 믿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이십 년 동안 나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사례를 제시한 영국의 성경학자 톰 라이트(N. T. Wright)의 작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제 나는 과거와 비교할 때 훨씬 큰 회의론적 생각을 가지고 톰 라이트가 연구한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다. 나는 쉽게 설득되고 싶진 않았지만, 그의 글을 다시 읽어 가면서 그가 내세우는 주장이 오히려 과거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공정하게 보였다. 그의 책은 내가 발을 디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부활을 믿는 데 단지 정신적 동의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했다.

추상적인 믿음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념 사이의 틈을 메우려 애를 쓰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역할이다. 초기의 미국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가 주장했듯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증거하는 꿀의 달콤함을 믿는 것과 실제로 꿀을 먹고 그 달콤함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꿀의 단맛을 혀로 느끼는 것은 꿀이 달다는 그 어떤 합리적인 추론보다 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져다 준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능력 그리고 지혜와 같은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믿는 것과 마음 속에서 그런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르다. 성경은 감각적인 언어로 가득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그의 선하심을 ‘맛보아야’ 한다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에베소서는 말한다.

1273년 12월 6일,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기념비적인 책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저술을 중단했다. 친구 레지날드가 왜 그런지 물었을 때, 아퀴나스는 그가 쓰고 있던 모든 신학을 “짚처럼 초라하게 보이게” 만드는 하나님에 관한 경이로운 체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신학 자체를 부인하려고 아퀴나스가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하나님에 관한 지도를 그리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경험하는 것의 심오한 차이를 경험했던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하나님에 대한 나의 체험이 “황홀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과거와 비교할 때 분명히 더 깊고 더 달콤했다.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내게는 세 가지의 훈련이 필요했다.

첫 번째로 내가 만든 하나님을 더 이상 만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시편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은 당연히 더 인자하고 덜 공격적이지만, 내 마음이 너는 희망이 없다거나 또는 내가 무가치한 존재라고 말할 때 내가 만든 그런 착한 하나님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시편이 드러내는 하나님은 너무도 복잡하지만, 그렇기에 어려운 그 하나님은 감히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시편을 통해 나는 점점 더 “우리와 관계를 맺는 바로 그 하나님” 앞에 내가 서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 훈련은 에드워즈와 같은 초기 작가들이 영으로 ‘혼자 소리내어 말하기(soliloquy)’라고 부르던 것이다. 시편 42편과 103편에서 우리는 그런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편 저자가 말하는 대상은 하나님도 또 독자도 아닌 자신의 영혼, 자기 자신이다. 그들은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마음을 향해 말했다. 그들은 마음을 샅샅이 살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새롭게 했다. 그들은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로 인해 불이 붙을 때까지 마음을 향해 진리를 선포했다.

나는 내가 가장 굳건하게 믿고 있는 믿음을, 또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사랑과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들을 다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야만 했다. 그러면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은 시인 조지 허버트가 쓴 것처럼 “일종의 조율 … 부드러움, 평화, 기쁨, 사랑, 행복, 고귀한 만나(manna) … 평범함 속의 천국”으로 나를 이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영적 독백을 하고 기도를 해도 이런 음악이 내 속에서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이라는 현실과 그분의 약속은 내 속에서 점점 더 커져갔다. 나의 상상력은 점점 더 선명하게 부활을 시각화했고, 내 마음은 그 속에서 안식을 찾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게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단지 내가 믿고 한 켠에 제껴두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나를 지탱하는 희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매일 다음과 같이 기도를 했다. 때로는 기도할 때 짜릿한 전기가 통하기도 하지만 그 마지막은 언제나 평안이다.

“오늘 밤 잠이 들고 내일 아침 당신의 은혜로 인해 눈을 뜰 때 내게 기쁨을 주는 생생한 사실에 사로잡히게 하소서. 그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또한 나의 의를 위해 다시 부활하셨기에 내게도 최종적인 부활이 임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영적 사실이 내 안에서 커짐에 따라 내가 사는 방식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바로 내가 느끼는 기쁨과 두려움에 관해서다. 암 진단을 받은 이후로 캐시와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만들려고 노력할수록,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편안함과 안정을 더 뿌리내리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그 천국을 오히려 더 누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캐시는 우리가 휴가를 보내는 친숙하고 편안한 장소에서 깊은 위안과 휴식을 찾는다. 그중 어떤 곳은 전선에 전등만 달린 오두막이지만, 그곳은 캐시에게 일종의 향수를 부르는 곳(Sehnsucht)이고 그녀가 갈망하는 장소다. 내게 있어서 가짜 구원은 직업적인 목표와 성취, 즉 새로운 책, 또 다른 사역 프로젝트, 교회가 이루는 또 하나의 업적이다. 그러다 보니 해변에서의 휴가가 끝나갈 때가 되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서로 정반대이면서도 또 이상하게도 똑같았다.

휴양지에 도착하자마자 캐시는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불평을 하곤 했고,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그녀는 휴가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그녀는 오두막 현관의 난간에 자신을 수갑으로 채워서라도 그곳에서 떠나지 않는, 그런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서 사역에 복귀하고 싶어 조바심을 내곤 했다. 자연스럽게 해변에 앉아서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역에 관한 브레인스토밍 내지 계획표 작성으로 보냈다. 그렇게 온전히 휴가를 즐기는 법을 모르던 우리 두 사람은 휴가가 끝나도 재충전이 되어서 집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은 바로 초록색의 키 작은 제다이 마스터가 했던 말이다. “그는 평생 동안 먼 미래인 지평선만을 바라보았다. 단 한 순간도 그는 현재 있는 그 자리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 캐시와 나는 좀 더 현명했어야 했다. 아니, 사실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뭔가 좋은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기대할 때, 그래서 그 속에서 가장 큰 위로와 사랑을 찾을 때, 그것이 뭐가 되었든지 결국은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거스틴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 우리의 마음은 결코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18세기 찬송가 작가 존 뉴튼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묘사했다. “자존심과 자아라는 내적 시련을 통해서 내가 너를 해방시키고 이 땅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너의 모든 시도를 다 깨뜨리는 이유는 바로 네가 오로지 나를 통해서만 네 자신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와 캐시는 놀랍게도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을수록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이 세상에게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아주 단순한 것들에서 기쁨을 찾는다. 물 위에 뜬 태양과 꽃병 속의 꽃에서부터 서로를 포옹하고 섹스를 나누며 대화를 하는 것 등등.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이전보다 더 큰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런 사실에 우리는 많이 놀랐다.

이런 변화가 단 하룻밤에 일어난 혁명은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실재가 내 마음을 더 많이 채울수록, 비록 느리고 고통스럽고 또 많은 눈물이 따라왔지만, 이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단순한 기쁨이 내 하루하루를 채우는 행복의 원천이 되어갔다. 더 나은 용어가 없기에 나는 이런 내가 천국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나는 이 물질 세계 속에도 실로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넘친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고 있다.

지나친 감상에 빠져서 또는 과장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내 인생에서 지금처럼 행복했던 적은 없었고, 지금처럼 하루하루가 위로로 가득했던 날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요즘처럼 슬픔에 가득한 날을 보낸 적도 없었다. 우리 부부의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 육 년 전에 남편을 암으로 잃었다. 평소에는 괜찮아 보이는 그녀지만 지금도 갑자기 떠오르는 어떤 기억이나 생각 하나에 그녀는 쓰러질 것처럼 휘청대고 또한 슬픔에 허우적거린다.

맞다. 그건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휘청거림에도 감사한다. 그런 슬픔과 아픔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방향을 조정해서 머리가 주는 확신과 마음 속 과정을 재정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어떻게 대처했고 또한 어떻게 기쁨을 누렸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어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위안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달콤하다. [복음기도신문]

나는 진심으로 내 인생에서 지금처럼 행복했던 적은 없었고, 지금처럼 하루하루가 위로로 가득했던 날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요즘처럼 슬픔에 가득한 날을 보낸 적도 없었다

팀 켈러 Tim Keller |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 City to City의 회장과 The Gospel Coalition의 설립자.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의 저자.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를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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