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6-17 절의 참 意味(5)
로마서 1:16-17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이다. 복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갈 2:20절과 더불어 많은 분들이 암송하고 있는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말씀에 대해 깊이 생각 없이 또 생각을 했어도 꼼꼼히 성경을 보지 않고 그냥 진정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외웠던 말씀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헬라어 텍스트로 롬 1:16-17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1. 헬라어 본문
16 οὐ γὰρ ἐπαισχύνομαι τὸ εὐαγγέλιον· δύναμις γὰρ Θεοῦ ἐστιν εἰς σωτηρίαν παντὶ τῷ πιστεύοντι, Ἰουδαίῳ τε πρῶτον καὶ Ἕλληνι. 17 δικαιοσύνη γὰρ Θεοῦ ἐν αὐτῷ ἀποκαλύπτεται 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Ὁ δὲ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2. 부정은 왜 부정? 긍정이 아니야!?
로마서의 주제가 되는 말씀은 이렇게 시작한다.
οὐ γὰρ ἐπαισχύνομαι τὸ εὐαγγέλιον
(우 가르 에파이스큐노마이 토 유앙겔리온)
참으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헬라어 본문에는 번역 성경과 더 큰 그 차이가 있음을 살펴보자. 논리적인 생각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접속사 “γὰρ”(가르) 때문에 앞 뒤 구절의 논리가 좀 이상하다. 부정어가 강조되어 나오고 있다. 올바른 성경해석은 정확한 말씀 읽기에서부터 시작한다. 성경을 다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꼼꼼히 생각하며 정독을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줄을 긋고 색으로 표시를 해 놓는 것은 성경 묵상과 성경 해석의 좋은 출발점이다.
15절을 읽고 16절을 잘 읽어보면, “οὐ γὰρ ἐπαισχύνομαι τὸ εὐαγγέλιον”(우 가르 에파이스큐노마이 토 유앙겔리온) 조금 생각하기 바란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 중간태(주어의 뜨거운 열정을 강조)를 사용했다. 그럼 거기에 논리적으로 맞는 문장이 와야 한다.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 부정이 왔다. 부정 보다는 긍정이 와야 한다.
예를 들어서, 내가 서산에 있는 정말 맛있는 맛집을 소개해주고 싶다. 왜냐하면(γὰρ, 가르) 그 식당의 음식이 너무 맛있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 나라에서 성경 언어를 정말 잘 가르치는 학교를 하나 소개해주고 싶은데 BLTS(성경언어훈련학교)를 소개해주고 싶다. 왜냐하면(γὰρ, 가르) 그 학교 들어가면 문법은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성경 하나를, 히브리어 성경이든 헬라어 성경이든, 요한일서든 호세아든 감동으로 외우고 나온다고 하더라.
그렇지! 당연히 이렇게 긍정이 와 야지! 그렇게 써야지! 맞다. 그런데 부정이 왔다. 왜? 사도 바울이 몰라서?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이미 간파를 했다. 롬 1:16-17 참 의미(I) 처음 글로 돌아가서 읽도록 하라.
1) 로마 교회의 상황?
만약 로마 교회의 상황이 이런 모습이라면 가능하다. 신실한 신자(信者)들이 복음에서 다 떠났다면 말이다.
바울이 말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우리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바울의 이 고백이, 이 문장이 수긍이 되려면 처한 상황이 모든 사람이 복음을 부끄러워하거나 복음 전하는 것을 하지 않아 이런 상황을 맞을 때, 아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나라도 해야겠구나… 이럴 때 이런 부정 문장이 사용 가능하다. 너희들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결국 떠나도 나는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떠나지 않을거야!
그런데 당시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로마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가보지도 않는 남의 교회다.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당시 로마 교회 상태를 알 수 있다. 건강한 교회였다(롬 15:14~16). 우리는 로마서를 교리적으로 알고 있지만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의 목적이, 진짜 목적이 따로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교리적인 목적이 아니라 중요한 목적이 따로 있었다고… 행 19:21, 로마를 거쳐… 롬 15:23, 28, 서바나 까지 원대한 꿈이 있었다.
롬 15:19, “κύκλῳ”(둥그렇게)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헬라어로 중요한 단어다. 예루살렘-로마-스페인-알렉산드리아-예루살렘까지 한바퀴 삥 도는, 완주하는, 로마 교회는 이런 사도 바울의 원대한 사도적인 꿈을 이룰 수 있는 든든한 후원 교회가 될 수 있었다.
초점으로 돌아오면, 그게 교리적이든 선교적이든… 이런 문장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 바로 그것은 그가 언어의 직공(수사학자)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수사학의 대가였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수사학의 匠人(장인)들이었다. 그래서 성경이 쓰여진 언어를 안 배울래야 안 배울 수가 없다.
교육(敎育)! 이 세상을 크게 나누면, 제일 중요한,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눌 수 있다. 그 다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나누고 싶다. 배우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뒤틀어진다. 성경관, 신관, 기독론, 종말론, 모든 것 할 것 없이 거짓 터 위에 세워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에스라 7:10, 딤후 2:15 말씀을 보라.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에 “스푸다손”(딤후 2:15) 해야 한다.
3) “λιτότης” litotes
그러면 어떻게 이 문장을 해석해야 하는가?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데 그 이유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설명한대로 긍정이 와야 한다. 앞의 내용이 소중할수록 뒤에 오는 문장은 더 소중한 표현이 더 포지티브 한 문장(긍정적인 문장)이 와야 한다.
포지티브한 문장을 말하기 위해 부사로 수식하고 강조를 덧붙여서 만들고, 그래도 그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때, 성이 차지 않을 때, 그렇다면? 그 이상을 어떻게 표현한단 말인가! 성경이 최고의 문학인데, 문학적인 표현을 알아야 한다. 그 때는 앞 단어와 뒷 단어의 극과 극의 단어를 정반대의 단어를 사용한다. “자랑한다=수치스럽게 여기다” 그리고 거기에 부정을 만들어 도치하여 강조시킨다.
οὐ γὰρ ἐπαισχύνομαι τὸ εὐαγγέλιον
(우 가르 에파이스큐노마이 토 유앙겔리온)
“부끄러워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ἐπαισχύνομαι”는 정확히 번역하면, “αἶσχος, αἰσχύνομαι, shame, dishonor, 수치, 얼굴에 수치를 당하다. 모욕을 주다”라는 의미다. 여기에 강조 전치사, “ἐπι”가 와 합성되었으니, 보통 수치가 아니다.
참조. 잠 29:15 LXX 부모 얼굴에 똥을 칠하다, 욕되게하다. 여기에 헬라어 전치사 ἐπί (on, fitting)가 붙으면 더 의미가 강조된다. 보통 모욕이 아니다. 내가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하다는 말이다.
이럴 때는 단순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내는 부정문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가진 수사적인 부정문이 되고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이런 헬라어 문법을 헬라어 단어, “λιτότης” litotes (Ratin/English, 이중 부정을 통한 긍정문, 일종의 반어법)이라 한다. 사전에는 곡언법[曲言法])이라 나와 있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오리지널 텍스트를 배우지 않을 이유가 하등에 없었다=모두가 다 감동이 되어서 전심으로 배웠다. 영어도 이런 표현법을 가지고 있다. “Not bad =good” 그래서 롬 1:16절 이 문장은 최고의 긍정을 나타내는 강조(emphasis)의 표현법이다. 긍정의 강조, 최상급 표현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부끄러워하지 않다(수치스럽게 생각하다) 이 말의 의미는 곧 litotes ?= 정말 최고로 자랑하고 싶다. 복음에 미쳤다!
예레미야의 유명한 고백록이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7-9 )
종일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어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다짐하고 뒤돌아서면 다시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라마 למה?)
미쳤기 때문이다. 여러분 미친 사람 보았는가? 그 사람 수치하고는 아무 상관 없다.
암에 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있단다.
치매 환자, 미친 사람.
당신은 복음에 미쳤는가?
주님을 향한 영혼에 중병이 걸려, 가보지도 않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품어내는 바울 사도 그의 고백 앞에, 나 하나도 넘지 못하고 세상의 온갖 잡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회개의 기도를 이 아침에도 드린다.
To be continued. 계속됩니다. [복음기도신문]
김명호 | 헤브론선교대학교 성경언어대학 교수. 복음과 기도의 기초 위에 성경의 원어 연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부흥과 선교완성을 위한 다음세대를 세우는 사역으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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