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 알고 지내는 목사 아무에게나 이 질문을 던져보자. “교회에서 제자도와 관련해서 가장 큰 도전이 무엇입니까?” 아마도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뉴스요.”
좀 더 자세히 파고들면, 이런 말을 듣게 될 것이다.
교인들에게는 이제 각자가 선호하는 뉴스 미디어가 그들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목소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뉴스는 이제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 문제와 관련해서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누구의 잘못인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까지 알려줍니다. 뉴스는 이제 아예 성경과 기독교 신앙, 또 교회까지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는지를 알려주는 렌즈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다음 말에 동의할 것이다.
네, 자극적이고 심하게 정치적으로 편향된 뉴스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특정 미디어만을 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뉴스의 영향을 받지만 나는 아니에요.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영지주의 다시 보기
뉴스가 매력적이라는 말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뉴스 콘텐츠는 우울하고 끔찍한 소식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런 뉴스를 보고 또 보는 걸까?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대부분의 뉴스 미디어가 일종의 영지주의적 복음이라는 것이다. 영지주의는 2세기에 유사 기독교로 시작했다. 교부들은 즉각 영지주의를 이단으로 판정했는데,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으라는 가르침 대신, 특별한 신비적 지식이나 밀교적인 통찰력을 믿으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식의 특별한 통찰력이 오늘날 뉴스가 제공하는 것이다. 뉴스 미디어는 암묵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부 특종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우리 말을 들으십시오. 당신은 이제 바보 무리가 아니라 진짜를 깨달은 소수 중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뉴스는 특별한 지식을 통한 구원을 제공한다.
한 걸음 더 들어가보자. 뉴스는 이제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인간에게 던져진 유혹의 연장선상에서 작동한다. 바로 하나님처럼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편재하고 전지하심으로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관리하신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은 단지 우리가 사는 곳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사건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현대의 뉴스 미디어는 이런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제시한다. 이제 인간이라면 지역을 초월하여 글로벌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무지’라는 어둠을 뒤로 하고 ‘속보’라는 빛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알고 신경쓰는, 하나님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런 메시지에는 중독성이 있다. 우리가 뉴스를 놓치지 않고 챙기는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대단히 중요하고 가치있는 존재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 속에는 내가 신과 같이 되었다는 환상이 숨어있다.
조치 불가의 뉴스
대부분의 뉴스는 나쁜 소식이다. 지진, 허리케인, 살인, 그리고 스캔들. 또한 대부분의 뉴스는 조치가 불가능하다. 당신이 뉴스를 접한 후,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럼 조치가 불가능한 나쁜 뉴스들을 자꾸 들어서 당신 속에서 생기는 결과는 뭘까?
– 불안: 하루 24시간 내내, 마치 소방 호스의 물처럼 연중 무휴 당신 속을 파고드는 사악한 뉴스는 결코 당신의 얼굴에 평화와 만족 그리고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단지 더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 무력감: 고칠 수 없는 문제와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의 뉴스를 듣는 것에 너무 익숙해지다 보면, 이제 당신 속에서는 심각한 무력감이 자라나게 된다.
– 분노: 내면에 도덕적 나침반을 가진 사람이라면 뉴스를 보며 분노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기에 당신 속에는 불의를 볼 때마다 정의감이 주는 분노가 생긴다.
– 미움: 분노는 마치 곡물을 발효할 때 증발하는 알코올과 같다. 그 알콜을 증류해서 조금씩 병에 담게 되면, 그 결과는 증오로 가득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뉴스를 많이 보거나 읽는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사랑이 아닌 이웃에 대한 미움을 품기 마련이다. 관음증적이고 어찌 할 수 없는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접한 영혼은 아예 변형되어 버린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좋게 볼 때) 무지한 자, 또는 (최악의 경우) 악한 자의 강력한 무리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작지만 영웅적이며 소수에 불과한 선한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다시 물어보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뉴스를 자꾸 듣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온 뜻과 정성 그리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내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쓸데 없는 짓이다.
지역 뉴스를 선택하라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럼 아예 사회 생활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아예 발을 빼라고요?”
아니, 정반대다. 뉴스는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식의 참여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당신으로 하여금 현실의 사람들과 더불어 실제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악영향을 끼친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당신은 결코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모든 것에 다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기회는 바로 당신이 사는 지역 사회 속에 있다. 그렇기에 기독교인에게 가장 중요한 뉴스는 지역 뉴스다. 지역 뉴스라는 것은 내가 사는 도시 또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뉴스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지역은 바로 내가 사는 ‘동네(hyper local)’를 말한다.
– 암에 걸린 이웃에 관한 뉴스
– 첫 아이를 낳은 이웃에 관한 뉴스
– 실직한 교인 뉴스
– 처음으로 교회에 온 아는 사람 뉴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의 뉴스다. 이런 뉴스는 당신으로 하여금 사랑하고 기도하고 또 봉사할 기회를 준다. 같은 인간으로 함께 웃고 울도록 만든다.
이런 지역 뉴스에 반응할 때 우리 속에서는 전혀 다른 움직임이 일어난다. 불안이 자신감으로, 무력감과 분노, 미움이 기쁨과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
당신은 이런 지역 뉴스를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런 뉴스를 만나려면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처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어떻게? 이웃과의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D.J. 마로타 목사|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 성공회 > www.tgckorea.org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를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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