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그레아로 가는 길은 쉬운 것 같은데 작은 어려움이 있었다. 좁은 2차선 도로의 내리막 급커브가 끝나는 지점에 작은 푯말을 놓치는 수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도로 위쪽에 작은 동네가 오늘의 겐그레아다. 고대 겐그레아는 도로가의 비치파라솔이 몇 개 세워져 있는 곳에서 발견해야 한다. 전문 안내인이 없이는 찾기 힘들다. 더욱이 이곳에서 몇 해 전에 일어난 심각한 교통사고의 여파로 관광버스 등은 작은 유적지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 초입에 설치된 쇠말뚝으로 인해 순례객들은 사진도 제대로 찍을 수조차 없다
썰물 때가 아니면 발견하기 어려운 아주 작고 초라한 부두의 흔적, 그리고 몇 개 남지 않은 유적들과 이 지역 관공서에서 세운 겐그레아 항구의 안내판이, 이곳이 사도 바울이 머리를 깎고 소아시아로 항해를 한 항구임을 짐작케할 뿐이다. 복음에 온 신경을 집중했던 바울 사도가 당시 최대의 도시인 고린도의 관문인 이곳에 겐그레아에 교회를 개척 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로마에서 온 군인들이나 여행자들이 고린도에서 쉼을 얻고 다시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기 위해 배를 기다리던 이곳에서 뵈뵈 집사는 오가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성심성의를 다해 도왔던 자매이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롬 16:1)
겐그레아는 아테네의 역사가인 투키디데스(Θουκυδίδης)가 제2차 그리스 페르시아 전쟁 후 델로스 동맹(Δηλικός Σύνδεσμος)의 맹주인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동맹(Πελοποννησιακός Σύνδεσμος)의 주도국가 스파르타와 30년 전쟁을 기술하면서 처음으로 소개된 이외에는 별다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사실 고린도가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서 재건설되기 전까지는 100년의 세월을 버려진 곳으로 방치되었기에 그 주변의 다른 지역은 당연한 일이다.
고린도가 아가야 지역의 주도가 되면서 고린도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가는 항구는 필연적이었고, 겐그레아는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항구 지역 특성상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그리고 신화 속 조개껍질을 타고 등장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항구의 수호신이었기에 가장 좋은 자리에는 이들의 신전이 있었다. 지금은 물에 잠겨 희미한 흔적만 남았을 뿐이다.
그밖에 주후 2세기경 그리스를 직접 돌아다니며 그리스 이야기 (Ἑλλάδος περιήγησις)를 저술한 파우사니아스(Παυσανίας)는 포세이돈과 삐리니 사이에 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작은 아들의 이름 께기아스(Κέγιας)에서 겐그레아가 유래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삭발하며 고린도를 떠나야 했던 바울의 아픔
변변한 유적과 유물 하나 없는 이곳이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지, 겐그리아의 유적지에서 생각해 본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왜 18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사역한 고린도를 떠나기 전 하나님께 서원 의식인 자신의 머리를 깎아야 했을까? 아마 바울 사도는 서원적인 개념뿐 아니라 두고 가는 고린도교회를 생각하면 삭발뿐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하고 싶었을 지 모른다.
철학자 세네카의 형제인 갈리오(Gallio)가 51년 봄에 아가야 총독으로 부임했다. 고린도 지역에서 바울을 비롯한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빈틈을 노리고 있던 유대인들은 신임 총독이 부임하자 바울을 소송하여 재판석에 그를 세웠다. 당시 고린도에는 소수지만 지역 유지인 그리스도인(당시 고린도 재무관 에라스도를 비롯한 관료들)들과 다수인 유대인들, 당시 네로가 고린도 운하를 파기 위해서 최대 2만 명, 최저 만 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에 갈리오는 머리 아픈 이 문제에서 빠지기를 원했다. “너희 민족의 문제는 너희가 알아서 해결하라”.
유대인들은 그 재판 자리에서 회당장으로 시무하다 바울을 통해 회심한 소스테네에게 테러를 가했다. 바울의 제자들은 조만간 이와 같은 사건이 바울에게도 일어나게 될 것으로 여겼음직하다. 그래서 바울 사도에게 고린도에서 떠나있기를 요구했을 지도 모른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자신이 떠난 후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울을 반대하던 몇 명은 ‘스테판 집사를 죽인 살인자 바울이 언제부터 사도였냐’는 사도권 문제를 제기해왔다. 또 이미 교회 안에 싹이 보이는 베드로 파, 아볼로 파, 바울 파, 그리고 그리스도 파로 나눠지는 사분오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서 에베소에 있을 때 그가 염려했던 일들이 빠르게 들려왔다. 고린도 전서보다 먼저 기록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카 전서와 후서의 인사말보다 더욱 강하게 고린도 전서의 인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뜻과 직접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분오열로 나뉜 고린도교회에 자필(自筆) 편지를 통해서 당시 고린도 교회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시기와 분쟁과 질투의 얼굴들과
고린도교회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의 초라한 실상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복음기도신문]
김수길 선교사 | 총신 신학대학원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GMS 선교사로 27년간 그리스에서 사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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