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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하나님의 자비(3): 거룩한 긍휼의 지고한 표현

사진: Unsplash의 Greg Rosenke

하나님이 인자하시며 긍휼하신 분이라는 사실은 죄인들에게 좋은 소식이다. 우리가 마땅히 치러야 할 것을 치르지 않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긍휼하심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사역에서 온전함으로 나타난다. 성육신 그 자체는 체휼하심의 표현과 또한 우리의 연약함과 한결하심을 의미한다(히 4:15). 그리스도에게서 우리는 그분의 셀 수 없는 거룩한 긍휼하심이 우리가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슬픔, 동정, 그리고 고뇌의 눈물을 포함한 인간적인 감정의 표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 그 죄 없으신 분이 우리의 모든 죄 값으로 인해 측량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시고 그러한 고통 속에서 그분은 비통해하는 모든 이의 참담한 아픔에 같은 심경이 되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신 가장 큰 이유다.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2:17-18, 4:15).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거룩한 긍휼은 단순한 우리의 육체적 고통의 공감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우리의 일시적, 세상적 그리고 물리적 행복에 관한 진심 어린 관심을 내포하지만,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무한히 그 이상의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사역은 결국에는 반드시 구원으로 나타나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의 광대한 긍휼하심은 단지 우리의 육체적 고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 구원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병, 장애, 아픔, 그리고 온갖 형태의 육체적 고통은 타락과 죄로 인한 저주의 열매에서 초래된 결과이기에 인간의 역경에 대한 하나님의 체휼하심은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향한 특별 은혜를 포함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서 그 생생한 증거를 본다. 육체적 치유는 그분의 지상(地上) 사역의 주된 이유가 아니었다. 예수께서 오신 이유는 물론 죄인들을 구원하시어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회개하라는 부르심을 받음으로 시작한(마 4:17) 지친 영혼들이 영원한 안식의 약속에 이른다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복음이었다(마 11:29).

그렇지만 복음을 전하시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 지체 부자유자, 시각 장애자 그리고 다른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셨다. 예수님은 선천성 장애자(요 9, 막 7:32-35), 만성 질환의 의학적으로 가망이 없는 환자(눅 8:43-47), 심히 귀신 들린 자(막 5:1-16)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치유하셨다.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 4:23, cf. 15:30-31)

이러한 육체적 치유는 예수님의 권세와 긍휼하심의 확실한 증거로 그분의 신성에 대한 증명과 생생한 신적 권위의 현시(顕示)이기도 했다. 이렇게 행하심으로 누구라도 죄의 속박과 그에 따른 형벌 그리고 그 죄의 결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자신의 전능하심을 입증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거룩한 긍휼하심의 진실한 표현과 그분의 메시아적 자격에 대한 명확한 검증을 통해 복음을 증거한다. 그렇지만 육체적 치유는 예수님의 복음의 중점도 이 땅에 오신 주된 목적도 아니었다. 주님은 화목제물 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어 우리가 지은 죄를 대신해 고통당하시고 죽으심으로 그 죄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다.

복음은 죄 사함, 구원, 하나님 앞에 바로서기 그리고 영생의 선물을 선포한다. 복음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겪는 고통을 제거하리라 보장하지 않는다. 즉각적이며 자동적인 치유를 약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실, 고통 그 자체가 우리를 온전케 하는 은혜이기도 하다. -우리를 대신해 고통받으신 예수님의 형상을 온전히 본받아(벧전 1:14-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그리고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런 까닭에 오늘날 텔레비전 전도사 혹은 자칭 신앙 치료사는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행한 것과 같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치유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변해버리신 것도 어쩌다가 하나님의 권세가 쇠한 것도 아니다. 소위 신앙 치료사 그들 자체가 복음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 문제다.

복음의 진정한 의미는 누가복음 4:18절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회당에서 소리 내 읽으셨던 그 잘 알려진 예언의 말씀인 이사야 61:1절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눅 4:18)

그분이 복을 약속하신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이러한 자들이며 그분이 자유를 주겠노라 선포하신 “갇힌 자”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다시 말해, 본래 죄의 종인 이들을 일컬으며(롬 6:17). 시력을 회복하는 “눈먼 자”는 다음 말씀과 같은 자들이며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 26:18). 그리고 자유로운 몸이 된 “눌린 자”는 전에 죄와 마귀에게 눌려 있던 자들이다(행10:38).

즉, 육체적 치유는 복음이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더 본질적인, 더 영구적인, 더 중요한, 그리고 세상이 가져다주는 고통의 일시적 완화보다 더 현실적인 것. 복음은 유일한 진리, 죄와 그 죄책감과 그에 따른 영향에 대한 치료법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게다가 우리는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으로부터 이렇듯 많은 영원의 혜택을 얻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우리를 붙드시는 그 은혜는 실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모든 역경이나 어려움의 흔적을 간단히 지워 버리시는 것보다 훨씬 더 크나큰 은혜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즉각적인 치유는 고난 중에 우리를 위하는 그 충족한 은혜만큼 영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고후 12:9-10).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전 4:16-18)

하나님이 결코 변치 아니하는 분이심을 알기에 우리는 그분의 마음이 고통 당하는 이들을 위한 긍휼하심으로 가득 차 있음을 절대적인 확신을 두고 장담할 수 있다. 특히 이 삶에서 육체적 고통이라는 힘든 짐을 진 이들에게 우리의 삶과 사역 또한 그 긍휼을 반영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의무를 도외시한다면 우리가 충실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복음기도신문]

존 맥아더(John MacArthur)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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