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GTK 칼럼] 복음의 핵심 요소(5): 십자가가 답이다?

Ⓒ unsplach

Jesus Is the Answer (예수가 답이다.)”라는 노래는 예전부터 항상 나를 거스르게 하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그 해답에 대한 문제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양한 방면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안드레 크라우치 (Andrae Crouch)의 성가는 현대 복음 전략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 이가 십자가를 전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세부 전제조건들을 도외시하고 넘어가는 지점이기도 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이 접근법은 믿지 않는 이들이 왜 예수가 살고, 죽고, 부활해야만 했는지를 스스로 알아내도록 내버려 둔다는 점에서 헷갈리게만 만드는 접근법이다. 나쁘게 생각해보자면 이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특히 믿지 않는 자들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불행, 어려움, 피해 의식이라고 생각할 때 그러하다. 만약 죄인들이 십자가를 그저 한시적인 문제들의 해결책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들은 복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복음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지만 복음을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거룩함과 죄성을 가진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먼저 이해하지 않고는 인간과 예수님의 구속사는 말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이 신념이 어떻게 확증되어왔는지를 봤을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 사이의 깊고 무한한 골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구원이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 힘 있는 복음 전도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들을 깨우는 엄청난 무게의 진실을 알려주고 구원자를 목놓아 부르도록 만든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본인의 죄를 이해하지 못하는 죄인에게는 의미가 없다. 한시적인 재판에 대한 해결책이나 이 세상을 돌보는 분으로 예수님을 너무 빨리 소개하는 것보다 그가 그의 죄와 반항의 영원한 죗값을 발견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라고 고백했던 예수님 옆 십자가에 못 박혀있던 강도가 가졌던 믿음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

십자가 강도와 같은 사람이 바로 예수님과 그의 삶, 죽음, 부활에 대한 영원한 가치에 대해 들을 준비가 된 영혼이다.

대신 사는 삶 (A Substitutionary Life)

당신은 왜 우리의 구세주께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시기 전 33년의 시간 동안 이 세상에서 살아가셨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왜 이 땅에 오시자마자 십자가로 직행하지 않으셨던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갈라디아서 4장 3~5절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어린아이일 동안에 세상의 기본적인 것들에 속박당하게 된다. 하지만 때가 이르러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면서 그를 여자를 통해 나게 하셨고 율법에 속하여 태어나게 하셨다. 그래서 그가 율법에 속한 자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율법 아래에 태어난 것”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존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만 온 것일 뿐만 아니라 “율법에 속한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율법에 속한 자로 태어나셨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설명한 것처럼 말이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다른 모든 인간들처럼, 예수님께서도 율법 아래에서 태어나셨다. 다른 모든 유대인처럼, 예수님도 구약에 쓰여진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판단 받고 율법을 순종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유대인들과는 다르게 율법에 순종하며 완전한 삶을 사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다. 그리고 그가 완벽한 순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율법 아래에 있지만 율법을 따르지 않던 다른 모든 사람들(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다. [1]

신약 성경은 구약의 언약의 율법을 실패하고 방치된 것으로 두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 – 그의 의로운 기준과 명령들 – 은 우리의 죄책감을 드러내고 동시에 우리에게 무언가 특별한 새로운 의로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들의 죄를 대표했듯이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도 그가 선택한 모든 이들의 삶을 대표하는 것이다(마 5:17).

갈보리 언덕을 오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일생의 사명은 그의 죄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고(마 3:15)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왔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로운 인생은 그가 대변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적용된다.  죄의 대가를 완전하게 지불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범한 엄청난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것이다.

대신 죽는 죽음(A Substitutionary Death)

갈보리 언덕에서 이루어진 거래를 가장 잘 압축한 말씀 구절은 고린도전서 5장 21절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존 맥아더 목사는 이 말씀구절에서 심오하고 풍성한 가치들을 도출해 냈다.

하나님이 믿는 자들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덮어씌우고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그들에게 덮어씌우는 것의 이점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들이]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들이시기 위해 죄인들에게 요구하신 최고의 의로움(the very righteousness)은 바로 하나님 스스로 우리들에게 제공하신 최고의 의로움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치 우리 모두의 죄를 예수님께서 범한 것처럼 대하셨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가 순전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산 것 같이 대하실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사신 것처럼, 우리의 지극히 부당한 삶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합법적으로 책임을 지셨고, 마치 우리가 그의 삶을 산 것처럼, 그의 의로운 삶은 우리에게 씌어졌다. 이것이 바로 의의 전가(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주님의 의로 덧입혀짐)를 통한 ‘칭의’이며 복음의 핵심이다. 이 말씀 구절(고후 5:21)에 쓰인 가장 간결하고 가장 힘 있는 이 진리야말로 죄의 전염병으로부터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치료법이다. [2]

속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타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죄인들을 향한 그 넘치는 인자하심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었다. 갈보리 사건은 절대로 하나님이 첫 번째 실패 후에 한 번 해보는 두 번째 시도 같은 것(a mulligan)이 아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죄를 모른 척하거나 혹은 너그러이 관대하게 용서하시지 않으신다. 죄에 대한 대가를 마땅히 치루여야만 하나님께서는 그 노여움을 푸신다.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노여움은 대속제물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매달리시고 고난을 겪으심으로 해결되었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6). 이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죄인들에게 그의 공의로우심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그의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되셨다.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그의 대속제물로 인해 풀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동시에 자비로운 분이시다.

약속된 부활 (A Guaranteed Ressurrection)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에서 그 절정을 달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선포되지 않은 복음 전도는 빈 껍데기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며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2-14)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것도 다 헛것이며 우리의 영생도 이미 끝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미래의 부활도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사실 여부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은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모든 이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4:25)라고 설명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죗값을 치른 것으로 만족하셨다는 증거라고 다시 한번 깨닫게 하였다. 부활은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압축하여 나타낸 하나님의 선포이다(롬 1:4). 이 선포, 즉,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가 훗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 15:20-23)

존 맥아더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는 말씀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담이 사망하는 모든 이들 곧 죽음의 조상이 된 것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에서 부활하여 영생을 얻는 부활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두 사건 모두, 한 사람이 행한 한 행동으로 인해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 그 행동으로 인한 결과가 적용되었다.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모든 이들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으로 인하여 영생을 얻는 부활의 대상이다. [3]

그리스도 전파 (Preaching Christ)

안드레 크라우치(Andrae Crouch)가 말한 ‘예수가 답이다’라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죄인들에게 이 해결책을 제시하기 전에 먼저 알맞은 질문을 통해 그들을 도와야 한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알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그 구원자를 찾을 때 전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이 땅에서 행하신 그의 사역을 전할 때 세가지 모든 측면을 다 전해야 한다. 첫째, 죄인들이 범한 율법을 대속제물로서 완성하신 것. 둘째, 죄인들에게 합당한 벌을 대신 받으신 것. 셋째, 부활, 그 문자 그대로 살아나심으로써 우리의 육신의 부활을 확증하신 것.

하지만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 이 깊은 영생의 비밀을 모든 죄인들이 다 경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이 모든 일은 전해진 것을 들은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시는 것은 무엇일까? 죄인들은 어떻게 이 복음에 반응해야 할까? 짧게 말하자면 죄로부터 돌이키는 회개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필요하다. 다음 글에서는 복음의 요구사항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복음기도신문]


[1] John MacArthur, The MacArthur New Testament Commentary: Galatians (Chicago, IL: Moody Publishers, 1987), 108.

[2] John MacArthur, The MacArthur New Testament Commentary: 2 Corinthians (Chicago, IL: Moody Publishers, 1987), 216–17.

[3] John MacArthur, The MacArthur New Testament Commentary: 1 Corinthians (Chicago, IL: Moody Publishers, 1984), 417.

캐머런 뷰텔(Cameron Buettel)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원문: https://www.gty.org/library/blog/B180117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GTK 칼럼] 복음의 핵심 요소(4): 인간에 대한 진실을 말하라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제보 및 문의: 

Print Friendly, PDF & Email

관련 기사

John the Apostle-chosen-241017
[GTK 칼럼] 사도요한(3): 겸손했던 사랑의 사도
jeju-tree-241017-unsplash
[박흥재 칼럼] 가장 귀한 것을 드리고 싶어요
20230704 Revival_USA
[TGC 칼럼] Z세대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부흥의 움직임?
vote-678x381
[장선범 칼럼] 투표는 곧 선교적 행동이다

최신기사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 납치 생존자들... "비슷한 고통 겪은 사람 돕고 싶어"
미국인의 미디어 신뢰도, 또 다시 사상 최저치… “신뢰한다 31%에 불과”
한국개혁신학회 학술상, 백석대 안수강 교수 선정
미시시피 대학, 6600명 학생들 예수 이름 높이며 공개적으로 신앙 고백
[오늘의 한반도] 지난해 독거 노인 급증... 건강, 우울감, 생활상태도 열악 외 (10/18)
[오늘의 열방] 英, 낙태 클리닉 주변서 기도한 아버지 유죄 판결 외 (10/18)
원어 의미 그대로 살린 ‘박경호 히브리어, 헬라어 번역 성경’ 8종 세트 출간
Search

실시간최신기사

re_Nigeria christians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 납치 생존자들... "비슷한 고통 겪은 사람 돕고 싶어"
media
미국인의 미디어 신뢰도, 또 다시 사상 최저치… “신뢰한다 31%에 불과”
20241017_Korea Reformed Theology Society
한국개혁신학회 학술상, 백석대 안수강 교수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