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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TK 칼럼] 복음의 핵심 요소(4): 인간에 대한 진실을 말하라

사진: Unsplash의 Nico Smit

진화론에서 사람을 보는 시각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되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박사는 1970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사람에 대한 현대 관점을 두 가지 근거로 비판하고자 한다. 하나는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존스 박사의 논점은 진화론자들이 강력하게 부인하는 성경의 두 가지 진리와 관련되어 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을 “그저 동물”로만 인식하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역으로 일상 속 세상적인 지혜는 인간을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존재라 말하면서 아프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 즉 모든 사람들이 태생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짐 (Made in God’s Image)

성경은 인류를 생존싸움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물의 한 종류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다.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피조물 중 최고로 만드셨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6-28)

인간의 존재는 무의미하지도 않고, 무작위적이지도 않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도록 설계되었다. 사람,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신성한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 이는 바로 우리를 동물의 왕국에서 완벽하게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일까?

“이매고 다이 (imago Dei) –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주제이다. 그것은 복음전도에 중요한 하나의 본질적인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바로 사람은 도덕적 피조물이며 하나님께 그 도덕성을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Montgomery Boice)는 그 중대한 암시를 강조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음의 한 요소는 도덕성이다. 도덕성은 자유와 책임이라는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확실히 말해, 남자와 여자가 가지고 있는 자유는 절대적이지 않다. 태초에 처음 지어진 남자 아담과 여자 이브도 자율적이진 않았다. 그들은 피조물이었고 그들의 복종함으로 인해 그들의 지위를 인정할 책임이 있었다.[1]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중대한 책임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내재된 도덕성은 우리의 도덕을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 도덕성은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옳고 그름에 관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가 계속적으로 그 도덕성을 위반한다는 사실은 아담의 타락이라는 역사적 실제성을 나타낸다.

타락 (Fallen)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인가, 아니면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가? 이 질문에 어찌 대답할지에 대해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말 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 가지 답이 성경적으로 맞는 답이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타락하였을 때 그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들의 본성으로 전해져 내려오게 되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의 죄인 된 본성을 잘 보여준다. 존 맥아더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 때문에 이 죄책감이 드는 상태로 추락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롬 5:19). 이것은 원죄의 교리로써 바울이 로마서 5장 12-19절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진리이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아담의 반란에 공모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를 증명하곤 한다. 또한 예수님 외에 결백한 삶을 산 자가 없기에 원죄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그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여길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2]   

원죄는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성경적 진리이다. 성경은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하면서(롬 3:23), 이미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한 것들의 집합이 이미 무엇을 증명하는지를 강조한다. 원죄는 우리가 국제적인 전쟁을 치르는 것에서부터 마음의 문을 닫는 것까지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겪게 된 이유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병들고 죽는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죽는 이유인 것이다! 더 이상 이러한 현실과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처음으로 반항한 결과로부터 도망칠 곳은 없다. 또한 우리가 우리 스스로 그 이후에 공모한 죄로부터 피할 방법은 없다.

죄책감 그리고 변명의 여지 없음 (Guilty and Without Excuse)

인간이 창조주에게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 순종하는 데 실패한 것은 인간의 측면에서 봤을 때 절대 인간의 무지함 때문이 아니다. 혹은 하나님의 측면에서 보아도 그의 증거의 부족함 때문도 아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인간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우리가 죄인들에게 성경의 하나님을 선포할 때, 우리는 그들의 신학적 지식의 부족함을 대상으로 사역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본능적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가득한 진리를 전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모르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롬 1:18)고 말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의 첫 번째 문제는 교육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항상 죄를 사랑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롬 1:21). 하나님은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께 올바로 예배하지 않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물으신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을 실패한 것에 대해 심판에 날에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히 9:27).

그 심판은 우리의 모든 행위와(계 20:11-12) 언행과(마 12:36-37) 생각까지(마 5:27-28; 고전 4:5) 그 대상이 될 것이다. 심판의 날에는 그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을 것이며 그 어떤 것도 숨겨질 것이 없을 것이다.

경고 vs 구애 (Warning vs Wooing)

신실한 전도자는 절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을 위로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그들에게 경고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반드시 죄인들이 객관적인 의의 기준을 마주하게 함으로써 죄의 순전한 지독함과 무례함을 폭로해야 한다. 죄는 성경적으로 불법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존 맥아더 목사는 죄를 드러낼 때 하나님의 율법을 사용하는 것을 지지한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복음 선포에 있어 율법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이 우리의 죄를 드러낸다는 것(롬 3:20)을 알았고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임(갈 3:24)을 알았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그들의 무력함을 보도록 사용하신 방법이다. 명백하게 바울은 복음전도라는 측면에서 율법의 역할을 잘 찾아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거룩과 순종에 대해 융통성이 없는 부분에 있어서 이는 한편으로 복음과 대조적이며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하지 않는 이런 구별을 왜 하고 있는 것인가? 만약 성경이 회개, 순종, 의로움 혹은 심판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하는 것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면 그것이 바르게 구별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경고를 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적인 모델을 따르고 싶다면 우리는 죄, 의로움, 심판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성령께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책망하시는 중요한 문제들이기 때문이다(요 16:8). 이것들을 뺀 메시지를 우리는 과연 복음이라 부를 수 있을까?[3]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어쩌면 더 듣기 좋고 구미에 맞는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죄성에서 그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죄를 선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 없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목적없이 만드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영광의 빛이 인간의 죄로 인한 어둠에 밝게 빛나도록 해야 한다. 무엇이 문제인지가 먼저 설명되지 않으면 십자가는 결코 그 해결책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리고 궁극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인간의 죄성 사이에서 아주 극명한 차이로 생생하게 존재한다. 우리가 이 두 진실을 양극화시킬수록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다음 장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복음기도신문]


[1] James Montgomery Boice, Foundations of the Christian Faith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86), 150–51.

[2] John MacArthur, The Gospel According to Paul (Nashville, TN: Thomas Nelson, 2017) 101, emphasis his

[3] John MacArthur, The John MacArthur Pastors Library: Evangelism (Nashville, TN: Thomas Nelson, 2011), 155.

캐머런 뷰텔(Cameron Buettel) | 그레이스투코리아 칼럼니스트

원문: https://www.gty.org/library/blog/B180117

GTK칼럼은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성경의 말씀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미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존 맥아더 목사와 GTK 협력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고하는 커뮤니티인 Grace to Korea(gracetokorea.org)의 콘텐츠로, 본지와 협약을 맺어 게재되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GTK 칼럼] 복음의 핵심 요소(3):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전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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