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13일, 파리에서 수백여명이 죽고 다친 끔찍한 테러가 일어났다. 배후에는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IS)가 있었다. 프랑스를 포함한 세계 곳곳에서 이같은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의 범죄에 분노가 폭발했다. 이틀 뒤인 15일 프랑스 국방부는 전투기를 보내 시리아 북부에 있는 ISIS의 거점 라카에 29차례에 걸쳐 폭탄을 투하하는 등 최대의 공습을 단행했다.
유럽에서는 이처럼 전세계를 이슬람화하겠다며 무차별 살상행각을 벌이고 있는 ISIS의 극단적인 테러로 인해 이슬람혐오증(Islamophobia, 이슬라모포비아)이 확산되어가고 있다. 이에 따라 그들 무장단체들을 피해 생명을 걸고 유럽으로 발길을 돌린 중동과 아프리카의 난민들은 더욱 곤경에 처했다. 난민들 상당수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이 이들을 혐오대상으로 여겨지게하며, 입국거부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대상을 병적으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생각이나 증세를 ‘혐오증’이라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혐오는 종교와 인종, 피부색깔, 사상의 차이 등 원인과 형태는 다양하다. 사실 이같은 혐오증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중동과 서구사회는 물론 한국에서도 최근 빈번하게 볼 수 있는 기독교에 대한 반응이다.
이슬람권의 중동지역에서 무슬림들의 기독교, 기독교인에 대한 반응은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으로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다. 기독교에 대한 부인과 개종을 강요하다 부모들 앞에서 자식의 신체를 절단하거나, 기독교인들에게 기름을 끼얹어 산채로 불을 붙여 화형시키는 살해당해 죽임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고 있는 반(反)기독교 정서도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이다.
물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수백 년 전, 종교라는 이름으로 마녀사냥하듯 성도들과 이교도를 잔혹하게 학살한 역사도 비록 구교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명분으로 자행됐다. 또 기독교 지도자들과 성도들의 타락으로 기독교에 대한 세상의 기대마저 허물어뜨린데 따른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같은 혐오증이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문제는 그 혐오증이 외국인혐오, 남성혐오, 여성혐오, 동물혐오, 보수혐오, 진보혐오 등으로 구체화되며, 미움에서 멈추지 않고 미워하는 대상을 향한 적극적인 공격으로 이어져 혐오범죄로 드러나기도 한다.
성경은 이같은 모습에 대해 무정한 사람들, 원통함을 풀지 않는 사람들,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운 사람들의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 바울이 말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모습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12) 테러에 대해, 동성애에 대해, 낙태에 대해, 열방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죄악들에 대해 만일 우리가 너무 단순한 ‘의분’(義憤)으로 반응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혐오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범죄의 소식을 접하며 곧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생각 쪽으로 너무 빨리 나아가는 것은 오히려 우리 마음에 사랑이 식어있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증거가 아닐까.
지난달 서울 동대문의 한 동네에서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이 동네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발달장애인을 위한 교육시설을 혐오시설로 여기는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 ‘아이들에게 교육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모들의 몸부림이었다. 강도만난 자를 돕게 한 사마리아인의 손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긴’데서 출발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복음기도신문]
J.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