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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통신] 위그노 신앙을 계승한 스펄전을 추억하다

사진: 민경수

런던의 기독교 유산 중 하나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한 건물은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 침례교회(Tabernacle Church)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설교의 황태자로 불리던 찰스 스펄전 목사의 사역지로도 더욱 유명하다.

지난 150년 전의 이 지역의 상황을 생각해 보라. 그의 목회 현장은 두려움을 벗삼은 사람들, 말씀을 갈망하던 사람들로 당시 이 지역의 부흥의 불길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 지역 몇 장의 사진들은 분명히 제 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당한 모습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현저히 다른 다시 세워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아주 오랜만에 지역 개발 사업을 추진했다. 이미 현대식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지금은 마지막 프로젝트로 대형 쇼핑센터를 짓기 위해 기초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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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민경수

엘리펀트 앤 캐슬(Elephant and Castle) 기차역 플랫폼에 서서 서쪽을 바라보며 촬영한 그리스 건축 양식의 태버너클 교회 건물 현관을 작게나마 볼 수가 있다. 약 60년 만에 처음으로 보이는 광경이다.

1960년대부터 구 쇼핑센터에 가려져 있던 이 풍경은 이 지역의 유구한 역사를 일깨워 주는 많은 인물들을 안내해 준다. 또 그 자체 건물의 듬직한 경관을 볼 수 있음에도 그만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새로운 건물이 완공되기까지 얼마 동안이라도 볼 수 있어서 당대의 모습을 생각하게 된다. 물론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침례교 회중의 본거지였다. 지금도 반세기를 넘기는 피터 마스터스 목회자의 리더십으로 왕성한 사역을 잘 감당하고 있는 본이 되는 교회이다.

침례교 신앙의 뿌리는 17세기 초기부터 영국 비국교도들의 운동에 있었다고 한다. 물론 영국 교회가 로마 가톨릭교와 단절(1537년 경)한 후 다양한 영국 기독교인 그룹들은 기존 교회에 불만을 품게 됐다. 청교도와 같은 이 반대자들 중 일부는 내부에서도 성공회를 개혁하려고 시도한 반면 다른 그룹은 완전히 분리돼 자체 교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아직도 이런 영향이 지금의 21세기에도 미치고 있다.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 자들, 또 1630년도 존 하버드 외 다수 청교도들이 새로운 나라를 향한 꿈을 가졌다. 그들의 삶과 종교적 행사들은 여러 각도로 표현할 수 있다.

그 중, 두 명의 영국인 망명자 존 스마이스(John Smyth, 1570~1612)와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 1575-1616)는 1607년 암스테르담에서 이미 그러한 그룹을 만들었다. 그들은 성경이 기독교인의 삶에 유일한 지침이며, 유효한 교회는 개인적인 신앙고백 후에 세례를 받은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라고 믿었다. 이들은 1609년도에 최초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과정에서 침례교 운동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스마이스가 사망한 후 헬위스가 지도부를 이어받았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1611년에 영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1850년, 만 15세의 나이에 스펄전은 회심의 경험과 함께 캠브리지 도시의 성 앤드류의 거리 침례교회에서 주일학교에서 교사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후 곧바로 설교자로의 부름을 받아 지금의 캠브리지 근교 워터비치의 한 침례교회 목사로 섬겼다. 처음 2주간의 설교 부탁이 2년의 목회 현장을 배워 나가게 된 것이다. 교회는 더욱 부흥됐다. 또 이듬해에는 그의 첫 복음지 소책자를 출판하기에도 이르렀다.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 침례교 회중의 기원을 알아보면, 17세기 중반인 16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정부는 비 성공회 기독교인을 적극적으로 탄압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초기 20여년 동안 태버너클 그룹은 박해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비공식적인 것처럼 보였다. 1688년에 회중은 오늘날 런던 브릿지역 바로 옆에 위치한 툴리 스트리트에 있는 런던 브릿지 병원(Private)과 가까운 구도시 지역인 카터 레인에 첫 예배당을 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주의 은혜 가운데 교인 수가 증가하며 다시 강남으로 내려와 1833년에 뉴파크 스트리트(New Park Street, 지금의 Park Street & Borough Market 옆)로 이전했다. 이 새 예배당은 약 12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스펄전의 사역 순례 여정은 위로부터의 강한 손에 붙들려 젊은 20세 나이에 강남 뱅크사이드로 불리는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지속적으로 그는 본인이 전하던 말씀에 확신을 가졌다.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설교자의 설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스펄전은 22세에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설교자로 알려졌다. 뉴 파크 스트리트 예배당(확장 후에도)의 예배 참석자는 수용 인원을 빠르게 초과했다. 이에 회중은 서레이 음악당(Surrey Music Hall, 오늘날 남동쪽으로 월워스(Walworth)의 파슬리 파크(Pasley Park)가 있는 곳)을 임대해 예배당 처소로 사용했다.

1856년 10월 1일, 첫 번째 예배에서 1만 명의 사람들이 음악당으로 몰려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밖에서 말씀을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건물 안에서 누군가가 “불이야!”라고 외치면서 비극으로 끝났다. 이날 소동으로 7명이 사망했다. 이에 설교 목회자인 스펄전은 남은 생애 동안 죽음에 대한 슬픔과 죄책감을 짊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레이 음악당의 예배는 11월에 다시 시작됐다. 일상적으로 1만 명이 모였다. 그러나 12월에 스펄전 목사는 음악당에서 시작된 일요일 저녁 콘서트(그들이 안식일을 어기면서)에 반대하면서 끝이 났다. 이 시점에서 그는 일시적으로 시드남(Sydenham)의 크리스탈 팰리스로 예배 처소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857년 스펄전은 이곳에서 2만 6000명이 넘는 군중에게 설교했다. 하지만 회중을 위한 새롭고 영구적인 예배당을 짓기 위한 계획은 이미 진행 중이었다.

또한 예전에 목회자 스펄전과 그의 동료들은 1557년 로마 가톨릭 신봉자였던 여왕 메리 1세(1516~1558)의 통치 기간 동안 개신교 순교자 3명이 이 지역에서 화형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엘리펀트 앤 캐슬(Elephant and Castle) 지역에 교회당 부지를 선택했다.

따라서 원래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이 있던 새로운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은 결국 1861년도에 완공됐다.

이처럼 찰스 스펄전은 단순한 설교자나 목사만이 아니었다. 그는 전도와 자선 활동에도 참여했다. 1856년에 그는 또한 목회자를 훈련시키기 위한 대학(지금의 스펄전 대학)을 예배당 뒷부분에 설립했다. 새 태버너클 예배당이 준비되자 뉴 파크 스트리트 예배당이 팔렸고 그 수익금은 또한 당시에 꼭 필요한 구빈원(초기 일종의 보호 숙소)에 쓰기도 했다. 1867년에 스펄전은 취약한 소년들을 돌보기 위해 약 15분 거리 남쪽에 위치한 스톡웰 고아원도 설립했다.

스펄전 목사는 미국의 많은 침례교도들과는 달리 노예 무역을 폐지하는 데 확고하게 찬성했다. 1873년에 그는 태버너클에서 흑인 예술 문화를 대표하는 ‘피스크 주빌리 싱어즈(Fisk Jubilee Singers)’들을 중심한 콘서트를 주최했다. 당시 가수들은 테네시 출신의 아카펠라 그룹으로, 그들 중 다수는 전직 노예였다. 이처럼 1만여 명의 청중이 모인 그 수익금은 현재 미국 피스크 대학교 캠퍼스의 첫 번째 영구 건물인 주빌리 홀(Jubilee Hall)을 짓는 데 사용됐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생 그의 조상인 프랑스 위그노의 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1892년 스펄전은 휴가를 위해 떠났던 프랑스 멍똥(Menton/이탈리아에 가까운 남부 해안 도시)에서 사망했다. 이어진 그의 장례식 전에 엘리펀트 앤 캐슬에서는 12시간 동안 4번의 추도식이 거행됐다. 장례식 당일에는 약 10만 명의 조문객을 위해 추가 대중교통과 경찰이 총동원됐다. 장례행렬은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에서 스톡웰 고아원을 거쳐 웨스트 노우드 그의 묘지까지 3.2 km에 걸쳐 진행됐다.

초기 태버너클 건물의 대부분은 스펄전이 사망한 지 불과 몇 년 후인 1898년에 불행히도 대 화재로 소실됐다. 지하실과 현관만 살아 남았다. 같은 디자인으로 재건됐지만, 이 건물의 두 번째 버전은 1941년 5월 9일 밤 전격전인 독일군 폭탄에 맞았을 때에도 지하실과 현관만 살아남았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건물은 1957(’59)년에 세 번째로 재건된 것이다. 당시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엘리펀트 앤 캐슬 주변의 많은 지역도 지금은 이 쇼핑센터만 빼고 재개발의 완성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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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민경수

주님의 은혜의 섭리는 어린 스펄전을 택하셨고, 지탱할 수 있게 하는 지속적 은혜도 베푸셨다. 우리도 은혜를 구하며 경성해야 될 것이다. 할렐루야!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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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수 | 목사.선교사(본지 영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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