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6)
하나님은 내게 ‘긴 단꿈’을 허용하지는 않으셨다. 특별휴가 3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부대에서 연락병의 전갈이 왔다. 비상소집으로 다음날 아침 9시까지 대포 항에 정박된 군함 LST에 승선해야 한다고 했다.
영문을 물어보니 제1연대 전 병력이 지리산 공비토벌에 합류하게 되어 비상이 걸렸다고 한다. 부모님께 전라도로 부대가 이동되었음을 말씀드렸다. 너무 빨리 다가온 이별이 안타깝지만 이 양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또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이 시작됐다.
1951년 9월 중순이었다. 가까이에 있는 대포항에 도착해 LST함에 승선해 3중대 전우들과 합류했다. 부관으로부터 군장품을 인수받고 연락병 임무에 들어갔다. 출항하기 전 지휘관 회의에 참석하는 중대장을 따라 들어가 공비 토벌에 대한 전황을 들었다.
해방 후 북한은 적화 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않고 지리산에 거점을 두고 이미 요새화하고 있었으며 전쟁 전에 전진기지를 지리산에 구축해 두었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른바 빨치산의 활동이 본격화 됐다는 보고였다.
전쟁 이전에는 그들을 소탕하는 임무를 전투경비대가 전담했다. 그러나 항상 역부족이었다. 전방 전투가 치열해 지면서 후방지원이 소홀해지면 전남 구례와 화순 지방이 낮에는 대한민국이요 밤이면 인민공화국이 된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했다.
빨치산 벙커에는 군수공장과 인민국민학교가 이미 존재했고 학생들과 교사들은 그 지역 유력인사 자녀들을 납치해 사상교육을 시켜 배출한다는 것이다. 군수공장에는 군복(인민복)을 만드는 대규모 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정부는 더 이상 전투경비대에만 이 문제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통령 특별지시로 정예부대인 국군 제1연대 병력을 투입해 공비토벌 작전을 실시하게 됐다고 한다. LST함에 병력집결이 완료되고 이튿날 우리는 전남 여수항에 도착해 구례를 거쳐 화순에 도착했다.
우리 부대는 화순에서 노고산 방면으로 공격을 가하고 다른 대대는 구례에서 지리산 정상으로 공격했다. 또 다른 대대는 곡성에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삼각 작전을 펼쳤다. 노고산 도착 전에 적의 저항을 받아 피아간에 불을 뿜는 전투가 시작됐다. 우리 대대는 작전 개시 7일 만에 적의 벙커에 접근했다. 내가 속한 3중대는 지하시설에 있는 인민학교에 진입했다.
학생들은 무려 100여 명에 달했고 교사들도 10여 명이나 되었다. 무기를 소지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사살했다. 인근 아군부대의 첩보에 따르면 지하 아지트에 있는 군수품 공장에서는 수십 대의 재봉틀로 인민군 방한복을 생산하고 있었으며 무기 생산 공장도 가동하고 생필품 제조 시설도 발견됐다고 한다. 벌써 오래 전부터 빨치산들이 우리 영토 안에서 이처럼 상상할 수 없는 시설을 갖추고 활동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최 일선 전투 못지않게 열심히 싸웠지만 적의 맹렬한 저항 때문에 공비들을 섬멸하는데 고전하고 있었다. 아군 측에도 부상자가 속출했다. 1연대가 1개월여 동안의 공비소탕 작전을 마무리할 즈음, 빨치산 패잔병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노고산’ 중부 능선에서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상대로 집중사격을 가하는 일이 생겼다. 그 상황에서 중대장이 대퇴부에 관통상을 입는 바람에 마산에 있는 수도육군병원으로 긴급 후송됐고 연락병인 나도 중대장을 따라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당시 나에게는 세 가지 임무가 부여돼 있었다. 최전방에서는 호위병이요, 제 2 전선에서는 연락병, 후방의 예비연대에서는 전령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지리산 노고산 전투에서는 호위병으로 최측근 거리에서 중대장님을 호위하는 직임을 감당했다. 모시던 중대장님이 6.25전쟁 이후 처음 부상을 당하게 된 것이다. 나는 흰 가운을 입고 중대장 병실을 항상 지키고 있었다. 저녁에 중대장이 잠이 들면 대기병 방으로 돌아가 동료 병사들과 함께 숙식을 했다.
어느 토요일 오후, 시내 외출을 나가는 병사들과 함께 계급장이 달린 작업모를 쓰고 마산시내 ‘다방’에 가게 됐다. 그곳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면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는 전시 상황이었고 온 국민이 일심 단결해 위기를 극복해야 할 비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희미한 전등불 아래 자욱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젊은 남녀가 부둥켜안고 희희낙락하는 장면들을 목격하게 됐다.
나는 해이해져 있는 국민정서에 회의도 생기고 너무 화가 났다. 동료 병사들과 즉시 다방을 빠져나와 외출증을 반납하고 숙소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러나 후방 국민들이 보여준 한심한 상황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같이 외출했던 2명의 동료 병사들을 깨웠다. 우리가 본 상황을 그대로 넘길 수 없다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모종의 대안을 마련하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모종의 대안이란 전쟁을 대하는 국민들의 경각심을 고취하는 뭔가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 담배 장사
당시 병원 식사는 밥과 콩나물국이 전부였다. 젊은 혈기의 군인들이 전투 중 부상을 당해 입원해 있지만 영양상태는 형편 무인지경이었다. 이 같은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려보자는 생각이었다.
다음날 다시 동료들과 함께 외출증을 받았다. 그리고 각자에게 보급된 ‘화랑담배’ 40여 갑을 모아 어제 갔던 다방으로 들어갔다. 작업모에 담배를 담아 나는 엄숙하고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사랑하는 어르신들 그리고 선후배 동지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최전방에서는 조국을 사수하기 위해 수많은 병사들이 싸우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까이에 있는 육군병원에는 그렇게 조국을 지키다 부상당한 장병들이 누워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매 끼니 멀건 콩나물국 하나로 영양실조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께 도움의 손길을 구하고자 합니다. 저희들에게 보급된 화랑 담배를 가져왔습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을 기대합니다.”
함께 갔던 병사들과 함께 손님들의 테이블 위에 ‘화랑담배’ 한 갑씩 올려놓았다. 잠시 후 테이블을 돌아다녔다. 작업모에는 신속하게 성금이 모아졌다. 격려의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털어 주기도 했다. 작업모에 꾹꾹 눌러 담은 돈을 세어보니 예상 밖의 많은 성금이 모아졌다.
우리는 모아진 성금의 절반을 뚝 떼어서 불고기를 샀다. 20여 명은 족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모처럼 불고기 파티를 열어 오랜만에 영양보충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동료들이 자주 ‘화랑담배’를 모아 내게 가져오는 것이다.
“조 중사님, 선처를 부탁합니다.”
소문이 퍼져 많은 장병들이 불고기 파티를 재촉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 동료 병사들을 데리고 다른 다방을 찾아가 지난번처럼 성금을 호소했다. 언제나 성공이었다. 그렇게 낮에는 중대장 곁에서 환자 수발을 들고 밤이면 다방을 찾아 다니며 돈을 벌러(?) 다니는 별난 군인의 삶도 잠시 살아봤다. [복음기도신문]
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