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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드디어 가족을 만나다

사진 : Radu Vladislav on Unsplash

[정전협정 70주년 특별기획]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23)

내게 6.25전쟁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곳 중의 하나가 ‘며느리 고개’이다. 인민군에게 생포돼 사리원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아군을 목전에 두고 두 번이나 며느리고개에서 적군에게 발각되어 다시 북쪽으로 끌려가야 했던 바로 그곳이다. 전쟁이 끝나고 50여년 동안 아내 이봉실 권사와 함께 서울에서 자가용을 타고 수없이 동해안을 오고 갈때면 반드시 며느리 고개에 차를 세워두고 차 한잔을 나누며 지난 날을 회상하던 추억의 장소다. 당시의 며느리고개를 지금은 볼 수 없다. 고개 밑으로 도로가 관통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고개 근처를 지날 때면 생생한 기억을 잊지 못하고 감회에 빠져 들곤한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내게 기상천외한 묘안을 생각나게 하셨다. 이 기차는 나의 소년 시절 담배장사를 할 때와 같은 철길을 달린다. 내 고향 단양역에서는 어떤 기차를 막론하고 기관차에 물을 바꿔 넣어야 한다. 반드시 20분이 소요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60리 험준한 죽령고개를 넘으려면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 시간만 달리면 고향역에 필연코 기차는 정차할 것이다. 거기서 나는 탈출할 것이다. 기차가 삼곡역 ‘도담삼봉’에 이를 때 나는 갑자기 배가 아파 죽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거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헌병이 다가와서 말했다.
“야 임마, 똥 싸고 싶으냐. 단양역까지는 참아.”

단양역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인가가 없는 한적한 곳에 있었고 역 주변에는 호밀이나 보리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드디어 기차가 단양 역에 도착했다. 이미 어스름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헌병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이, 빨리 5분 내에 똥 싸고 와라.”

나는 허리춤을 움켜쥐고 냉큼 화차에서 뛰어내려 호밀밭을 헤치며 단숨에 ‘자새’라는 공동묘지 소나무 숲에 잠복했다. 드디어 기차의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탈출에 성공했지만 나를 호송한 헌병에게는 미안했다. 포로를 놓쳤으니 무거운 징계를 받았을 것이다.

나는 입고 있던 PW가 표시된 푸른 상의를 개울가에 있는 바위틈에 버리고 푸른 하의에 흰색 런닝셔츠만을 입고 있었다. 밤 여덟시경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피해 우리 집에 접근했는데 ‘ㄱ’자 목조건물이 폭격으로 인해 한쪽이 날아가고 일자 건물만 남아 있었다. 촛불이 켜진 부엌에 누가 있는 것 같아 인기척을 내며 불렀다.

“계십니까?” “누구냐?” 어머니 목소리였다.
“어머니, 나 봉가예요.” 소스라치게 놀란 어머님은 내 손을 잡았다.
“얘야, 니가 살아왔구나.” 안방에 계시던 아버님과 동생들도 뛰쳐나와 놀라움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밤이 깊도록 가족들에게 길고긴 고난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얘기를 들으신 어머님은 내가 살아서 돌아오는 꿈을 꾸셨다면서 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꿈에 내가 벼슬이 우뚝 선 장닭 한 마리를 안고서 어머니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길몽 중의 길몽이란다.

강원도 양양에 부모님의 장차 며느리감이 있다는 말씀도 드렸다. 어머님은 양양 땅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위치를 물으셨다. 38선 이북에 있는데 지금은 우리 군대가 점령하여 남한 땅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셨다.
“얘야, 그럼 빨갱이 나라가 아니냐.” 표정이 심각해지셨다. 전쟁이 끝나면 며느리감을 한번 보자면서 내심 기대하셨다.

부모님에게 나는 당당한 현역 이등중사임을 밝히며 아직은 군속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바로 동부전선에 있는 1연대를 찾아 원대 복귀할 뜻도 밝혔다. 아버님께서는 화를 내시면서 문경새재에서 나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던 친구들은 모두 전사통지서를 받았다고 제발 군대에 가지 말고 산골 친척집으로 피신하라고 하셨다.

나는 아버님을 설득시키려고 강변했다. 지금 내 나이 19세인데 군대 복귀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 바로 입영 영장이 나온다고 말씀드렸다. 아버님은 못마땅해 하시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하신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겠는가? 4대 독자이신 아버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나의 결심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틀 후 아버님은 몸보신을 하라며 개를 잡아 보신탕을 먹게해주셨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경북 안동 ‘구담’이라는 산골에 피난 중인 큰 형님 댁에 피해 있으라고 권하셨다. 아버님 말씀을 일방적으로 거역할 수 없어서 일단 안동에 있는 큰 형을 찾아가기로 하고 ‘두꺼비’ 동생을 시켜 군복과 군화 및 작업모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몸보신도 하고 이발도 하고 동생이 구해온 군복을 입으니 외모가 제법 단정해 보였다.

며칠 후 나는 군속 복장을 하고 동생 두꺼비와 같이 단양 역에서 안동행 열차를 탔다. 죽령고개를 지나 풍기역을 지날 때 헌병 2명이 다가와서 내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나는 정중히 군속임을 밝히고 군속증명이 없는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는데 듣지도 않고 무조건 따라오라는 것이다. 이제는 시련당하는 일에도 이력이 나서 남한 땅에서는 어떤 위협을 해도 겁나는 게 없었다. 사정할 필요가 없어 동생을 데리고 헌병을 따라갔다. 위풍당당하게 어깨에 힘을 주고 영천역에 도착해 헌병대로 갔다.

영천 헌병 파견대장 이등 상사가 조서용지를 펴놓고 제법 피의자 다루듯 일문일답을 했다.
“고향이 어딘가?” 물었다.
“단양입니다.”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너희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해보자’ 배짱이 두둑했다. 한 시간쯤 경과됐는데 헌병들은 모두 외근 차 밖에 나가고 보이지 않았다. 파견대장이 동생을 잠깐 내보내더니 내게 괴상망측한 요청을 했다.

“자네가 입고 있는 카키복과 워커 군화를 내 것과 바꾸자.”고 말했다. 그리고 나를 기차에 태워 대구까지 가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과연 대한민국 헌병이냐. X같은 놈들.”
속으로 욕이 나왔다. 나는 정의감에 욕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에라 될 대로 되라’ 그의 원대로 해주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은 그 순간 또 내게 지혜를 주셨다.
“파견대장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단 제가 대구까지 갈 수 있도록 원대복귀 군속명령을 해주시오.”
키는 나보다 커 보이는데 눈을 껌벅거리면서 메모지 같은 용지에 몇 자 써내려갔다.

군속확인서
성명 소속 용도 유효기간(3일)
영천파견대장 헌병 일등상사 ○○○(인)
꼼꼼히 읽어보니 유효기간이 마음에 걸렸다.
“대장님 3일은 너무 짧습니다. 내 동생을 안동 친척집에 데려다주고 가야 하는데 10일간으로 다시 써주십시오.”
‘너는 이미 내 낚싯밥에 걸렸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가 요청한대로 군속확인서를 받아들고 헌병의 안내로 안동행 열차에 동생과 함께 몸을 실었다. 안동역에 도착하니 추석 무렵이라 사람들 속에서 백중놀이 구경을 하고 있는데 또 헌병이 나타나 신분증을 보자고 한다. 여유만만하게 신분증을 제시하고 무사히 통과했다.

그날 밤 큰 형님이 피난중이라는 동네를 찾아 갔으나 형님은 그곳에 안 계셨다. 이웃 사람들 얘기는 얼마 전 다른 곳으로 떠났다며 행선지는 모른다고 했다. 이튿날 동생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헌병검문소에서 대구행 군용차에 올라탔다.

그날 오후 나는 대구보충대에 내 발로 자진 입소했다. 수속을 위해 안내소로 걸어가는데 누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조 중사 아니야.”

누군가 나를 부르며 소리쳤다. 화기소대 향도 권 상사였다. 이등상사였던 그와 나는 서로 반갑게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보충대까지 오게 된 사연을 서로 나눴다. 권 상사는 포로가 된 적은 없지만 적의 포위망 안에 갇혀 10여일 동안 산에서 굶주리다가 포위망을 뚫고 아군에 복귀했는데 1연대에 복귀할 것을 희망했으나 전황에 따라 아직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기 중이라고 했다.

나는 그동안의 행적을 시간상 다 이야기할 수 없어 간단하게 설명했다. 권 상사는 좌우를 훑어보더니 나를 위병소 뒤에 세우고 말했다.

“조 중사는 나이가 어려서 군속이라고 대답하여 반드시 제1연대에 복귀하여 우리 동지들의 근황을 알려주기 바라네. 꼭 명심하고 1연대로 복귀하게.”
“권 상사님, 이미 저는 군속으로 위장해 보충대까지 오게 됐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반드시 1연대에 복귀하겠습니다.”

나는 영천헌병대 발급의 군속확인서를 제출하고 별도의 군속막사에 무사히 배치됐다. 군속 인원수를 확인해보니 2개 막사에 약 60여 명의 군속 중 대개 4,50대가 많고 20대는 불과 10여 명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막사에 들어가 인사를 하니 모두들 손뼉을 치면서 정식으로 신고하라고 농담을 한다.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 제3중대 군속 조용학입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경례를 부쳤다. 일제히 박수를 치며 누군가 말했다.
“현역병보다 씩씩하네.”
그런데 군속막사의 식사당번은 무조건 최연소자의 몫이란다. 나는 자연스럽게 식사당번이 됐다. 바게쓰 하나는 밥, 하나는 ‘국’을 받아오는데 밥은 밥인데 국은 소금물에 콩나물을 띄운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막둥이’라는 별명까지 받아가며 충실히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며칠 후 취사장에서 권 상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권 상사는 9사단 최전방 백마고지로 전속 받았다고 했다. 3일안에 가야한단다. 그는 죽지 않고 살면 또 만나자며 쪽지에 3중대 소속명단을 적어 주면서 반드시 1연대로 복귀하여 소식을 전하라고 했다. 수도사단 제1연대는 동부전선 월미산(지금의 통일전망대 부근)에서 전투중임을 알려줬다. 쪽지에 적혀 있는 사람은 모두 5명이었다. [복음기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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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학 | 1934~2013. 충남 단양 생(生). 학도병으로 6.25전쟁 참전. 삼미그룹 총무과장 정년퇴직. 서울 노원구 국가유공자수훈회 사무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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