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기 목사는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의 순종을 통해 확인하고 있다. 그동안 그같은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담아냈다. 이 칼럼은 그의 저서 발췌와 집필을 통해 선교적 교회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다. <편집자>
소유자
첫 모임 후, 우리는 주중과 주말에 또 만났다. 같은 질문을 해댔지만 이번에는 성경책을 펼 준비가 되어있었다. 먼저 찾은 구절은 마태복음 16장 18절이었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느렸지만 보스(boss)가 누구신지는 분명했다. “나의 교회”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대화의 출발점을 찾았다.
설사 성경으로 교회를 정의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이 누구의 소유인지는 확실했다. 우리가 시작하는 웨이처치의 주인은 예수님이었다. 특정 목사 혹은 어떤 교단의 교회를 하려고 모이지 않았다. 예수님의 교회를 하려고 모였다.
당시 개척 멤버 중 한 형제는 제대를 앞둔 직업군인이었다. 그가 간결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군인은 국가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한 군인일 수 있지요. 만약 교회가 예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도 그분의 명령대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는 옳았고, 멋있었다.
검색
멋진 군인 아저씨의 말에 우리는 동의했다. 가장 확실한 것을 가장 먼저 수행하기로 했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먼저 신약의 첫 장부터 펼쳤다. 예수님의 말씀들 중에서 명령형 문장을 찾아 밑줄을 긋기로 했다.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찾기 시작했다. 계속 함께 성경을 읽었다. 그러면서 명령형 문장들을 중심으로 앞뒤 상황을 살폈다. 4장에서는 예수님이 사탄에게 하신 명령을 발견했다. 한마디로 “꺼지라”는 명령이었다(마 4:7, 10). 잠시 서로 쳐다보다가 그 명령들은 순종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 중 사탄은 없어 보였다.
계속 한 절씩 읽어나가다가 첫 문장을 발견했다.
“회개하라!”(마 4:17)
자연스럽게 두 번째 주일예배 설교 본문은 마태복음 4장 17절이 되었다.
회개
주일 설교는 매번 대화식으로 진행되었다. 가정집에서 여덟 명이 예배를 드리는데, 강대상이 있다면 어색했을 것이다. 우리는 거실에 둘러앉아 회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나는 설교자로서 다윗과 탕자의 회개를 먼저 다루며 말씀을 전했다. 그러면서 준비된 질문을 던졌고, 또 다른 질문이 돌아왔다.
대화는 예배 후에도 이어졌다. 우리는 식사시간 내내 웃고 떠들며 수다를 떨었다. 어떤 죄가 자신에게 가장 달콤했는지 서로에게 공개했다. 심각한 죄인들이 모여있어서 도저히 교회가 안될 것 같다며 서로 놀리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고 티타임을 가지며 대화가 더 깊어졌다. 그때는 회개의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Q&A도 오갔다.
“어제 회개한 죄를 오늘 또 지어도 용서해주시나요?” “언제까지 계속 용서해 주시나요?” “회개를 너무 중시하면 기쁨이 없지 않을까요?”
우리는 회개에 대해 대화하며 깊이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해가 저물었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히 회개하기로 한 후에 헤어졌다.
예수님의 명령 따라가기
이후 일주일 동안 우리는 경쟁하듯 회개했다. 죄를 버리고 믿음을 입었다. 간증이 늘었고 사랑도 많아졌다. 회개할 것이 많은 우리는 서로에게 영적 가족이 되었다.
마태복음 4장에서 시작된 순종하기는 그 뒤로도 지속되었다. 한 주 후에는 “나를 따라오라”(마 4:19)를, 또 그 다음주에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 5:12)는 명령을 따라갔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다.
어떤 명령도 따르기 편하거나 쉬운 것은 없었다. 각각의 순종마다 믿음과 용기가 필요했다. 여정은 깊어서 낯설었다. 순종 액션을 취하자 명령자의 호흡이 우리의 코끝에서 뜨거웠다. 그분이 너무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그러자 성장이 이어졌다. 삶으로 들고 온 말씀이 순종을 통과하자 사람들이 변해갔다. 운전습관이 바뀌고, 식습관도 개선되었다. 불편한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었다. 언행에 영향력이 생기고, 주변인들이 그 변화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는 저마다 또 다른 사람들을 예수께로 이끄는 통로가 되었다.
따라갔더니 변화되었다. 말씀대로였다(마 4:19). 우리는 기뻤다. 처음에는 교회를 시작하기 위한 목적으로 말씀에 순종했다면, 이제는 삶의 변화 때문에 좋아서 따라가기 시작했다. 엄마 오리 뒤의 새끼들처럼 무조건 따라갔다. 때로는 세상의 공격도 받았지만 우리는 잃을 것이 별로 없었다.
가장 큰 변화는 교회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였다. 순종은 마치 교회를 삶으로 들고 들어가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누군가를 교회로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교회가 되어 누군가를 만나고 있는 것 같았다. 교회는 순종하는 사람을 따라다녔다.
또 순종에는 바이러스 같은 영향력이 있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교회와 예수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순종하니 세상이 그분을 궁금해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한 주에 하나씩 무조건 따랐을 뿐인데 교회가 태어났다. 예수님을 따라갔더니 홍대 거리전도와 가정과 학교에서의 제자화 모임과 구제사역과 또 다른 교회들이 시작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첫 모임에서 했던 질문, 즉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교회란 성경을 펼쳐들고 예수님을 순종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합당한 자
예수님의 명령 따라가기를 일 년쯤 진행했을 때, 우리는 마태복음 10장에 도달했다. “합당한 자를 찾으라”는 명령을 만났고, 그에 순종하자 제자화 사역도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열두 명의 제자를 세상으로 파송하셨다.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셨다(마 10:1). 제자들은 그분의 명령대로 가깝고 익숙한 사람들에게 먼저 가서(마 10:5,6) 권능을 행했다(마 10:7,8).
여기까지는 우리의 경험과 일치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성령의 권능을 받았고(행 1:8), 복음을 가까운 관계 안에서 먼저 전했다. 또한 복음을 전하며 필요에 따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 주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우리의 경험과 반대되었다. 그것은 “합당한 자를 찾으라”라는 부분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합당한 자”란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그는 사역자의 개인적 필요를 공급하는 사람이며(마 10:9,10, 눅 10:7), 사역자가 전한 평안, 즉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 10:12-14, 눅 10:5,6).
예수님은 왜 많은 사람들 틈에서 하필 세리장 삭개오에게 집중하셨고(눅 19:1-10), 바울은 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 자매에게 집중했으며(행 16:13-15), 빌립은 왜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고(행 8:26-38), 베드로는 왜 고넬료 집에 가서 지냈는지(행10:23-43)를 생각해보라.
또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라. 그분은 늘 열두 명에게 집중하셨다. 그 중에서도 일곱 명의 어부 그룹에게 집중하셨고, 특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명의 제자에게 더 집중하셨다. 또한 그 셋 중에서도 베드로 한 사람에게 더욱 집중하셨다. 그분은 왜 늘 소수의 누군가에게 집중하셨을까?
이처럼 성경의 다른 부분들도 “합당한 자를 찾아라”라는 예수님의 명령과 일치한다.
전도와 제자화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합당한 자”는 우리의 사역 타깃과 꽤 달랐다. 우리는 사역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공급하려고 했고, 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집중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우리는 주로 “합당하지 않은 자”를 찾았다. 거리에서 복음을 전하면 약 100명 중 한두 명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러면 신나서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찾아다녔다. 그러나 예수님의 명령 따라가기를 진행하면서 방향을 바꿨다.
전도를 계속하되 “합당한 자”를 만나면 제자화를 시작하기로 했다. 전도의 현장에서는 99명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명령하셨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힘들어해도 된다는 말씀은 없었다. 그 대신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인 “합당한 자”에게 집중하라고 하셨다. 심지어 그와 함께 지내라고 하셨다(마 10:11).
1년 가까이 훈련을 했기에 이번에도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했다. 홍대 거리 전도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합당한 자”를 찾기 시작했다.
우리는 밥을 산다는 선배,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는 친구, 우리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교회 모임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방향
교회를 개척한 후 일 년이 되도록 다섯 명에서 여덟 명이 모였다. 그러기에 모임 장소도 어디서나 가능했다. 서로의 집에서 밥을 먹으며 성경을 공부했고, 캠퍼스나 공원에서 예배했다. 거리의 멋진 커피숍들은 늘 교회 모임 장소로 최고였다. 우리끼리 있으면 뭘 해도 참 좋았다. 말씀을 공유하며 서로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이라서 그랬다.
솔직히 그때까지 우리는 인원이 늘지 않는 것에 조바심이 많이 났다. 교회를 시작하고 일 년이 되도록 같은 사람들과 만나니 불안했다. ‘교회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 싶을 때가 많았다. 때로는 누군가를 억지로 모임에 데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늘 어색했다. 몇 사람의 돈독한 관계 안에 처음 데려다 놓은 외부인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그러나 합당한 자를 삶의 현장에서 찾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학교에서 수개월 동안 함께 밥 먹고 공부하며 예수님에 대해 대화하는 친구가 생겼다. 또 이웃사촌이나 직장 선배가 합당한 자임을 발견하고 관계를 쌓기도 했다.
몇 주에 걸쳐서 저마다 합당한 자를 찾았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우리의 모임에서 그들과 무엇을 했는지 나누며 함께 기도했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소식을 나누며 그들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누가 모여야 하는가
누구든 사람을 모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교회가 될 수는 없다. 불금(불타는 금요일 밤)에 홍대 클럽에 가면 사람이 많이 모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을 교회로 보지 않는다. 예수님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님이시고, 그분의 소유이며, 동시에 제자들이다. 우리는 어중이떠중이를 많이 모으려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제자화에 합당한 사람을 찾아 함께 지내야 한다.
우리의 모임이 교회가 되려면 제자가 되어 제자를 삼아야 한다. 만약 제자화의 의무에 예외를 인정한다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교회가 되어버린다. 돌아보면 나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 주변에 있었다. 누구든 회개할 것이 있고, 신앙 조력이 필요하다. 신자든 불신자든 모두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 내 경우에는 가장 가까운 곳에 내 아내와 딸이 있다. 부모와 친척도, 친구와 선후배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주신 명령임에도 우리의 경험이 그것을 거부할 때가 있다. 합당한 자는 너무 적은데, 그들에게 집중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말씀과 경험이 서로 상충된다면 고민할 것 없이 둘 중 하나에 “네”라고 응답하면 된다.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경험을 좇을 것인가?
전도 과정
한편, 합당한 자를 찾아서 깊이 교제하는 것이 전도를 거부하는 일은 아니다. 전도는 합당한 자를 찾는 과정에 꼭 필요하다. 전도해야 제자화를 시작할 수 있다. 씨를 넓게 많이 뿌려야 어딘가에서 열매가 맺힌다.
조지 바나 그룹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회에 나오기까지 교인들은 평균 일곱 번 전도를 받는다고 한다. 또 어떤 거리 전도자는 복음을 전하면 500명 중 1명가량이 영접한다고 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누군가가 이미 전도해 둔 사람이 지금 주변에 있다. 그는 당신의 일곱 번째 전도를 기다리고 있다.
합당한 자는 가까이에 있다. 만약 없다면 가능성은 둘뿐이다. 성경 말씀이 틀렸거나 무엇인가가 우리 눈을 가려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틀렸을 리가 없으므로 가능성은 하나다. 우리가 못 보고 있는 것이다.
합당한 자를 찾아라. 그와 함께 자주 밥을 먹으며 매번 현장에서 예수님을 가르쳐줘라. 그분의 말씀대로 살도록 도우라. 거기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줘라. 그리고 또 다른 이를 제자화하도록 인도하라.
당신이 먼저 예수님을 따르라. 그 뒤를 또 다른 이가 따르게 하라. 제자를 심어야 제자가 난다. 교회는 제자화의 열매다.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_29세에 순교한 인디언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의 일기 중에서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끝까지 가라(도서출판 규장)>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송준기 | 총신신대원 졸. 웨이처치 담임 목사. ‘교회와 선교는 하나’라는 주장을 이론만이 아닌, 선교적 교회 개척 실행을 통해 순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저서 <끝까지 가라> 등 10권의 책에 그동안의 생각과 순종의 여정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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