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안에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박태양 칼럼] 루소, 반(反)기독교적 철학과 교육의 대가

사진: Rohan Makhecha on unsplash

눈먼 기독교(36)

장 자크 루소는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그리고 교육론자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아와 다름 없는 삶을 살았고,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덕분에, 자유분방한 사고(思考)를 소유한 사상가로 성장했다. 루소가 쓴 『에밀』이라는 교육철학서 겸 문학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이 책은 에밀이라는 아이가 출생부터 결혼할 나이에 이르기까지 25년 동안 받는 교육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전체 다섯 편 가운데, 제4편(15-20세까지 교육)에 도덕과 종교가 언급된다. 모르는 사람은 루소를 근대 교육의 대가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는 자기 자녀 다섯 명 모두를 고아원으로 보내 버린 어이없는 인물이었다. 물론 돈이 없어서 그렇게 했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는 인륜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했던 사상가였다.

루소는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 혹은 반감을 갖고서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릇된 교리의 잔인한 불관용의 원리다.” 자식을 죄다 내버린 아버지이면서도 오히려 루소는 하나님을 향해 잔인하고 관용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하나님을 실제로는 물론 이론적으로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의 책 『에밀』에는 그의 반(反)기독교 인식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신은, 2천 년 전에 세계의 저쪽 끝 어딘가 내가 알지 못하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가 죽은 신(神)에 대하여 내게 알려 주고, 그 신비를 믿지 않았던 자는 모두 지옥에 떨어질 것 이라고 이야기한다. (중략)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은 나의 아버지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러 오지 않았던가. 어째서 당신은 저 선량한 노인에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아, 그를 지옥에 떨어지게 했는가. (중략) 그리고 이 모든 불의를 당신이 내게 정의의 신이라고 주장한 신과 타협해야 한단 말인가.[1]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주장이다. 선하게 살았던 내 아버지가 예수를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간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묻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로운 신이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성경은 예수의 이름을 전혀 듣지 못하고 죽은 옛 조상이나 오지(娛地) 사람들 그리고 유아 시절에 죽은 아이들의 구원에 대해 백 퍼센트 확실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물론 로마 가톨릭은 조상림보나 유아림보 같은 황당한 답을 제시하고, 연옥같이 꽤 합리적으로 보이는 절충 지대를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을 수긍시키고자 애를 쓴다. 그러나 성경이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 것을 그렇게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지, 결코 타인이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관계가 아니다. 예수를 모르고 죽은 광개토대왕이 천국에 갔는지 지옥에 갔는지를 성경이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가 지금 예수를 거부하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태중에서 죽은 내 아이가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성경이 똑 부러지게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가 지금 구원의 기회를 저버리는 것은 그냥 핑계일 뿐이다. 기독교 신앙에 대한 루소의 거부는 결국 자기의 이성(異性)을 최고의 판단 기준으로 삼는 가치관에 의한 결과다.

우리가 진리를 정직하게 탐구하고 있다면, 신분에 의한 권리라든가 아버지나 목사의 권위 같은 것은 일체 인정하지 말고, 어릴 때부터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모든 것을 생각해 내어, 양심과 이성의 검토에 맡겨 보자.[2]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를 알아낼 수 있다는 루소의 확신은 모든 합리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루소의 이러한 이성으로의 몰입은 하나님을 향한 시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만든 재앙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똑똑한 자가 아니라 미련한 자가 하나님을 만난다고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신비롭지 아니한가!

계몽주의, 하나님의 빛을 버리고 이성의 빛을 추구한 사상

루소는 이성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계몽주의자였다. 그는 또한 합리적인 범위 내에서만 신을 인정했던 일종의 이신론자였다. 그만이 아니라 볼테르나 로크 그리고 홉스처럼 계몽 사상가로 유명한 이들은 한결같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했던 이신론자들이었다.

유럽의 전제 정치와 기독교적 맹신을 비판했던 프랑스의 작가 겸 사상가인 볼테르는, 의심이 유쾌한 상태는 아니지만 확신은 더욱 우스운 상태라며 유신론자들을 조롱했다. 1755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으로 어린 아이들과 선한 사람들 수만 명이 죽었던 사건을 놓고,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전능하심을 비웃었다. 이 세상에 어떤 목적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을 모두 미치게 하는 것뿐이라고 냉소했다. 그뿐 아니라 볼테르는 성경과 기독교가 백년도 못 가서 없어질 것이라고 자신 있게 예언하기도 했다.

영국의 첫 경험론 철학자로 인정받는 존 로크는 루소와 볼테르는 물론 미국의 정치가 토마스 제퍼슨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인간은 생득적으로 하나님이 부여해 준 본유관념(本有觀念) 같은 것은 없고, 오히려 그 영혼이 백지서판(白紙書板)[3] 같은 상태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성경의 원죄 개념을 부정한 것이다. 문화적 관용을 주장한 그의 저서 『관용론』은 후에 종교적 관용주의(latitudinarianism), 즉 자유주의라는 열매를 맺었다.

『리바이어던』이라는 저서로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성악설을[4] 주장하고, 자신이 유신론자라고 말했지만, 성경을 전혀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았고, 성경의 기적과 예언, 환상 같은 것은 다 착각이며 거짓이라고 믿었고, 귀신의 존재 역시 부정했다. 그가 믿은 신은 이 세상의 최초 원인으로서의 신이었다.[5] 물론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개념이 아니다.

영어로 ‘빛 가운데 들어가다’, ‘빛을 만든다’는 의미인 ‘계몽(Enlightenment)’은 18세기 후반 이미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그 당시는 종교개혁의 여파로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성장했고, 전 유럽인이 구교나 신교 가운데 하나를 믿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그들에게 기독교는 더 이상 개인과 사회의 안내자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닌 인간 이성에 의한 삶의 조명을 추구하는 물결이 거세게 불었던 것이다. 종교적 억압이 여전히 존재하던 시기였기에 그들은 합리적이면서도 이성적인 가치 판단을 존중했고, 그것이 계몽사상으로 종합된 것이다. 종교적 편견과 맹목적 신앙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은 수긍이 되지만,[6] 그것이 지나쳐서 신을 부정하고 성경을 버리려는 시도는 결국 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상대주의 사상)을 열매 맺는 씨앗이 되었다.

‘계몽’을 뜻하는 ‘Enlightenment’는 신학에서 ‘조명’으로 번역된다. 보수 신앙은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빛으로 조명해 주셔야 성경의 참 뜻과 영적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는 그 추종자들에게 악과 권위로부터의, 나아가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를 약속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지금도 애쓰고 있는데, 그 주된 방법이 바로 성경을 이성으로 배격하는 것이다. 성경을 배격하는 자들은 이성의 빛으로 계몽하고자 하지만, 성경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빛이 자신들의 영혼과 삶을 조명해 주기를 바란다.


[1] 루소, 『에밀』, 육문사, 424쪽

[2] 앞의 책 412쪽

[3] 라틴어(고대 로마어)로 tabula rasa 라고 한다.

[4] 性惡說, 인간의 성품이 본래부터 악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로서, 중국에서는 유학자 순자(荀子)가 주창했다.

[5] 버트런드 러셀은 홉스의 이러한 생각조차도 반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이 세계가 탄생의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할 아무 이유가 없으며 모든 사물이 탄생의 원인을 가져야만 한다는 생각 자체가 우리의 상상력의 빈곤에서 오는 정신병에 불과하다.”

[6]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가 혼재하던 17세기 전후 유럽에서는 소위 마녀 재판(사냥)이 유행했다. 로마 가톨릭이 더 심했지만 개신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종교적 죄악이 사라진 것은 바로 계몽주의의 확산 덕분이었다. 하나님을 외면한 자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 자들보다 오히려 더 인간성이 살아 있었다.

[복음기도신문]

*이 칼럼은 필자의 저서 <눈먼 기독교>에서 저자의 허락을 받아 발췌, 게재합니다.

Park Sun

박태양 목사 | 중앙대 졸. LG애드에서 5년 근무. 총신신대원(목회학), 풀러신대원(선교학 석사) 졸업. 충현교회 전도사, 사랑의교회 부목사, 개명교회 담임목사로 총 18년간 목회를 했다. 현재는 (사)복음과도시 사무총장으로서 소속 단체인 TGC코리아 대표와 공동체성경읽기 교회연합회 대표로 겸임하고 있다.

<저작권자 ⓒ 내 손안의 하나님 나라, 진리로 세계를 열어주는 복음기도신문. 출처를 기재하고 사용하세요.> 제보 및 문의: 

Print Friendly, PDF & Email

관련 기사

20240929_Sky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계시록 1:7의 예수님과 애통하는 자들의 정체 연구 (3)
lgbt
[GTK 칼럼] 친 동성애적 성경해석에 대한 이해와 답변 (2): 롬1:24-27과 틀린 “착취 논거”
20240926_J.H
[TGC 칼럼]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바빙크
The gospel of the cross 20211123
[이상규 칼럼] 사랑과 용서

최신기사

오늘은 회개할 시간
교회는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면 충분하다
“내 혈관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흐른다”
레바논 교회들, 공습 속에도 문 열고 피난처 돼
[정형남 칼럼] 대체신학 이슈와 계시록 1:7의 예수님과 애통하는 자들의 정체 연구 (3)
이스라엘, 헤즈볼라 수장 '제거' 공식발표…중동 정세 격랑
[GTK 칼럼] 친 동성애적 성경해석에 대한 이해와 답변 (2): 롬1:24-27과 틀린 “착취 논거”
Search

실시간최신기사

20240423_sunshine
오늘은 회개할 시간
306_6_1_Gospel(1068)
교회는 예수 십자가의 복음이면 충분하다
306_8_1_Views in Books(1068)
“내 혈관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