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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ize Wisdom 그를 높이라 (잠4:8) -

[TGC 칼럼] 설교자를 위한 세 가지 경고

사진: Sixteen Miles Out on unsplash

신학적으로 건전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얼마든지 지옥에 갈 수 있다

타락한 세상에서 설교라는 특권을 능가하는 소명은 많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에 기름 부으심으로 죄로 어두워진 영혼에 그의 영광의 빛이 비취도록 정하셨다. 정기적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은 오랫동안 그의 백성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있던 거짓말이 그리스도의 발 앞에 굴복하도록 만드셨다.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거룩한 지식이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를 통하여 이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신다. 간단히 말해서, 설교는 실로 위대한 소명이다.

그러나 강단 안팎에는 영혼을 저주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당신과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도 강단의 함정에 빠졌다. 사역을 완수하고자 하는 설교자로서 내 영혼을 위협하는 세 가지 위험을 이 글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싶다. 나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를 하나님이 지켜주셔서 설교라는 높고 거룩한 부르심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1. 진리를 아는 것을 진리를 믿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강해 설교자로서 우리의 의무이다. 설교 강단에 무지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우리의 임무는 성경의 진리를 발굴하여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또 열정적으로 교인에게 선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슬프게도 강단에서 선포되는 진리가 흔하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분명한 진리를 바로 배우고자 하는 최소한의 소망을 가진 적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는 바로 외쳐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위험이 있다. 신학적으로 건전한 설교를 하는 설교자도 얼마든지 지옥에 갈 수 있다. 성경이 무어라고 가르치는가? “그런데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떱니다”(약 2:19).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우상에 빠진 사람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주권을 외칠 수 있다.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설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교하면서 정작 그 설교 속에서 의를 찾는 것,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내가 살을 붙이는 건 쉽다. 말씀은 참으로 옳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롬 7:18-19).

속아서는 안 된다. 약을 팔아서는 아무도 고칠 수 없다. “의사여, 너 자신을 치유하라”는 모욕은 참으로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어야 한다. 강단에서 교인을 향해서 처방하는 동일한 치료법에 우리도 환자로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첫 소명은 강해 설교자가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주일 사역의 목표가 단지 하나님의 진리를 설명하는 원고를 들고 강단에 오르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진 양심, 비길 데 없는 그의 사랑을 찬양하는 영혼,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사로잡힌 마음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강단에 오르기 전과 후에 믿음과 회개의 마음으로 내 설교에 나부터 응답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내가 목격한 좋은 예가 있다. 설교가 끝나고 교인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자신의 설교 내용 중에서도 특히 자기에게 영향을 끼쳤던 부분을 얘기하는 어느 목사의 모습이었다. 설교자로서 하나님 말씀의 통치 아래 자신을 위치시키는 좋은 모델의 한 사례이다.

형제여, 교인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지 말라. 정작 교인을 위한 말씀을 준비하는 당신이 예배를 마치고 매주 굶주린 상태로 집에 가게 될 것을 두려워하라. 말씀을 연구하는 당신이 먼저 그 말씀의 열매에 먼저 참여하도록, 설교자에게 필요한 겸손과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라.

2. 설교 사역의 열매와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열매를 혼동할 수 있다

이 위험을 나는 팀 켈러의 설교 덕에 알게 되었다. 2016년 비슨 신학교(Beeson Divinity School) 졸업식에 참석한 그는 좀 기이하고 작은 강단에서 이 점에 관해서 설교했다. 이 간교한 거짓말을 폭로한 켈러에게 나는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사탄 원수가 말씀 사역자를 죄에 안주하도록 유인하는 데에 있어서, 과연 이것보다 더 기만적인 방법이 있을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사역의 성공이라는 목표에 눈이 멀어 성령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력 질주하다가 결국 믿음의 난파라는 결과를 맞는 설교자가 얼마나 많은가? 사역 내내 그들은 “추종자들”에게서 격려받는다. 사역의 열매가 자신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며, 더불어서 자신에게는 평범한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는 규칙이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자랑스럽게 믿기까지 한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배반한 바로 그 유다가 귀신도 쫓아냈다는 사실을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지 모른다.

우리는 지금 설교의 은사를 경건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시대에 사역하고 있다. 설교의 은사는 있고 성숙하지 못한 설교자를 선택하는 교회는 많지만 경건하지만, 평범한 설교자를 선택하는 교회는 거의 없다. 오늘날 교회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족한 경건의 모습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하다. 그러나 부족한 설교를 눈감아주는 데에는 그리 너그럽지 않다.

형제여, 이런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현재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안에서는,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두려워해야 한다. 밖으로는, 우리의 설교를 듣는 청중의 판단에서 위안을 찾으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교훈이 우리의 표준이 될 수 있다. “나는 하나님 앞과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두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그대는 말씀을 선포하십시오”(딤후 4:1-2).

강단에 선 우리를 보는 교인들처럼 내가 나를 본다면, 설교의 반응을 성령의 열매로 혼동하는 유혹을 더 많이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최후의 그날에 눈을 떼지 않을 수만 있다면, 사탄의 치명적인 거짓말에 빠지지 않고, 나의 영혼만이 아니라 내 설교를 듣는 교인들의 영혼까지 구원하는 삶과 사역을 갖춘 설교자로서 자격을 얻을 것이다.

3. 모든 사역(설교도 포함)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배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려운 구절을 본문으로 설교 준비를 할 때 내 기도는 정확한 의미를 알려달라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녀가 영적으로 충족하지 못한 채 교회를 떠나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이단적인 말을 하지 않고 설교를 잘 마무리하는 것을 목표로 기도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나름 중요하지만, 핵심은 아니다.

종종 설교 준비를 하면서 생기는 염려를 보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두려움의 이유가 하나님이 나쁘게 볼까가 아니라 내 명성에 흠이 갈까이다. 가끔 설교를 망치고 절망한 마음에 앞자리에 내려와 앉을 때 나를 채우는 괴로움은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높이지 않았다는 데에서 오는 슬픔이 아니다. 내가 대단한 설교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설교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붙잡아주는, 그래도 설교가 괜찮았다는 교인들의 격려가 아니다. 내게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속한 영광을 도둑질하려고 했던 내 마음을 뉘우치는 상한 마음이 필요하다.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참된 신학은 송영(doxology)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주장하면서,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고전 1:31)라는 훈계로 끝맺는다. 나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실제로 나 자신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느끼는 괴로움과 기쁨의 본질로 바로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라는 “율법”은 제대로 선포하는지 몰라도,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는 정신은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교자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복음의 목적을 왜곡한다면, 그들도 복음의 내용을 왜곡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에서 돌아서게 하는 번영 복음 설교자들과 하나 다르지 않다.

형제여, 영광은 인간의 몫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으로 우리까지도 지키실 것이다. 내 영광을 추구하는 자존심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자. 내 영광만을 바라는 비열한 죄까지도 용서하는 큰 자비가 십자가에는 있다. 내가 전하는 바로 그 복음이 교만한 설교에 대항하는 최고의 무기가 되도록 하자. 내 영혼과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하자. 내가 자랑하고 싶은 모든 것, 심지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조차도 죄 없는 진공 상태가 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러나 나 자신과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음을 찬송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 시간 다시 한번 기뻐하고 찬양한다.

주님의 자비로 인해 주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우리가 정작 나중에 주님의 은혜에서 제외되는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복음기도신문]

우리는 지금 설교의 은사를 경건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시대에 사역하고 있다

원제 : Three Warnings for Those Who Preach the Word 

케네스 음부구아 Kenneth Mbugua | 케네스 음부구아는 케냐 나이로비의 Emmanuel Baptist Church의 목사이며, TGC Africa 이사이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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