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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칼럼] 사역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사진: Nik Shuliahin on Unsplash

자기 관리와 테라피를 바라보는 방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재밌는 조크 영상을 최근에 봤다.

옛날: 테라피 받고 있다고? 무슨 문제 있어?

현재: 테라피 안 받고 있다고? 무슨 문제 있어?

이런 농담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정신 건강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상당히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는 과학과 심리학이 인간이 갈등과 트라우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어느 정도 밝혀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치료 사회(therapeutic society)로 통칭하는 문화적 경향이 가져온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는 이런 경향을 유약함(“죽지 않을 만큼 고된 일은 우리를 더 약해지게 한다”)과 감정적 추론(“늘 너의 느낌을 믿어라”)이 빚어낸 “대단한 비진실(Great Untruths)”이라고 표현한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도 이런 변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자기 관리(self-care)를 중시하는 문화적 변화가 이제 막 목회에 발을 들이는 사역자에게 잘못된 가정을 하도록 만드는 건 아닌지 우려할 정도이다. 지쳐서 나가떨어지기 전에 자기 관리에 신경을 쓰라며 주변에서 먼저 나서서 권고하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진액을 쏟아 사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게 나보다 나이 많은 세대였다. 그러나 나보다 젊은 세대는 그 반대가 아닐까 싶다. 지금 세대는 아예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 힘들더라도 좀 더 자신을 바쳐서 사역하라는 소리가 나올 지경에 이르기까지, 알아서 미리미리 자기 관리에 치중하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세대 연결하기

종종 나는 나 자신을 “시니어 밀레니엄 세대”라고 부르곤 한다. 내가 태어난 연도가 이 인구집단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쪽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십 년 뒤에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는 나와 확연히 다르다. 문화 환경이 워낙 빠르게 변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온라인은 한 때 주변 장치(모뎀 전화 접속을 기억하는가?)를 활용해야 사용이 가능하던 기기에서 아예 삶 전체를 관통하는 연결과 소통의 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와중에 테라피와 자기 관리에 대한 추세는 특히 Z세대와 함께 가속화되었다.

스트레스와 과로, 사역 압박과 갈등을 견디지 못해 죄에 빠지거나 탈진해버린, 나보다 고작해야 몇 살 더 많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를 나는 여러 명 목격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나는 항상 몸과 영혼의 건강을 강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교회는 건강한 교인, 특히 건강한 목회자를 길러내 새로운 모델로 세상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경계를 설정하고, 새로운 습관을 실행하고, 지속 가능한 일과 휴식의 리듬을 찾고, 자기 몸과 마음을 이해하고, 그리고 과도한 확장이 초래하는 경고 신호를 유심히 살피는 행동은 건강한 가정과 교회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끊임없이 효율성과 효과로 자신을 판단하고 움직임과 생산성을 중시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과도함이 주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에게는 안식일이 필요하다. 더 나은 습관이 필요하고, 영혼을 보살피기 위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정서 건강, 안식일의 휴식, 가족과의 시간, 마음을 챙기는 기도, 그리고 조급함의 제거에 중점을 둔 최근에 나온 다양한 책들이 생각난다. 나는 그것들을 다 읽었다. 하나같이 다 좋은 책이고 기꺼이 추천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우리의 사명을 왜곡하여 인간의 유한함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과로로 자기를 망치는 사람도 있지만, 동시에 자기 관리라는 선물을 자기도취, 심지어 게으름으로 왜곡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힘든 일은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고통스럽거나 지치게 하는 일을 만날 때면 이건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일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자신을 기만할 수 있다.

사역에서의 불편함

다른 모든 직업과 마찬가지로 목회에도 어려움이 있다.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에서 갈등과 불일치, 불편함을 경험하는 건 당연하다. 사도 바울의 사역을 보자.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일(고전 9:27), 사도로서의 수고(고전 15:10), 자기 백성을 위한 고난(골 1:24; 고후 11:24-29), 그리고 힘을 다해 분투함(골 1:29)으로 자신을 “희생하는”(고후 12:15) 사역을 말하고 있다. 그는 “나의 피를 붓는 일”(빌 2:17)이라고까지 묘사했다.

리더십은 때때로 갈등을 수반한다. 그렇다고 모든 갈등이 다 안 좋은 것은 아니다. 모든 불편함이 다 트라우마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불편함이 없는 사역은 없다. 진짜 사역에는 어느 정도 불편함이 따라오는 게 당연하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완전히 혼자가 되는 것뿐이다. 사랑에는 방해가 따라온다. 마찬가지로 사역에는 일, 그것도 힘든 일이 따라온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가득하며 그 어떤 뛰어난 마음을 챙기는 앱이나 명상 수련도 타락이 가져다준 모든 악영향을 제거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너무 힘든 나머지 죄를 짓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게을러서 죄를 짓기도 하지만, 두 가지 다 하나님이 주신 노동이라는 좋은 선물에 대한 타락한 인간의 반응이다. 한 가지 죄에 대한 답이 다른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세대마다 다른 생각

중년에 접어든 목회자 중에는 자기 관리, 더 건강한 습관, 그리고 지속 가능한 리듬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너무 쉽게 무시함으로 스스로를 해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하는 젊은 사람들을 향한 나의 걱정은 전혀 다르다. 사역의 본질과 자아실현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에 매달림으로 자기를 해칠까 봐 두렵다.

자기 관리의 중요성이 떠오르는 최근 추세는 오랜 근무 시간, 고된 일, 과도한 확장, 그리고 과중한 사역의 부담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세대로 인해서 발생한 결과이다. 자신을 소진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당연한 길이라고 생각한 게 그 세대였다. 그런데 상황이 뒤집히면 어떻게 될까? 자기를 돌보는 노력이야말로 자기 자신뿐 아니라 주변까지 포함해서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결과, 자기를 돌보는 데에 정신이 팔려서 사역 현장에 각종 어려움이 산적해도 상관하지 않게 된다면?

자기 관리와 같은 좋은 일이 과도한 자기 집중으로 인해 왜곡되었다. 그 결과 사역이라는 큰 소명 안에서 영적 건강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요소였던 자기 관리가 아예 소명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이제 소명은 나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고, 사역은 단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전 세대가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다고 그 해결책이 다음 세대의 덜 일하기(underwork)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전 세대가 자기 관리에 소홀했다고, 그 해결책이 다음 세대의 자기도취가 될 수는 없다. (영광스러운 포부가 가져다준) 조급함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겠다는 욕심으로 사역 속 불편함 자체를 무자비하게 거부할 수는 없다. (사역을 고작 몇 달 한 사람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어서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할 때, 나는 “뭐? 탈진이라고? 당신은 아예 시작도 안 했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니까 조심하자. 우리는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사역 현장에 들어간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비판받아야 하고, 수정해야 할 불건전하고 불균형한 접근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전 세대가 애쓴 것들을 다음 세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자. [복음기도신문]

원제: Ministry Is Tough: When Self-Care Becomes Self-Absorption

트레빈 왁스 Trevin Wax |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

이 칼럼은 개혁주의적 신학과 복음중심적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2005년 미국에서 설립된 The Gospel Coalition(복음연합)의 컨텐츠로, 본지와 협약에 따라 게재되고 있습니다. www.tgc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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